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근대시민의 애도극: 마루야마와 결단의 귀추> 읽고 코멘트.

Comment 2014.10.26 03:40

김항의 글 「近代市民の哀悼劇:丸山真男と決断の帰趨」[근대시민의 애도극: 마루야마와 결단의 귀추] 국역 링크: http://sarantoya12.tistory.com/19


아래의 코멘트는 본래 이 글에 대한 다른 분의 논평에 내가 덧붙인 코멘트이다. 글투를 수정하지 않고 옮긴다. 되도록 위에 링크한 원문(국역)을 꼼꼼히 읽으면서 보기를 권한다.


참고할 분들을 위해 내 블로그에 있는 글 두 개를 추가로 링크한다.


http://begray.tistory.com/149

: 이 글은 모레티의 글 하나에 대한 발제문인데, 슈미트의 결단 문제와 관련해서 절대군주와 의회 사이의 갈등을 이념사적으로 다루는 대목이 있다.


http://begray.tistory.com/126

: 지난 학기 기말페이퍼. 홉스와 슈미트, 특히 <토머스 홉스 국가이론에서의 리바이어던>을 다루고 있다.






제가 결국 마루야마의 주저를 읽게 되는 건 올해 말이 지나서나 가능할 거고, 그때까지는 다소 원거리에서 건드리는 것 이상으로 이 주제를 건드리진 못 할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무언가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사고해보자면-


1) 특히나 <리바이어던> 독해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칼 슈미트의 '결단'이 향하는 칼끝은 자유주의 혹은 의회민주주의적 전통입니다. 갖가지 파당faction들이 '사상의 자유'를 무기로--그래서 슈미트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홉스적 논리를 결정적으로 뒤집는 흉악한 텍스트로 간주합니다--난립하면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예를 들어 더 약한 고리에 놓인 시민들을 등쳐먹는다거나) 아무도 이런 전개에 손을 대지 못하죠. 그래서 리바이어던 혹은 결단하는 주권자가 다시 돌아일 필요가 있다는 암시를 강하게 남기면서 슈미트의 홉스 독해는 끝납니다.



2) 그래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슈미트로부터 결단의 모티프를 끌어온다는 설명은 조금 더 상세해져야 합니다. 단순히 절대적 위상을 갖는 결단의 주체를 주권자에서 민족/민중(양자는 서구 근대에서 본래 같은 대상을 가리키곤 했으니까요...오늘날의 독자들은 마루야마에게 nation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부터 정의내릴 필요가 있겠습니다)으로 대체했을 뿐인지, 아니면 그 과정에서 결단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지 말입니다. 전자라면 그게 루소적인 민족공동체가 내재한 일반의지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같은 질문이 이어지겠죠. 김항의 설명은 아마 후자 쪽에 가까울 것 같은데, 과거의 작위성을 인식하고 그에 기반해 실천을 창출한다는 논리 자체가 조금 더 깊게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작위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로 뻗어갈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치 니체의 도덕 비판 및 이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적 비판들이 보여주듯 '주어진 것'의 허위와 비합리를 드러내는 방향입니다. 다른 하나, 슈미트적(혹은 키에르케고르적?) 결단에 조금 더 토대가 될 만한 것은 과거의 작위성 자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예를 들면 사회계약론의 추종자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이 민족이라는 (실제로는 자연스럽지 않은) 허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선택한 것이므로 따른다/믿는다는 식으로요.


마루야마적 결단에 관한 김항의 진술("그곳에서 ... 의미한다")은 일단 윗 문단 중 후자의 논리를 채택한 것 같습니다. 즉 작위/제도에 대한 합의, 그러니까 작위/제도를 통해 스스로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고(첫번째 결단=형성) 그 위에서 다른 행보로의 실천=도약을 감행한다는(두 번째 결단=창출)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김항의 문장이 특별히 꼬인 것 같지 않으면서도 그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일차적으로 그가 마루야마의 논의를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층위의 결단'들'을 결합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죠(링크된 본문의 3절 마지막 문단에서 김항은 이 점을 분명히 해둡니다).



3) 저는 슈미트의 전후의, 그러니까 통상 후기 저술들이라고 불리는 텍스트들을 아직 읽지 않아서 김항이 그 논리를 끌어와 마루야마의 난국과 연결시키는 4절이 얼마나 정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슈미트를 괄호치기 하고 김항의 마루야마 독해 자체에 집중해봅시다. 여기에서 마루야마의 두 결단 사이의 시간적 순서가 뒤집힐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제게 (윗윗문단에서 말한) 포스트모던적 비판/해석과 유사하게 들립니다. 곧 자신이 '순수'하다고 믿는 어떠한 실천이든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간다면 그것의 순수성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갖가지 요소들의 그물들을 마주칠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비교적 시간적인 순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김항이 1절에서 설명하는) 슈미트적 결단은 다음과 같이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슈미트가 결국 무로부터 출현하여 어떠한 당파/사적 이익에도 영향받지 않는 절대적인 주권자=리바이어던을 갈구한다면, '권력의 대기실'을 흐르는 다양한 맥락들은 슈미트가 믿었던 절대적이고 공평무사한 권력이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거죠. 다시 말해 권력의 정당성이 기초해야 할 순수한 토대 자체가 성립불가능한 게 현실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 경우에 결단은 그저 하나의 맹목적인 신앙에 불과하고, 2절의 도입부에서 말하듯 결단하는 주권자에게 더 이상 정당성이 부여될 수 없습니다.


