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들어가며.

Reading 2014. 11. 7. 03:31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의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_Liebe als Passion: Zur Codierung von Intimität_국역본을 읽기 시작했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 정성훈, 권기돈, 조형준 역. 새물결, 2009.


0.


 나는 저글링에 재주가 없다. 한번에 집중할 수 있는 개체수가 한정되어 있기에 여러 공을 띄워놓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든 공을 떨어트린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번에 하나씩 읽고 치워버리는 게 낫지 여러 권을 한꺼번에 붙잡으면 모두가 지지부진해진다. 요즘 독서가 맘처럼 잘 안 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이 크다. 대학원 수업 둘, 조교 수업 하나에서 각각 소설 한 권씩을 읽어야 하고 세미나에서 로크를 읽는데다가 아도르노(<베토벤>), 테일러(<헤겔>), 그레고리 클라크(<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읽다가 더 손을 못 대고 있는 책들(루카치, 맑스, 에바 일루즈, 내들러의 <에티카> 개설서...)을 포함하면 왜 최근에 독서가 안 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 하기가 더 어렵다.


 그나마 지난 주부터 좀 정신을 차리고 베버(<사회경제사>)를 집중해서 읽어치웠고 어제 희곡 두 편(슈니츨러 <윤무>_Reigen_, 뷔히너 <보이체크>_Woyzeck_)을 읽었는데 오늘도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아도르노를 겨우 절반을 넘긴 정도다. 내일 세미나에 알바도 있는데 오늘 너무 무기력했다. 체력이 떨어진 건가? 의식에 너무 많은 책이 있어서 집중이 안 되는 것 같다. 기말페이퍼를 준비하려면 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과 벤야민(<독일 비애극의 원천>...전에 한길사 판으로 읽었으니 이번에는 새물결 판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도서관 바닥에 주저앉아 본문 두어 페이지 정도를 비교해봤는데 일단 한국어로는 새물결 판이 더 잘 읽힌다)을 읽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이 나기나 할까. 다음 주쯤에는 학부생들 페이퍼 초고도 한번 봐줘야 하고, 알바 프로젝트 보고서 초안 제출기한도 다가오고... 나는 분명히 미국에서 TA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편하게(?) 한국어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뚫고 눈을 찔러오는 레이저처럼 어떻게든 나를 붙잡는 책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읽을 때가 아닌 듯 하지만 그렇게 붙들려버리면 어쩔 수 없다. 이러면 망한다고 말하는 머리를 무시하고 손은 책을 펼친다. 돌이켜보면 내 공부의 진전들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맑스도, 아도르노도, 베버도, 만델'님'도...이번에는 루만이다. 젠장. 만만한 적이 없고, 만만하지 않아서 붙들린다. 어차피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이 짓거리를 평생의 과업Wissenschaft als Beruf으로 고르게 된 거겠지.



1.


호들갑은 그만 떨고 책 얘기를 하자. 국역본의 영어판 서문-원판 서론-1장 사회와 개인 및 역자 후기를 읽었다. 엄격한 사고에 정성스러운 국역이 덧붙여졌다. 언어의 선정과 논리의 전개가 엄밀해서 한 문장씩 음미해보며 머릿속에 일종의 선과 도표를 구축해야 하는 텍스트들은 그 책들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나 자신의 사유도 튼튼한 건축물이 되어가는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유감스럽게도 그런 느낌을 주는 한국인 저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물론 아도르노도 그러한 저자에 속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읽는 <베토벤>은 문자 그대로의 파편 모음집이라서 한 단락마다 사고를 새로 시작해야 하기에 변증법의 운동이 이어지지 않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그 자체로 언어적 구축물이고, 심지어 나처럼 물신화 그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는 인간조차도 그 언어와 논리의 질감을 매만지며 감탄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언어가 다른 독자들에겐 그 자체로 낯설고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서문 앞에서 독자는 곧바로 이 책이 열정적이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음을 즉각적으로 느낀다. 책날개의 루만은 마치 심술궂은 문지기처럼 네가 감히 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턱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을 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책이 오로지 나만을 기다리는 나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기에 그저 묵묵히 밀고 들어갈 뿐이다. 저자의 얼굴은 잊고, 단지 표현 하나씩을 곰곰히 두뇌로 굴려보면서. 독서는 늘 그렇게 저자의 얼굴이 아닌 언어로부터 시작한다. 루만의 언어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다음의 간단한 사실 때문일 터이다. 이 책에서 루만은 이미 자신의 사유를 체계의 형태로 어느 정도 구축해놓았다. 언어는 체계로서의 사유의 구성물이자 그 하나의 표현이다. 이미 스스로의 두 발로 설만큼 완성되어 있는 자율적인 체계는 우리의 일상어 앞에서 낯선 무언가가 된다. 체계를 구성하는 사유는, 사유의 매개로서의 언어는 차갑고 단단한 질감으로 우리 앞에 선다.


