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성폭력을 저지를까 걱정해본 적 있어요?’": 가해가능성과 윤리적 주체
Comment 2015. 4. 3. 13:02칼럼원문 링크: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042§ion=sc78§ion2
주요인용: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자 본격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 및 성교육을 시켜보려고 했다. 유아기 성교육보다는 좀더 나아간 정보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료를 모으다 그간의 아동 성폭력 예방에 대한 주의 사항들이 ‘여성맞춤형’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다.
성폭력 예방교육은 가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아닌, 피해 당하지 않는 방법이 주 내용이다. 성범죄 피해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통계까지 뒷받침되어, 결국 이런 교육은 ‘여자애들용’이라는 느낌만 갖게 했던 것이다. 여전히 성폭력 예방을 위해 많은 부모들이 여성으로서 올바른 자세와 태도, 가치관을 가지라는 성적 통념들을 읊어대는 경향이 있다. 학교의 성폭력 예방교육도 비슷하다. 초등학생이 되면 아이들도 점점 성폭력은 ‘여자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런 교육이 아들에게 적합할 리가 없지. 남자인 아들에게 자기 일이라고 여겨지는 내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이래야 여성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꼴이니 앞뒤가 맞을 수가 없다. 또한 종국에는 ‘여자는 이런 거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까 저어하게도 됐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고 온 지인의 고학년 아들 녀석이 ‘임신하는 여자애들이나 조심해야 할 이야기’를 자기가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지 않나. 그러면서 ‘여자애들한테는 이것도 해선 안 된다 저것도 해선 안 된다, 같이 놀라는 건지 놀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한탄도 했더란다. 이러다가는 회사원이 되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고 와서는 ‘여직원과 말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할 꼴이라며 지인이 뒷목 잡던 기억이 난다."
"정말 웃긴 일은 2013년 일어난 아동 성폭력 범죄 총 1천51건의 가해자 99%가 남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성폭력이 여자들 문제라고? 거의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 거의 대부분의 가해자는 남성. 황당하게도 이것처럼 성별이 ‘균등’하게 이루어진 일을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최소한 피해-가해 양 측면만 동일하게 사고해도 여자들 문제라는 말 따위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피해를 줄이는 일은 무엇보다 가해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일에 있다. 모든 도덕적 가르침은 가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때리지 마. 욕하지 마. 폭력은 안돼. 차별하지 마!
하지만 성폭력 문제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 특히 ‘아들’에게 성폭력의 가해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주는 부모는 흔치 않다. 기껏해야 요새는 애들도 시시해서 하지 않는 ‘아이스께끼 같은 것 해서 여자애들 놀리면 성희롱이야’ 라고 주의 주는 수준일 뿐이다. 아들들은 간과된 피해 가능성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도 놓친 가해 가능성의 대상자이기도 하단 말이다.
주변 아는 아들엄마들에게 물어봐도 좋다. “아들이 혹시 성폭력을 저지를까 불안하거나 걱정해본 적 있어요?” 물론 친밀함의 정도나 아들의 나이에 따라 수위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이 휘둥그래 눈을 뜨고 ‘내 아들을 뭘로 보고 이딴 질문을 하냐’ 할 것이다."
"그런데도 엄마가 되면 특히 아들엄마가 되면, 내 아들만은 이 시나리오 속에 넣지 않게 된다. 그런 시나리오 속에 들어갈 아들들은 애초에 따로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 아들은 ‘주’가해자가 아니라 친구들 때문에 휘말린 것이라고 한정한다. 성폭력의 가해자는 남자이지만 내 아들은 절대 성폭력의 ‘가해자’일 수 없다는 생각은 굉장히 팽배하다.
아들은 직접적 피해가 없기에 성폭력 문제에 관심이 덜하다는 말. 이 말은 실은 아들의 가해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아들엄마가 막다른 길에서 하는 표현에 불과해 보인다.
[...]
성폭력 예방교육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삶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 가해의 기준과 맥락을 가르치고 그런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게 하는데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아들의 성폭력 가해 가능성에 대해 힘을 쭉 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경직된 생각을 쫙 풀고, 가볍게, 포괄적으로."
이하는 나의 코멘트: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절대로 피해자의 위치에만 있지 가해자의 위치에 선/설 일은 없다는 놀라운 편견을 갖고 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자각의 결여는 곧 우리 자신을 타인에 대한 책임을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주체로 만든다; 나는 올해 초에 엄청난 관객수를 끌어들인 <국제시장>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오로지 역사의 희생자/피해자/생존자이기만 했다는 원한감정에 붙들려 끝까지 성숙하지 못하는 정신을 보았다. 적어도 근대적인 윤리관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각하는 능력은 근대적 주체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소년 성폭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창동의 <시>는 대속을 다루고 있지만, 현실의 시점에서 볼 떄 문제는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피해자의 죽음 이후에도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일상을 무난히 살아가게 만드는 주체화과정, 보다 직접적으로는 교육 그 자체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한편으로는 아동/청소년 성폭력 교육을 언급하고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층위에서 우리가 우리를 성숙한 근대적 주체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 우리가 우리로부터 윤리적 감각을 박탈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윤리의 부재를 말하기 전에 윤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혹은 만들어지지 못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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