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 27일 일기.

Comment 2014. 10. 28. 02:33

10월 26일(일요일) 일기.


합정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 합정역의 몰mall에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가 있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친구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에 익숙한 합정은 크지 않은 건물과 그 안의 역시나 작은 가게들, 그리고 하숙집들로 가득한 어두운 골목이었다. 몰 안의 가게는 때묵은 합정의 그 가게들만큼이나 작았지만, 새로운 공간의 반짝거림과 젊은 소비자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그 주변 어딘가 자리하고 있을 그림자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잊혀지게 만들고 있었다. 카운터를 보는 친구를 기다리며 앉은 자리 옆에는 대학생쯤 되어보이는 이성애 커플이 꽤나 진지하게 투닥거렸다. 분노하고, 골내고, 항변하고, 설득하고, 설득을 받아주는 척하고, 마음이 풀린 여자애가 남자애를 이해해주는 척 하고, 남자애는 이때다 싶어 열심히 자기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럼에도 널 얼마나 생각하는지를 이야기하고, 그럭저럭 둘 다 화가 풀려서 손을 잡고 마주보고, 결혼과 직장을 이야기하고, 다시 분위기는 조금 심드렁해지고...너무나 전형적인 순서대로 흘러가서 마치 역시 그런 계단을 충실히 따라갔던 나 자신의 과거가 재상연되는 걸 보는 듯 했다. 모든 손님들이 자리를 뜨고 친구와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겼다. 겨우 메뉴 하나를 시켰을 뿐이라--그래도 혹시나싶어 현금으로 계산했다--매상도 별로 올려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뒷정리라도 같이 했다. 설거지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아버님이 한사코 당신께서 스스로 하겠다고 하셔서 주방바닥만 쓸고 나왔다.


친구는 내일 일을 위해 뜨고, 나는 아버님의 차를 얻어타고 기숙사로 향했다. 몰의 지하 주차장을 떠나 합정역을 지났다. 내게 익숙한 합정역, 큰 빌딩 블럭 하나를 지나면 대로에서 보이는 것과 다른 거리가 있을 합정역, 아마도 아직도 사창가가 있을 합정역, 그 앞에서 음울한 표정을 짓고 호객행위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을 누군가가 문 밖에서 시선을 끌려고 기다리기에는 조금 찬 날씨의 합정역이 오른편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한강이 나왔다. 다리 위의 아주 조그만 흰 빛을 제외하고는 불이 꺼져있었다. 마치 내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억지로라도 불을 끄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이불을 머리 위에까지 엎어쓴 모습 같았다. 다리 아래 아주 희미한 불빛만을 받은 물결이 가득차게 존재했다. 한강의 물은 그렇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대에서 단지 거대하게 있었다; "있다"라는 동사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최대치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만약 그 시점에 차에 내려 바로 곁에서 강물을 바라보았다면 그 존재 자체에 이끌려 물 속으로 스르륵 들어갔을 정도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단지 존재의 크기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집어삼킬만큼 매력적일 수가 있다.


다리를 건너 상도, 숭실대를 지나 낙성대로 향했다. 길거리는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적어도 자동차를 빼고는 그랬다. 사람들은 한산하게 그러나 너무 없지는 않게 인도를 돌아다녔다. 가게들의 불빛은 꺼져있었다. 그들 또한 턱밑까지 온 월요일을 저주하면서 손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주말의 마지막 시간을 붙들고 있으리라. 아버님과 가끔씩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종종 일부러 어색하게 웃었다; 어색하게 웃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묘한 편안함을 줄 때가 있고 특히 남자 어른들은 더욱 그러하다. 과거의 폭설, 군대, 친구의 학교시절, 이런 아마도 수없이 반복되었을 주제들이 지나갔다. 낙성대 역에 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아버님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며 기숙사 앞에까지 들어오셨다. 기숙사 정문에 내려 인사를 하고 차 문을 닫았다. 다시금 익숙한 기숙사의 밤이 있었다. 아까 내리던 비구름은 보이지 않고, 그저 밤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오르막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10월 27일(월요일) 일기.


신해철이 죽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상태라는 기사를 읽었고 건강하기만 할 것 같다는 인상은 아니어서--물론 실제로는 단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다--아주 놀라지는 않았다. 놀라지 않는다고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회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과 시대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나 또한 그의 영역과 시대 안에서 잠시나마 살아갔던 이들 중 하나였다. 중학교 때 방송부에 들어간 걸 핑계로 평생 처음으로 직접 산 음악CD가 넥스트의 <라젠카: 스페이스 락 오페라>였고, 친구 집에서 처음 들은 <리턴 오브 더 넥스트 파트1>를 테이프에 녹음해 와 혼자 방에서 듣던 때도 있었다(벅스뮤직, 소리바다 등이 등장하기 전에는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라젠카>에 담긴 노래들은 외우다시피 계속 들었다. 고등학생 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일이 생기면 잘 부르든 못 부르든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불렀다...학교체육대회에서 반 응원전에서 부르다가 애들이 단체로 물통을 던졌던 게 떠오른다. <RoN Part 1>에서 "이중인격자" "The Dreamer" "날아라 병아리" "The Ocean" 등은 아직도 인상깊은 멜로디들로 남아있다. "그대에게"도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방에서 열심히 불렀다. MP3가 CD를 대체하기 전 <Home>과 <RoN Part 1>은 CD로 구했고, 내가 마지막으로 산 CD앨범 중 하나가 <RoN Part 3: 개한민국>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노래방에서 개한민국을 부르면서 동행인들에게 생수병에 들어있던 물을 뿌렸던 게 기억난다(...). 적어도 대학교 2, 3학년 정도까지 넥스트와 신해철의 곡들은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아, 그가 목소리 출연했던 <아치와 씨팍>도, 직접 나왔던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즐겨본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도 떠오른다. 문득 얼마 전에 유치한 가사에도 불구하고 꽤 좋아했던 "Growing Up"이 그렇게 생각나더니. 이렇게 신해철이 갔고, 나의 한 시절도 완료형이 되었다. 이제 그처럼 한 시대를 (부정적인 방식으로를 제외하고) 온전히 자신의 색채로 물들일 수 있는 이가 누가 남았는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여러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명확히 하나의 끝 처럼 보일 것이다. 그 개인의 죽음 이상으로.


위의 모든 문장들은 다음의 한 문장을 위해 씌어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