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노트. 141028.

Comment 2014. 10. 28. 03:53

<모비딕> 관련 논문들을 꾸역꾸역 읽다가--<블라이스데일 로맨스>는 아직 숏페이퍼 안 내고 있는데 이것도 99% 늦겠다...사실은 이미 늦었다--잠깐 기분전환으로 얼마 전 반값으로 산 <아케이드 프로젝트> 국역본을 잠깐 들춰봤다. 역자 서문이 맨 처음 위치한다. "에밀 졸라의 <부바르와 페퀴셰>"라고 쓴 대목을 보고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내가 갖고 있는 판은 원래 네 권짜리를 두 권으로 합본한 판이라서 출간된지 좀 된 시점이었을텐데 하나도 손을 보지 않은 모양이다(아니면 끝까지 몰랐던 걸까?!). 물론 가끔 이 양반이 그럭저럭 읽을만하게 번역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애초에 독일어를 원 텍스트로 하는 이 책을 제대로 번역할 거라 신뢰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처음부터 이래서야 신뢰도가 좀. 아무리 반값에 싼 맛으로 산 거라곤 해도 말이다.


일어판 역자서문이랑 티데만의 편집자 서문까지 봤다. 누가 와도 어쩔 수 없겠지만 둘 다 정답을 가르쳐주는 글은 아니다. 소수의 글을 제외하고 나면 벤야민의 독자들은 결국에는 어떻게든 벤야민이 어떻게 사고했을까 자체를 심지어 상상력까지 끌어와서 고민해야 한다. 그나마 일어판 서문과 티데만의 서문을 읽으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정지상태의 변증법'을 내 식대로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결국에는 계속 읽어가면서 부지런히 방법론의 구축을 시도하는 길 말고 다른 방안은 없겠지만. 헤겔 이래의 변증법을 구성하는 시간-운동의 모멘트를 공간적인 차원으로 치환하기.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으로서의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찾아내기. 역시나 추상적인 표현들이지만 일단은 이렇게 시작하자. 시작만 하면 나머지는 노력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있는 아도르노와 달리 벤야민은 좀처럼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나름 도서출판 길에서 지금까지 나온 선집 전부도, <비애극>도 읽었으니까 적게 읽은 건 아닌데. 순서를 제대로 안 따라가서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읽을 텍스트는 많다. 파사주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도 학위논문(<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이 있고, 최성만 선생의 책이 있고, 무엇보다 수전 벅-모스의 _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_가 있다. 어차피 이번 학기 동안 다 읽을 양은 아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기 위한 독서커리큘럼 구성? 한국어와 영어에 국한해서 텍스트를 짠다면 그래도 초보적인 수준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학부 수업 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아우라 밖에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나중에 칸트와 맑스를 읽고 나서, 그리고 존-레텔과 조금 앞서의 신칸트주의자들을 알고 나서 읽을 때 많은 것이 바뀌었다. 꼭 상징형식과 같은 단어를 쓸 필요는 없지만 인간 지각의 역사적 구조가 더 중요하다. 아우라는 그것과 조금 다른 평면에서 봐야 한다.


벤야민이 괴테 관련 글에서 언급하는 호두 속과 호두 껍질의 비유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모비딕>을 읽으면서, <모비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래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의 작업을 떠올리면서 약간 이런 게 아닐까 상상했다. 껍질 속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그것 자체로 보기. 그것들의 나열, 복수 개체들의 나열을 생각하기.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배치를 보기. 요점은, '배치'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복수의 요소들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통속적으로 이해되는 헤겔이 유일한 본질=주체로서 정신이 시간축 상에서의 운동하는 궤적을 따라간다면, 아니 복수의 변이형들을 단수로서의 주체의 운동으로 전부 포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면, 벤야민과 (조금 더 명확하지만 역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는) 아도르노가 '전체'를 구상하는 방식은 복수로서의 단독자들의 배치에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단순히 개별성에 대한 단독성이 아니라--김윤식은 이것만 생각한 것 같다--단독자들 자체가 여럿이 존재하며 그 여럿됨을, 복수성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단순히 여럿이 있다는 데 멈추지 말고 여럿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 헤겔의 변증법이 시간축 위에서의 운동을 그려낸 것이었다면, 그것을 시간축이 아닌 공간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이번 학기에...지금 한 과목 페이퍼 구상을 따르면 결국 <비애극>을 다시 한번 읽어야 할 것 같다. 핵심은 아도르노의 <자연사의 이념>"The Idea of Natural History"를 읽고 역사와 자연의 뒤엉킴을 조금 더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19세기 말의 소설 하나와 20세기 중반의 소설 하나. 그리고 그 사이에 <자연사의 이념>(그리고 <비애극>). 일단 이런 배치를 생각한다. 이들이 어떻게 역사를 생각했는가, 그리고 역사 앞에서 자연은 어떻게 떠오르는가. 이런 질문들로부터 출발하자.


 아도르노가 보다 헤겔적인 변증법에 (심지어 비판에 공들인 노력을 포함해서) 천착한 것, 시간과 운동의 계기가 강조된 변증법을 보여주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 음악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서사가 있고 심지어 침묵조차도 시간축으로 표현되는 예술장르로서의 음악(사실 그가 장편소설을 거의 다루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다). 시간 자체가 흐려지는 시대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다시 이야기와 시간이라는 모티프를 붙잡으려는 내가 아도르노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게 변증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시간=운동을 담지하는 개념이며 동시에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케이드든, 파사주든 뭐라고 불러도 좋다. 이 작업에서 벤야민의 뇌리에 어떤 공간과 공간의 이미지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공간을, 공간적으로 사유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변증법을 정태적인 것, 시간이 멈춘 순간 전체의 연관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도구로 구축하려 했다는 사실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도르노의 가장 위력적인 비평--예컨대 그가 쇤베르크에 대해 쓸 때--이 모티프의 시간적인 전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벤야민은 폭력에 관한 글을 비롯해서 유독 단절, 정지, 신적인 순간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을 빈번하게 언급했다. 내게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역시 그가 오귀스트 블랑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블랑키가 환상 속에서 목도한 19세기 자본주의의 영원회귀를 끊어버리는 것, 진보라는 이름을 단 악무한을 멈추고 정지상태로 전진하는 것.

 만약 그러하다면 양자는 모두 자신의 대상에 충실했고, 그로부터 자신의 방법을 끌어내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이 중요하다. 독서가의 윤리와 방법론의 구상은 분리될 수 없다. 사고를 촉진하는 방법은 대체로 대상에 대한 천착에서 나온다. 어떤 면에서 이론을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자는 이론 자체가 아니라 연구의 대상, 그것이 예술이든 문화든 사회든 정치든 경제든 뭐든, 그런 것들을 붙드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상의 성격을 이해하는 경험 자체가 없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서의 이론도 피상적인 지식밖에 되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시골에 가면 전통시장이 아케이드/파사주에 들어가 있다...정선의 장터. 망원시장도 역시 아케이드. 19세기 파리에서는 판타스마고리아를 만들어내는, 꿈의 장소였던 공간이 21세기 한국에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꿈을 표현한다. 오늘날의 벤야민은 영등포 타임스퀘어를, 서울 곳곳에 퍼져있는 몰mall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역으로 그가 오늘날의 시장을 보면 무엇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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