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6일 일기: 세월호 서울광장 추모제

Comment 2015. 4. 17. 14:00

시청역 개찰구를 통과해 5번 출구로 향했다. 이미 인파가 적지 않았지만 출구에 가까이 갈수록 몇 명씩 무리지은 사람들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지난 1년간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이미지가 된 노란 리본과 국화꽃의 빈도도 그만큼 늘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약한 정체가 있었다. 내려들어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올라나가는 사람들은 느렸다. 밟을 때마다 흰 빛이 들어오는 계단을 한 단씩 올라서면서 하늘을 보았다. 저녁 7시 15분, 하늘은 저녁 어스름을 품었지만 그 사이에도 희미하게 구름과 구름없는 맨 하늘을 분간할 수 있었다. 오전부터 후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과 지붕을 때리던 빗줄기는 다행히 추모제 내에는 다시 오지 않을성 싶었다. 지상에 발을 내딛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뭉쳐 만들어진 검은 물결이 5번 출구까지 닿았고 우리는 한동안 일종의 교통정체 속에서 이따금씩 한 발자국만 움직일 수 있었다. 하늘에서 보았다면 5번출구는 거대한 음울함의 물결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입처럼, 그리고 그 토해낸 것들이 바람을 타고 빠르게 어디론가 가는 대신 마치 공기보다 무거운 질량을 가진 것처럼 한 자리에 머물러 천천히 두껍게 쌓여올라가는 양 보였으리라. 입구 바로 앞에 쳐진 천막은 시야를 가로막을 뿐더러 사람들이 광장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을 우회해 왼쪽으로 상당부분 돌아나가야 하는 일종의 장애물처럼 기능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될 때까지 몇 분을 더 줄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 길의 끝까지 온 이들은 다시금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광장은 이미 사람들이 물샐틈없이 꽉 채워 앉아 있었고 그 주변을 서서 오가는 이들조차도 수 겹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뚫고 들어가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이상 1분에 두어 발자국 정도로 광장 주변을 맴도는 거대한 인파의 조류--그 속도와 곳곳의 정체국면을 생각하면 이 비유는 문자 그대로 들어맞았다--에 섞여 헤매는 길 말고 다른 선택지가 특별히 없었다. 그 밖에는 차도와 노란 빛 폴리스 라인이 군중이 도로를 점거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틀어막았고 결과적으로 그 안의 인구밀도는 폭발적이었다. 나는 이 정도로 밀집한 군중 속에서 휴대전화 전파 자체가 끊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지인과 수십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광장에서 꽤나 외곽으로 나가서야 전화 비슷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문자를 보내기 위해서 나는 전화기를 머리 위로 높게 쳐들어야만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5번 출구에서 6번 출구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일종의 '영웅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여기가 아닌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는 몰랐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오가는 흐름들이 엉켜 헝클어졌고 적지 않은 이들은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느꼈는지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길이 갑자기 '좌석'이 되어버리자 그 뒤에 오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한 기분으로 다시금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어딘가에서 TV에 나오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과 100-200m 정도 길이를 통과하기 위해 10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인과 나는 군중의 가장 바깥 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추모제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했고, 꽤 멀리서 비치는 거대한 스크린과 이따금씩 귀가 멍멍하게 울리는 확성기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이승환의 노래를 전혀 라이브답지 않게 들은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생각했다. 모두가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1.


 나의 집회 경험은 매우 간헐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려우나, 2008년 광우병/한미FTA반대 집회와 비교할 때 7년이 지난 지금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집회 참가 자체가 매우 수동적인 '관람'이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2015년 4월 16일의 집회가 추모제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8일은 어떨지 모르겠다).


