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베토벤. 음악의 철학> 들어가며.

Reading 2014.10.17 01:46

아도르노의 <베토벤. 음악과 철학: 단편들과 텍스트>(_Beethoven. Philosophie und Musik: Fragmente und Texte_, 1993) 국역본을 구했다. 출판사는 <신음악의 철학> 새 역본 및 아도르노 강의록을 번역출간한 세창출판사, 역자는 <신음악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문병호&김방현이다. 올해 10월 10일 발행되었으니 거의 나오자마자 산 셈이다. 월요일 밤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바로 '그날이 오면'에 전화해 신청한 뒤 오늘 받았다. 표지는 이전 강의록보다는 좀 낫긴 한데, 날개 속표지는 여전히 서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아도르노의 통합된 저술을 옮긴 게 아니라 베토벤에 대해 아도르노가 남긴 갖가지 메모, 논문 등을 총망라한 결과물이다(이 책에 포함된 <미사 솔렘니스>에 대해 아도르노가 남긴 논문은 Blackwell에서 나온 _The Adorno Reader_에도 수록되어 있으니 이미 읽어본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은 베토벤 및 클래식 음악에 사실상 무지하지만, 특히나 아도르노는 파편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저자라 비싼 가격(39,000원)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입했다. 현재 편집자 서문 및 후기, 역자 후기 정도만 스치듯 읽어본 상태인데 곧 읽고 쓸 게 있으면 쓰겠다.


 아쉬운 점은 <사회학 강의>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편집자 명을 찾기 어렵다는 것. 역자 후기 끄트머리에 짧게 그것도 성만 언급되는 정도다. 위에 간략하게 소개했듯 이 책은 사실 저술 못지 않게 편집에 엄청나게 공이 들어간 텍스트고, 독어판 역시 표지에 편집자 롤프 티데만Rolf Tiedeman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정작 한국어판에서는 편집자 서문, 편집자 주, 편집자 후기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는커녕 본문 어디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다. 베토벤에 대한 아도르노의 사유를 이해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을지 모르겠지만--엄밀하게 따지면 메모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배열된 것 자체가 편집자의 결정이었으니 이 책의 탄생 과정에서 편집자는 절대로 생략될 수 없는 셈이다--, 이런 건 솔직히 말해 원저 편집자에 대한 결례일 뿐더러 책의 서지사항 자체를 충실히 옮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애초에 미국 및 유럽의 학술서들의 편집자들 자체가 해당 영역의 전문가이며 편집 행위 자체가 생략될 수 없는 단계로 인식됨을 생각한다면, 한국에서 편집의 중요성이 저평가되는 상황이 반성되어야 할 지점이지 자국의 편견을 외국의 도서에 곧바로 투사하는 건 정당화되기 어려울 성싶다.




<베토벤. 음악의 철학> 첫 장.


"모든 음악적 분석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우리가 음악을 분해하고 최소 단위들로 돌리는 정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단순한 음에 더욱 많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음악은 단순한 음들로 성립되고 마는 것이다. 가장 특별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 잘못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부 분석을 포기하면, 연관관계들이 우리로부터 떠나버린다. 변증법적 분석은 이 두 가지 위험을 내부적으로 서로 없애 가지려는aufheben 시도이다.


 부차적 언급. 베토벤 연구에서는 전체가 우위를 차지하는 가상은 무조건 회피되어야 하며, 사실관계는 진정한 변증법적 관계로서 서술되어야 한다."(1장, 21)