그러나 낯선 언어가 결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서의 윤리는 언어에 칼이 아니라 손을 건네는 태도, 그 언어를 치워버리는 대신 그와 같이 되어 이해하려는mimesis 태도다. 단단한 벽돌처럼 구성된 언어의 집 앞에서 한편으로는 집의 크기만큼 크게 사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벽돌보다 작은 단위의 분자로 스스로를 축소시켜 그 안에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언어로부터 사유를, 사유로부터 체계의 논리를 역추적해야 한다. 이는 부분의 섬세함으로부터 종합된 축조물의 구조, 그 구조의 논리로 나아가는 작업이다. 역으로 체계의 논리로부터 문장과 단어의 섬세한 독해로 향하는 독서의 운동이 있다. 구조의 논리 혹은 어떠한 서사가 있고 그 서사 위에 물결들과 같은 사유가 있으며 그 사유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는 언어가 있다. 독서는 양자를 함께 수행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세목에서 전체의 체계/형상을 보아야 하며, 다시 전체로부터 세목의 필연성을 보아야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루만은 그러한 이해에 값할만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인상을 준다.



2.


지금 당장 세목의 독서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낯선 언어를 조금 덜 낯선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니 그것이 본래 그렇게 낯선 무언가가 아님을 말해주기 위해 체계에 대해 말할 수는 있겠다. 사회를 다루는 학에서, 체계와 쳬게의 논리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구조물이기 전에 역사를 서술/서사화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기억하자. 오히려 체계의 자율적인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독서조차도 자신이 이해한 대상이 무언가를 그려내고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산물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는 딱딱하게 굳어버려 바닥에 떨어지는 물화된 석조물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역으로 체계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전부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도 체계가 설명하고 하나의 종합적인 서사로 구축하려는 대상에 대한 앎이 있다면 이미 이해로 향하는 포장도로에 들어선 셈이다. 나는 포장도로의 생김새를 간략하게 논함으로서 루만으로 들어서는 길을 조금 덜 낯설게 만들고 싶다...남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



영어판 서문에서 루만은 자신의 체계를 이루는 두 가지 가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전통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의 이행이란 사회체계가 계층적 분화 형식의 우위에서 기능적 분화 형식의 우위로 이행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2. 이러한 변형은 주로 여러 가지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들이 분화됨으로써 일어난다."(14)


1번 명제부터 점검하자. 먼저 전통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의 이행이 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이행'이란 단어에는 루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시간의 흐름 위에서 바라본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그 단어가 가리키듯이 운동 혹은 변화를 포함한다. 즉 시간이 흘렀고 그 흐름과 함께 어떤 변화가 있었다. 무슨 변화인가? 무엇이 무엇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인가? 전통 사회가 현대 사회로 바뀌었다. 시간의 한쪽 끝에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전통 사회가 있고, 다른 한 쪽 끝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는 현대 사회가 있다. 마치 유아기의 나와 막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의 관계처럼 둘은 동일한 존재이면서도 다르다. 다시 말해 루만에게 사회는 본래 하나의 덩어리며 그 덩어리 내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그것이 스펙트럼과 같은 연속적인 흐름이든 아니면 첩첩이 쌓인 지층들처럼 불연속적인 단절들의 축적이든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그 결과 전통 사회는 더 이상 스스로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현대 사회가 되었다. 결국에는 이것이 핵심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옛날의 사회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루만의 텍스트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독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그 자체의 현상을 전부 기억하고 기술하는 건 헤겔의 절대정신 외에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와 세계의 운동을 설명하고 거기에 서사를 붙인다.