 2008년의 집회는 그 이전의 집회--나로서는 기록에 의존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는--와 비교할 때 확연히 탈중심화된 에너지의 집적과 같았다. 요컨대 집회의 고전적인 형태가 1) 다수의 에너지가 결집하여 비-법적인 공간을 만들고 2) 그 에너지가 조직화되어 일종의 (주로 지배적인 권력에 반하는) 전술적인 행위를 꾀하는 것이었다면, 2008년은 1번의 요건은 충족했지만 2번의 측면에서 유효한 전술적 행위로 이어지지 못했다--우파들은 "종북 및 사회전복세력에 의한 폭력선동"으로 2008년을 정의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러한 분석은 사실관계에서부터 완전히 틀렸다; 2008년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대중을 조직화/형식화하는 조직이 등장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주목해야 할 특성이자 그것이 경찰권력 앞에 무력화되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경찰은 단지 더 많은 자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전술적/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군중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포스트모던적/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진보단체 및 '먹물'들이 2008년 집회가 확대될 때 이를 매우 반겼던 것은 부분적으로 집회가 이론에서 말하는 '탈중심화'를 문자 그대로 체현했기 때문이다. 이때 여러 조직/단체에서 깃발을 들고 참석했지만 이들을 조직화하는 동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막연히 '청와대로 가자'는 방향성만을 지녔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분노의 덩어리가 되어 경찰과 계속해서 충돌했으며 결과적으로 소진되었다. 최초에 군중의 폭발적인 수에 당황하는 듯 보였던 경찰은 이윽고 여유를 찾았고 사실상 6월 이후 집회는 경찰의 예정된 관리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그 사실을 반성적으로 자각하는 사람조차도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러한 사고를 해야할 심급에 스스로를 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이명박 정부를 엿먹이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군중'의 일부가 되는 것 자체를 두렵게 여겼다; 특정한 정파에 소속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만연했다; 그런 점에서 2008년은 정치적 행위와 탈정치적 의식의 교차가 특징적으로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2014년 이후 세월호 정국과 연관된 집회는 참여하는 주체의 수동성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작년 5월의 집회에서 거대한 스크린이 등장한 것을 아직도 매우 특이한 경험으로 기억한다(http://begray.tistory.com/81). 2008년이 거대한 대중동력을 모으고 아주 막연한 형태로 표출할 수 있었다면, 2014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겨우 서너번 정도 참석한 집회에서 공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은 현장의 모든 에너지가 무대/스크린에 집중되고 참여자들은 스크린을 보고 앰프에 귀기울이는 이상의 다른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스스로가 416의 추모에 개인적인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면 집회에 참석하는 일과 인터넷/TV를 통해 영상을 보는 일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했을 터이다. 단순히 관람객으로만 참여할 수 있다면, 머릿수를 불리는 게 언론에 보도되는 참석자 수를 늘리는 일--그 자체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집회는 집회 특유의 에너지와 분위기로 비-법적인 공간을 창출한다는 데 그 독특함이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는 비-법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콘서트 장에 가까웠다. 일찍 와서 '좌석을 배부받은' 사람들은 2-3시간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고,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바깥에서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양자의 괴리는 매우 컸다. 2008년의 집회가 좋든 싫든 다양한 구성원의 집회참여자들이 서로를 대면하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면, 2015년의 추모집회에서 참여자들은 오로지 스크린과 무대에 집중해야만 했다; 마치 일종의 소비행위처럼 말이다.


 2015년 416의 추모제에서 매우 특징적이었던 또 하나의 사실은 모든 '깃발'이 주최측의 요청에 의해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나는 늦게 와서 자세한 맥락을 모르고 먼저 왔던 이들에게 이렇게만 설명을 들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추모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오로지 스크린-무대와 1 대 1로 대면하는 개개인으로만 남아있기를 요구받았고 어떤 집단으로서 추모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주최측은 탈정치화된 순백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모두가 오로지 추모하는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정치적 주체로서, 정치적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 세월호를 기억하고 행위할 수는 없는가? 세월호가 정치적인 의제인지의 여부, 그리고 추모제가 정치색이 탈색된 공간으로 남는 게 나은지의 여부는 여기서 논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조치가 2000년 후반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 '탈정치화된 개인'에 규범적 위치를 부여하는 탈정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그다지 거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조직화가 무대 위의 유족들이 피가 배어나올 듯한 목소리로 외치는 (현 정부의 무책임에 대한 분노를 담은) 정치적인 메시지와는 명백히 형식적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주최측은 공연의 퀄리티를 제외하고는 아마추어적이었다; 앞서 말했듯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행로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는 이루어지지 않거나 포기된 듯 싶었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피로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서울광장의 협소함(지도를 참조하면 시청광장은 덕수궁 공원의 1/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및 이렇게 작은 공간만을 사회적 행위로 '허락'하는 경찰행정에게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주최측의 미숙함도 간과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미숙함이 모두를 비집단적 개인으로만 간주하는 어떤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민이 되기 위해, 사회적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광장으로 왔지만 그곳에서 사회적 시민의 결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냉소적일까?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416 추모제가 반드시 직접적인 정치적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모제는 기본적으로 비극적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자리고, 그 자리가 본연의 기능을 다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월호 정국이 명백히 정치적인 맥락--다른 누구보다도 집권세력 자신들이 초래한--에 놓여있음을, 그리고 유족들 자신들 또한 그러한 '정치화'의 희생자로서 스스로의 정치적 성격을 자각하고 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집회가 어떤 형태로 정치적인 의식을 형성할 것인지를 자문할 수 있다. 적어도 그 형식적인 측면에서 2015년 4월 16일의 추모제가 그러한 기능을 잘 수행했는지에 대해서 나는 조금 유보적이다; 오히려 그 형식과 배치 자체가 집회참여자들에게 탈정치적인, 색깔없는 개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게 아닌지 질문하고 싶을 정도로.