: 이 문장은 일견 아도르노가 늘 이야기하곤 하는 또 하나의 클리셰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접근하는 예술장르는 다를지언정 개별적인 텍스트를 어떻게 '예술작품으로' 분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아도르노의 메모는 까다로운 고민을 제기한다(텍스트의 단독적인 면모singularity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과학 계열 연구자들에게는 이 말이 어떤 울림을 갖고 다가올지 잘 모르겠다). 텍스트에 대한 자의적인 분석을 벗어나기 위해서 비평가는 그게 무엇이든간에 분석의 최소단위를 설정하고--그건 언어일수도, 서사일수도, 기타 양식적 측면이나 역사적 내용일수도 있다--그 최소단위로부터 출발해 텍스트 전체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를,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면 마치 별들로부터 별자리를 읽어내는 것처럼 읽고 해석한다. 그래서 예술텍스트에 대한 뛰어난 연구는 늘 부분과 전체를 함께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이때 세부분석을 위한 단위에 집중하는 것은 동시에 텍스트의 전체적인 의미를 형해화시킬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을 단순한 리듬이나 음으로 분해해버렸을 때 단지 전체 곡 길이만큼의 리듬/음의 나열 및 반복만 남는 음악분석만이 아니라, 조야한 형태의 정신분석적 비평(모든 주제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환원한다거나), 개별 자구에만 집착하는 '문헌학적' 비평이 또한 그러하다. 역으로, 특히나 '부차적 언급'에서 "전체가 우위를 차지하는 가상"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것처럼,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 개별분석으로부터 끌어내어지지 않은 전체적인 논리를 미리 상정한 후 세부를 그에 끼워맞추는 '해석의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마치 헤겔주의적 또는 (고전적) 맑스주의적 예술분석들이 왕왕 '정신' 혹은 '자본주의'와 같은 "전체"를 미리 설정한 뒤 그에 맞춰 개별적인 부분들의 해석을 배치하는 함정으로 빠져들듯이 말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세부와 전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장하는데, 사실 애초에 헤겔에게서 최종적인 종합자로서의 정신의 위치가 문제적인 것처럼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적 관계는 이론적으로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루카치를 비롯한 수많은 맑스주의 비평이 결과적으로 정해진 계급투쟁의 역사에 텍스트를 끼워맞추는 조잡한 공식의 반복으로 퇴락한 것도, 그리하여 맑스주의 역사 자체가 세계를 설명하는 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을 때 그에 기반한 비평 또한 쇠퇴한 것도 이런 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그런 면에서 그 자체가 기존의 맑스주의비평 및 (역사적 맥락 및 전체를 완전히 포기하고 개별 분석으로 후퇴하는) '실증주의적' 비평 양자에 대한 비판을 변증법의 진지한 적용을 통해 모색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부분과 전체, 헤겔식 용어를 쓰자면 개별자/개별모순들과 전체/절대정신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아도르노를 단순히 '부정신학'으로 모는 것은 이런 점에서 사상의 맥락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에 불과하다...개별 텍스트와 역사화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찰한 사람이 있다면, 이 질문들 및 돌파구가 결코 그냥 지나쳐질 수 없는 것임을 곧바로 이해하리라. 요컨대 변증법적 분석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부분으로부터 끌어져나오지 않은 전체는 폭력적인 가상일 뿐이며,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부분들의 나열은 무의미하다. 부분 및 부분들이 대표하는 모순은 끊임없이 전체를 교정하며 교정된 전체는 다시금 대상/세부를 더욱 밀착해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우리는 한편으로 역사를 통해 세부에 의미를 부여하며, 역으로 세부적인 분석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구축한다.

 

 그러한 이론적 기획이 성공할 수 있는가는 역시 별개의 문제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적 비평을 통해 부분, 대상/객체object, 세부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전체'라는 틀을 아예 무너트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방안을 고민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러한 이론적 기획이 어떻게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내가 <부정변증법>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위와 같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헤겔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한번 더 읽을 때 어떤 독해가 가능할지는 가봐야 알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비평적 실천, 곧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적 구도의 형성 자체는 종종 탁월한 비평에서 비슷하게나마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난국임에도 의외로 현실에서는 실현되기도 한다. 그게 이론 또는 '사회과학적 연구'와 조금 다른, 단독적인 성격과 분리될 수 없는 비평의 독특한 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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