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일기. "노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Comment 2014. 10. 12. 18:18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지인이 문득 오늘날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돈을 쓰는 것을, 그러니까 구매/소비를 통해 모든 일에 접근하는 태도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그중 조금 놀라운 사례로, 요즘 강남의 학부모들 중에서는 자식들에게 놀이터에서 놀게 하는 법을 사교육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마 나와 같은 지방 소도시나 시골 출신들에게는 익숙할) 갖가지 놀이들을 익힐 수 있도록 전문학원/과외교사를 통해 가르친다는 이야기다. 현대에 다시 놀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주어진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본인 스스로의 즐거움과 창조성을 자발적으로 느끼는, 곧 인간이 일순간이나마 주체가 될 수 있는 경험이라는 데 있다. 이 사례는 놀이가 사교육, 다시 의무적인 학습으로 타락하는 상황을, 그리고 심지어 (사이비로나마)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경험조차도 화폐의 소비를 통해 구매하지 않고서는 향유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les miserables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무한한 교환가능성을 표상하는 화폐를 축적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그 자유를 향유하고 전수하고 공유하는 경험조차 화폐를 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노예에 가깝다. 야만 상태로 퇴행한 학부모들이 사는 세상에서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라는 오래된 격언은 자본을 획득하는 방법은 가르치되 자본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법, 영혼이 자본에 온전히 얽매인 노예상태에 빠져들지 않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 교육으로 실현 된다. 이런 학부모들의 '우매한 정신'에 놀라는 대신 이들의 심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별로 놀라울 게 없다. 이들이 돈을 주고 구매하는 대상은 자식의 교육이 아닌 "나는 내 아이들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라는 자기합리화의 만족일 뿐이다. 이들은 무엇이 정말로 아이들의 삶을 더 탁월하고 자유롭고 충만하게 하는지를 묻는 대신 그저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만으로 실제로 아이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기기만에 기꺼이 합류하면서 자본에 대한 물신숭배에 기꺼이 두 무릎을 꿇고 절한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준 부모와 같이 "무엇을 사면 되는 거지?"라는 질문이 마치 모든 질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양 여기게 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자기형성은 소비자의 형식을 띠며, 사회적 억압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소비자의 불만표현을 닮아간다. 본래 소비자는 주어진 상품들의 목록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한 존재이기에, 아이의 놀이도 사교육으로 해결하는 학부모는 최종적으로 자기 자식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결과적으로 좋은 학교, 번듯한 직장, 괜찮은 사위/며느리의 획득까지, 어쩌면 손자녀의 양육과 좋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하는 삶으로 빠져들 것이다. 자식은 화폐의 노예가 되며, 부모는 자식의 노예가 된다. 노예가 된 부모는 자식의 자유와 행복을 말살함으로서 자신의 노예됨에 복수하며, 노예가 된 자식은 자신의 저주를 화폐를 통해 전 세계로 방사함으로서 세상에 또 하나의 어둠을 내뿜는 공장 굴뚝처럼 살아간다. ...올바른 교육은 이들을 비웃고 조소하기보다는 이들을 이들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불행으로부터 구출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불행은 독립적인 요인이 아니며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의 불행과 무관하게 존립하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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