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일기. 바람들, 나무들, 벌레들.

Comment 2014. 10. 19. 14:00

얼마 전까지 창문을 닫고 가만히 서서 밖에서 바람이 내달리는 소리를 한참이나 듣곤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말 무리들의 발굽소리가 몇 밤을 지나간 뒤 어느새 우수수 떨어진 은행들의 냄새와 함께 가을이 왔다. 오전 늦게 일어나면 바닥에 한기가 깔려있어,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겨울이불에 파고들어야 아직 남아있는 온기 비슷한 걸 주워담을 수 있다. 가을은 곁에 앉자마자 이제 그리 먼 발치에 보이는 것도 아닌 겨울을 향해 어서 오라고 발랄하게 손짓한다. 찾아든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떠날 생각부터 하는, 이쪽으로는 좀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가을 곁에서 조금은 시무룩해진다. 이중창을 닫고 흐린 하늘을 보다 문득 침묵에 의아해졌다. 어느덧 익숙해진 바람소리가 사라진 음(音)의 빈 공간이 다시 낯설다. 창문을 열었다. 아마 버들골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지 어떤 아저씨의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단지 만국의 아저씨들이 공통적으로 그러하듯 서툴고 더듬거리지만 마이크를 경유한 목소리만큼은 커서 듣는 이의 한숨을 유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밑에 기숙사 곁을 지나는 버스의 엔진소리가 흐른다. 때때로 둘의 틈새를 찢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표현하기조차 어렵게 그러나 새된 것만은 분명하게 귀를 파고든다. 한참 동안 바람의 흔적은 찾지조차 못하다 귀가 아닌 눈으로 바람을 본다. 높게 자란 나무들로부터 나는 지난 3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그리고 수개월 후 다시 보게 될 앙상한 가지들을 떠올린다. 죽은 이파리 몇 가닥만 달라붙어 있던 가지들은 다시금 잎새를 틔워내고 생의 기운으로 반짝거리던 녹빛은 이제 가끔가다 붉은 빛을 띠기도 하는 차분한 빛깔로 변해 있다. 그 차분함의 색채로부터 나는 자신의 성숙함과 뒤이어 올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지속되는 다른 삶들을 담아낸 정념을 본다. 그리고 잎들은 다시금 부드럽게 바람을 끌어안고 기품있게 움직인다. 나무들로부터 그것을 감싸안은 바람을 볼 때 비로소 그 소리가 귀로 들어온다. 시끄러운 확성기의 소리,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노는 소리보다 작고 낮지만 그 기저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음의 공간을 메우는 소리. 마치 완벽하게 단일한 색으로 칠해진 한 면을 우리가 채색된 면이 아닌 그저 면 자체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깔려 있어 한참이나 귀를 기울여야 그것의 있음 자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소리. 처음에 바람의 소리는 마치 하나의 음처럼, 바람들의 집단이 그 자체로 하나의 유일한 실체인 듯 와닿는다. 눈을 돌려 다른 나무를 바라보면, 사실은 나무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감을 깨닫는다. 그것들을 휘감는 바람과의 관계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것은 조금 더 빠르고 부산하게, 또 다른 나무는 보다 느리고 완만하게 움직인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세심하게 시선을 기울이면 같은 나무에서조차도 서로 다른 가지들은 나름의 리듬 혹은 불규칙함에 따라 각자의 곡선을 그리며 오가는 걸 볼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서로 다른 바람들이 서로 다른 것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음으로 묶어 듣기 전에 여러 다른 음들로 듣기. 귀가 아주 세밀하지는 않아 한 바람을 다른 바람과 구별해주는 개성을 면밀히 붙잡지는 못하나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음의 미세한 높낮이, 그리고 템포의 빠르고 느림, 윙윙거림의 색채...바람들은 제각기의 행로를 거치고 서로 다른 대상을 만나 때로 충돌하고 감싸안고 흐트러지며 고유의 강도와 질을 갖는다. 어느 한 그루의 나무, 한 줄기의 바람에 집중하지 않고 잠시 시선을 흐뜨러트려 여러 나무들의 흔들림을 본다. 집중을 풀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힘 주지 않고 받아들인다. 흔들림들이 있고 그것들을 함께 본다. 한 음으로부터 단순히 다른 한 음과의 차이만을 보는 대신 그 음들을 느낀다.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하나의 음으로 뒤섞지 않은 채 소리'들'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흔들림, 나뭇가지들과 바람들을 '-들'로 보고 듣고, 인식한다. 집중하지 않되 무관심하지도 않으면, 충분히 눈과 귀를 기울일 시간과 조금 더 섬세해지려는 노력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그것'들'이 지금을 살아가고, 또 나름의 궤도에 따라 죽어갈 것을, 다시 그 빈 자리를 비슷해보이지만 같지 않을 삶들이 채울 것임을 안다. 그 위에 확성기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잠시 해변을 덮치는 파도처럼 쓸고 지나간다. 하지만 파도가 지나간 뒤의 해변은 전과 같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길 떠나는 가을을 좇는 마지막 벌레들이 벽을 타고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허공에서 다시 벽에 안착하여 높이, 높이 오르고 또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져내린다. 수만수억 번은 반복되었을 비슷한 비행을 그러나 단 한번도 반복되지 않을 궤도로 날아오른다. 어느 틈새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방충망 안에 달라붙어 있던 무당벌레 한 마리는 잠시 고개를 돌린 새 또 어느 틈새로인지 나가버려 종적이 묘연하다. 벌레들은 새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약한다. 바람은 인간들의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운행을 지속한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모터와 확성기의 난사로부터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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