2.


 경찰의 시위관리능력 혹은 전술적 역량이 확실히 집회대중의 그것을 상회했다는 사실은 한 치의 의구심 없이 말할 수 있다. 매우 준법적인 집회군중들은 시청광장의 엄청난 비좁음을 감수하면서까지 폴리스라인을 거의 넘어서지도, 그것을 확장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한 노인과 경찰 사이에 아주 사소한 국지적인 충돌이 있긴 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세종대로를 횡으로 봉쇄한 경찰들은 완벽한 저지선을 이미 형성해놓았다. 과거에 '원시적인' 닭장차벽이 있었다면, 오늘은 '선진화된' 강화플라스틱 벽이 있고 벽 너머에서 경찰들은 채증카메라를 마치 집단사격하듯 난사했다. 추모제로부터 떨어져나와 그곳에 미리 와 있던 소규모의 군중들은 무력했다; 분노에 찬 소수의 사람들이 벽을 주먹으로 때리고 닭장차를 발로 차다가 지쳐 떨어졌다. 주변의 길도 조금 걸어가보면 닭장차와 전경방패로 거의 완벽하게 막혀있었다. 나는 광장에서 조금 일찍 떨어져나와 다른 곳들을 훑어보았는데, 추모제가 끝나고 행진에 참석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찰은 아예 청계천로로 행진방향을 유도하고 그곳에서 행진참여자들을 좁고 긴 길로 몰아넣기로 작정한 듯 싶었다. 전열을 길고 얇게 만들도록 상대를 유인한 뒤 소수의 고립된 선두를 각개격파하는 것이 아주 기본적인 전술적 교리라면, 집회참여자들은 이러한 경찰의 전술적 행위에 대응한만한 역량이 결여되었다. 아마 대규모 집회의 빈번함에 비해 집회관리의 철저함에 있어 한국경찰을 능가할 만한 경찰권력은 드물 것이다(그리고 경찰의 전술을 분석하고 다른 형태의 전술적 행위를 제시할 수 있는 집회가 탄생하는 날이 가까울 것 같지는 않다).



3.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11시쯤 시청역으로 들어갔다. 세월호 추모의 뜻을 담은 걸개그림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걸개그림들에 칼로 베인 자국이 선명했고 하나는 꽤 심하게 잘려져 아예 고정틀에서 빼낸 상황이었다. 아마도 신고자인듯 보이는 사람들이 경찰에 무언가를 거세게 항의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칼로 걸개그림을 훼손했고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신고자들은 오늘날 특징적인 공권력에 대한 불신감으로 말미암아--세월호 사건 이후 누가 공권력을 신뢰하겠는가?--경찰에게 이후의 사건처리가 흐지부지되는 게 아닌지 매우 깊은 의혹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상적인 대처를 약속한 경찰 둘과 한 여성이 자리를 떠났는데,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그럼 저 여성분이" 라고 꺼내자 아마도 신고자인듯한 다른 여성이 격한 목소리로 "저 여성분이 아니라 저 년이지!"라고 말을 받았다. 그때서야 경찰들과 함께 간 이가 참고인이 아니라 현행범임을, 다시 말해 칼을 가져와 기념물을 훼손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성으로, 슬림한 청바지와 검은 상의를 입고 검은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붙잡혔을 때 흘린 것인듯 운 자국이 보였다. 아마 신고자의 말이 없었다면 그렇게 작고 평범하고 소심하게 보이는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종류의 행위는 주로 2-30대 혹은 나이든 남성들에 의해 범해졌을 거라고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편견에 불과했다. 과연 그는 무엇 때문에, 어떤 심정으로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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