루만의 서사는 무엇인가? "사회체계가 계층적 분화 형식의 우위에서 기능적 분화 형식의 우위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이행이 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계층적 분화 형식의 우위"는 전통 사회에, "기능적 분화 형식의 우위"는 현대 사회에 연결됨을 안다. 앞서 잠깐 짚었듯, 루만에게는 두 사회가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존재가 드러낸 서로 다른 모습에 가깝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의 동일성은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사회체계"는 바로 양자를 묶어주는 고정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실체인지 아니면 하나의 형식인지는 나중에 더 읽어보면서 알 일이다. 어쨌든 사회체계라는 무언가와 그것을 구성하는 형식이 있다. 그 형식이 전통 사회=과거에는 "계층적 분화"였다면, 현대 사회=오늘날에는 "기능적 분화"다. 물론 루만은 과거에는 오로지 계층적 분화만 존재했고 오늘날에는 기능적 분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구성비가 다를 뿐임을 "우위"라는 단어로 덧붙인다. 전통 사회가 현대 사회로 바뀌었다. 이것을 하나의 사회 체계를 구성하는 형식이 계층적 분화가 우위를 점하던 상황에서 기능적 분화가 우위를 점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고 옮겨쓸 수 있다. 모든 설명은 어떤 면에서 옮겨서-다시-쓰기paraphrase다. 루만은 세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을 이렇게 옮겨서 썼다. 우리는 루만을 다시 한번 옮겨 쓰는 작업을 통해 루만의 사유체계와 루만이 그려내려 했던 세계의 한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달할 수 있다.



2번 명제는 다시 1번 명제를 조금 더 구체화된 수준에서 서술한다. "사회체계가 계층적 분화 형식의 우위에서 기능적 분화 형식의 우위로 이행하는 것"은 다시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들 여럿이 있고, 이것들이 "분화"되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과 "소통매체"가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하는지는 독서를 계속해나가다보면 언젠가 알게 될 터이다(서론에 대략의 설명이 나온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개념을 풀이하는 대신 "분화"라는 단어 혹은 모티프가 두 명제 모두에 등장한다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두 명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행/변형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분화"이다. 앞서 말했듯 이행 또는 변형은 시간축 위에서 무언가가 변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분화"의 반복된 사용은 이러한 변화과정의 근본적인 성격에 분화라는 모티프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에는 무언가 단순하고 단일한, 어쨌든 수가 좀 적었던 것들이 쪼개지고 갈라지고 새끼를 치고 나누어지면서 여럿이 되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중요한 건 이 분화 혹은 분화-운동의 이미지를 간직하는 일이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는 어떤 면에서 이 분화라는 운동과 그에 수반하는 현상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도입되는 개념일 것이다. 현상이 개념에 앞선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운동이 있고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루만의 체계를 이해하는 요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언가 갈라지고 나누어져서 여럿이 된다는 모티프 자체를 붙드는데 있다고 추측해본다(역자 주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어차피 나는 역자가 될 수 없고 나의 이해도 역자의 이해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분화라는 키워드를 붙잡고 다시 1번 명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행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분화"라는 키워드 또한 첫 번째 명제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용법이 조금 다르다. 전통사회의 사회체계는 "계층적 분화 형식의 우위"로, 현대사회의 사회체계는 "기능적 분화 형식의 우위"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 "분화"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2번 명제의 분화가 이행이라는 시간적 개념과 함께 가는 운동이었다면, 1번 명제의 분화는 각각 시간적으로 동일한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형식의 한 성격으로 제시된다. 물론 실제로 완전히 시간이 정지한 사회를 가리키지는 않겠지만 임시로 마치 동영상 플레이어를 일시정지시켰을 때를 떠올려 보자. 시간이 움직이지 않는 각각의 동일한 현상으로서의 전통사회 및 현대사회가 있다면 그 각각의 사회는 공시적인 층위에서 특정한 분화의 형식을 갖는다. 정확히 사회가 '어떻게' 분화되는가가, 즉 분화의 형식이 그 사회체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해도 좋다. 그 분화의 형식이 전통사회에서는 "계층적"인 성격을 띠고, 현대사회에서는 "기능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사회체계의 본질에 분화라는 모티프가 있음은 마찬가지다.


