김기종, 지워질 수 없는 과거 혹은 현재에 관한 코멘트

Comment 2015. 3. 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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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나의 코멘트.


글 자체야 평범한, 어쩌면 감상적으로까지 읽힐 수 있는 글이다(오독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미리 말하자면, 링크된 글의 필자는 김기종의 폭력을 전혀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심 한가운데서 김기종의 사진을 불태우면서 "나는 리퍼트다"라고 외치는 종교적 반응을 옆에 두고 본다면 이런 종류의 감상주의 쪽이 더 합리적이고, 건전하고, 정당하다. 자신보다 더 우월한 존재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또 자신의 주인에게 버림받기를 극렬히 두려워하는 노예의 정신이 전자를 지배한다면, 후자에게는 역사의 비참함이 새겨진 흔적에 귀기울이는 사려깊음과 동료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우애감이 존재한다. 필자의 감상주의는 폭력에 대한 옹호나 나이브한 판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민됨의 필수요건이다.


이 사태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보면서 한국의 시민들 사이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을 본다; 누군가는 이 사회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파악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것이고, 누군가는 끝까지 시민됨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비록 한국사회를 먹어치우고 있는 어두운 정신, <파리대왕>의 소년들을 지배한 광기와 같은 정념의 파도가 후자의 덕목을 위태롭게 조여오고 있음에도,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보다 합리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인 우애를 망각하지 않는 인간-시민으로 남아있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한다. 어설픈 '정치적 현실주의'나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종류의 진술에서 그치는 태도는 오늘날 인간-시민으로 남아있기 위해 필요한 필사적인 노력의 무게로부터 고개를 돌린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가장한 비합리성에 가깝다.


점차 다가오는 광기 앞에서 인간적인 덕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점은, 마치 극우파들의 집회가 과거로부터 내려져온 유령들의 현전임을 인정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정도에서 김기종의 광기가 한국의 지워질 수 없는 과거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그것이 극우파들과 김기종의 광기가 갖는 유일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다. 현대 한국의 정신을 발전주의와 그것을 지탱해온 가속화된 자본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발전론적 서사의 끝에서 과거의 상처들을 망각할 수 있으리라 믿어왔다. 지난 해부터 지금까지는 거의 모든 면에서 과거가 현대인들의 눈 앞으로 다시 뛰쳐나오는 시기였다. 영화 <국제시장>이 나왔고, 서북청년단이 부활했으며, 마침내 27년 전의 비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정신이 물리적 폭력으로 현전했다. 대전에는, 현재의 행정이 '예산부족'을 이유로 방치하고 있는 국가폭력의 희생자 수천의 시신이 여전히 묻혀있다. 망령들의 연속된 출현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할수록 과거는 우리의 턱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을 보도록 강요하리라는 사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김기종의 과거를 대면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한--적어도 그것이 방조한--폭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지금의 현실과 아주 멀지 않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국가와 대자본의 이해관계만 남고 정치적 주체가 생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시민사회가 한갓 쪼그라든 상황, 그마저도 모자라 국가-대자본의 결합체가 그 저항자들을 남김없이 말살하기 위해 진력하는 상황은 국가가 요구하는 규범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이 매우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김기종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 것인가?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물론 오늘날에도 노조를 부수기 위해 자본이 고용한 용역과 송전탑을 위해 노인들을 치워버리는 경찰력은 여전히 존재한다--경제적 삶과 제도적/비제도적 삶에서의 박탈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그 본질적인 착취-지배관계를 바꾼 것 같지는 않다. 권력의 행로에 조금이라도 저항할 수 있는 개인들에 대한 경찰/정보기관의 광범위한 사찰은 여전히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차없이 움직이는 국가권력을 보여준다. 20여년 뒤 제2, 제3의 김기종을 목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나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칼을 휘두른 이를 추동한 과거의 상처를 더듬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감상주의라면, 나는 그를 상처입힌 과거로부터 우리가 과연 몇 발자국이나 떨어져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그는 잊혀질 수 없는 과거이면서 동시에 다시 찾아올 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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