4절에서 마루야마의 결단에 내재한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대목은 조금 더 까다롭습니다. 저는 김항이 여기에서 지나치게 짧은 설명으로 지나치게 많은 걸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만약 직접적으로 슈미트의 결단에 내재한 논리적 난국을 마루야마의 결단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길은 마루야마의 두 번째 결단만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즉 주권자의 결단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민족/민중의 결단 역시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가상적 개념에 불과할 뿐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토대는 없지 않냐는 식의 비판 말입니다(거칠지만 쉬운 비교대상으로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권력과 이성의 분리라는 근대적 주제가 다시 돌아오는 거죠.


문제는 김항이 자신의 글 4절에서 마루야마의 두 가지 결단을 묶고 그걸 슈미트의 난제로 한꺼번에 해치우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슈미트의 난국은 직접적으로 시간적인 축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항이 설명하는) 마루야마의 '결단'은 사실 서로 다른 두 가지 결단을 묶으면서 그 안에 시간적인 순서를 내포합니다. 그래서 슈미트에 대한 (시간 축 자체가 없는) 논의를 따라온 사람이 갑자기 시간축의 문제를 통해 마루야마의 논의를 뒤흔드는 설명을 접하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죠.


김항이 4절을 조금 더 상술하지 않은 건 이 글의 명백한 결점입니다만, 어쨌거나 그 논지를 최대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의 난국이 A(주권자의 결단)이 B(권력의 대기실; 정치적 행위에 작용하는 현실의 다양한 권력관계)로 인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라면, 마루야마의 난국은 A(네이션의 선택; 즉 결단=창출)가 결국 항상 B(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네이션, 즉 결단=공동체 형성)를 재구성해버리며, (A의 토대가 되는) B가 근원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A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출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해 A와 B의 결합은 양자 모두로부터 정당성을 박탈해버립니다. 이러한 도식이 맞다면, 저는 마루야마의 난국에 대한 김항의 설명 자체는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지만 굳이 슈미트의 난국과 연결시켜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 글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권력의 성립 및 행사로서의 결단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은 같을지 모르겠지만 그에 이르는 논리가 꼭 같은 건 아닌 듯 보이는데 말입니다.



4) 결단, 권력, 이성, 정당성과 같은 보다 전통적인 주제들 위에 김항의 설명을 배치시킨다면 조금 더 흥미로운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리바이어던 혹은 절대군주의 (이념의 차원일 뿐일지라도) 강력함은 그것이 정치적 해석 및 판단을 독점한다는 것, 아니 행동 그 자체가 곧 정당성을 포함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행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정당하다"랄까요. 그런 점에서 권력 및 권력행사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다른 주체/심급이 생기는 것 자체가 사실 결단 혹은 절대적 주권자론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무너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행동하는 바가 무엇에 근거해서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결국 정당성이 (주권자의) 행동과 분리된 차원에 존재함을 전제하며 나아가 후자를 전자에 복속시키는 것이니까요. 슈미트의 홉스 독해에 따르면, 자유주의 혹은 의회주의의 승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당성의 심급을 주권자가 아닌 개개인의 양심으로 가져오는 데 있습니다. 즉 정당성 또는 그것을 판단하는 심급 자체가 주권자와 주권자의 결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여러 주체들로 분산되었을 때 절대군주=리바이어던이 '거세'당하는 결과는 필연이라는 이야기죠.


이러한 논리를 김항의 마루야마 독해에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김항의 논리에 필수적이면서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부분으로 정당성 및 정당성을 판단하고 제반상황을 해석하는 역할을 도대체 누가 담당하느냐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김항은 공동체의 창출행위 또는 도약/결단이 공동체의 (작위적인) 정체성 자체를 재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이때 해석의 심급은 어디에 있으며 해석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그리하여 결단을 구성하는 인식과 행동이 결국 역순이 된다면, 그때 결단은 미리 항상 누군가에게 판가름되는 운명 하에 있으며"--이때 결단을 "판가름"하는 "누군가"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 위치는 어디일까요? 이 "누군가"는 민족/민중공동체의 한 구성원일까요, 아니면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심급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게 제 몫은 아니겠지만, 이 논문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여러 생산적인 질문 중 하나라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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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은하 2014.10.27 11:46 Modify/Delete Reply

    김항이었군요. 이분에 대해 대학 때부터 알았던 거 같은데 어째서 김향으로 기억하고 있지ㅡㅡ;;;어쩐지 그 후론 찾아도 안 나온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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