1번과 2번의 두 명제에서 우리는 분화라는 모티프가 먼저 공시적으로, 즉 하나의 사회체계 내에서 그 사회를 조직하고 구성하는 원리로서 드러남을, 그 다음으로 통시적으로, 즉 과거의 사회체계에서 현대의 사회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소통매체라는 매개항을 통해 드러남을 본다.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분화는 과거에나 오늘에나 마찬가지로 있다. 동시에 두 사회의 이행과정은 소통매체의 분화로 옮겨적힐 수 있다. 아직 더 이상의 자료입력input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일단 지금까지의 진행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이론은 과거에서 현재로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다. 둘, 그 핵심적인 모티프는 분화다.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분화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루만의 체계를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화라는 모티프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함축한다. 먼저 공시적인 모티프로서의 분화는 하나로 상정된 사회체계는 결국에는 무언가 여럿의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만은 분화라는 모티프를 통해 한편으로 사회 내의 복수의 항들을, 다른 한편으로 복수의 항들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논리를 제시한다(서론에 언급될 내용을 미리 말하자면 "소통매체"는 이 복수의 주체들 간의 의사소통 및 관계를 가능케 하는 매개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시적 모티프로서의 분화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운동과정을 설명하는 논리의 밑바탕이 될 수 있다. 분화라는 한 가지 모티프 또는 운동의 논리를 통해 루만은 공시적인 층위에서의 사회체계를, 동시에 통시적인 층위에서 사회의 변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논리를 손에 넣은 셈이다.




잠시 텍스트의 독해에서 물러나오자. 한편으로 개념의 논리를 좇는 사유운동의 진행 뒤에는 그 사유운동을 자족적인 논리 바깥의 대상과 맞닥트리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배경지식을 한번 짚어보자는 이야기다. 근대연구자로서 나는 서구의 근대화과정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전후에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인 변화들이 있어왔지만, 어쨌든 많은 연구자들은 근대사회가 출현하는 근본적인 분기점 중 하나로 종교개혁을 꼽는다. 이전까지 (동로마를 제외한) 유럽사회가 가톨릭 교회의 통치 하에 단일한 세계질서를, 적어도 그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면,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으로부터 17세기 중반 베스트팔렌 조약까지의 사건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논리가 더 이상 하나만 존재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경우 각 개인들의 수만큼 존재할 수 있음을 확정짓는 과정이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그 전까지 "존재의 거대한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이라고 불렸던 세계의 논리와 그 구체적인 발현물 중 하나로 간주된 신분제가, 루만의 표현을 끌어온다면 "계층적 분화형식"이 점차적으로 무력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의 영국 청교도혁명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 곳곳에서 왕의 목이 베어지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번 농노는 평생 농노로서 영원히 귀족에게 복종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를 뒷받침하는 마치 사슬과 같은 세계의 논리는 이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점차 지워진다. 정치적 권력의 층위, 경제적 생산양식의 층위, 그리고 세계의 이해라는 이데올로기의 층위와 같은 제반 영역에서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함께 때로는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단단한 모든 것들이 녹아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고 썼다.


결국 역사적 시점에서 근대를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려 했던 사상가들은 이와 같은 서사 위에서 작업했다. 계몽의 논리가 전통적인 사회질서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때려부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조차 무너트리면서 근대인이 야만으로 퇴행하는다는 서술이나(<계몽의 변증법>), 왕과 귀족들이 공적인 영역을 독점하던 전근대적 사회가 사적영역에서의 의견규합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등장으로 무너지고 부르주아 공론장은 다시 노동계급의 등장과 정부에 의한 조작/관리가 증대하면서 붕괴한다는 서사나(<공론장의 구조변동>) 기본적으로는 위와 같은 표준적인 역사서술을 어떻게 보다 이론적인 서사로 재구축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권력의 통치방식에 초점을 맞춘 푸코의 분석도 이 틀에서 예외는 아니며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강의록들은 하버마스의 역사서술과 곁들여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루만의 체계 또한 (물론 자기 식대로의 변형을 가하겠지만) 근대화과정을 이론화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바꿔 말해 근대화과정에 대한 대략의 표준적인 서사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루만의 언어 및 체계가 조금 덜 낯선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앞서 인용한 맑스의 말에 암시되어 있듯 근대화과정은 하나의 거대하고 단단한 질서가 무너지고 여러 '서로 다르지만 평등'하다고 간주되는 주체들의 사회로--경제적으로는 복수 주체가 참여하는 시장이, 정치적으로는 1인 1표에 입각한 시민들의 민주주의가, 사회적으로는 적어도 원칙상으론 동등하게 여론 형성에 참여할 기회를 가진 시민들의 시민사회가 서로 결합한 형태로 이해된다; 근대적 개인이 되든, 자본가와 노동자가 되든, 권력에 의해 개별적으로 주체화된 개인들이 되든은 그 다음이다. 여기에서 '분화'의 모티프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층위의 역사와 루만의 체계를 연결시키고 체계에서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역사적 지식으로 비추어가며 이해할 길을 얻는다.




소통매체라는 개념은 전면적인 분화과정으로서의 근대화과정이라는 거대한 서사와 분리될 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분화가 먼저고 소통매체는 그 다음이다. 루만은 공시적인 층위에서 사회체계가 분화형식을 갖는다고 이야기했다. 이를 조금 더 쉬운 수준으로 억지로 끌어내린다면 사회체계는 복수의 주체들로 구성된다는 함의를 찾을 수 있다. 여러 주체들을 신분과 같은 계급/계층적인 형태로 조직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 국가, 사회를 통해) 전체적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기능을 통해 하나로 묶어 조직할 것인지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이 사회 전체의 요구로부터 부분적인 자율성을 획득한 개별적 인격의 탄생과 함께 "인격적 체계들과 사회적 체계들이 한층 더 뚜렷하게 분화되는" 과정을 함축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능적 분화와 함께 개별 인격은 사회의 어느 한 하위체계에만 정착할 수 없게 되며, 그의 고유한 사회적 장소가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31). 이렇게 사회체계의 이행으로 비롯된 주체들의 분화가 있다면 소통매체는 이렇듯 분화된 주체들로 하여금 어떻게 상호작용 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서론의 다음 대목을 참고하자. "본 연구의 두번째 맥락을 우리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는 발상을 통해 얻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랑을 감정이나 감정이 반영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코드로 다룬다. 상징적 코드란 매우 비개연적인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코드이다"(21).


 주체들을 필연적으로 결속하던 질서("계층적 분화")가 개인주체들 간의 필연성을 상실한 인간관계("기능적 분화")로 대체됨에 따라 "비개연적인 일"로서의 개인 간 소통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아지는" 결과가 발생하고, "비개연적인 사회구조들이 정상적으로 되면 그만큼 소통매체들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아"진다(22). 우리는 앞서 영어판 서문에 수록된 두 개의 명제 중 2번째 명제에 언급된 "소통매체들이 분화"되는 과정을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점은 소통의 방식이 개별화되고 경우에 따라 자의적이 되면서 소통매체도 그만큼 복잡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1장에서 루만은 자신이 이 책에서 다룰 중심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 질문은 개체성을 소통상에서 다루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육성하며 촉진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매체, 즉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소통매체의 성립에 관한 것이다"(30). 사랑은 그러한 소통에 활용되는 "상징적 코드"의 한 예다. 마치 푸코에게 성sexuality이 근대적 권력의 발전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처럼 루만에게는 사랑이 전통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소통매체의 분화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한편으로 사회의 분화 및 인간이 "그의 고유한 사회적 장소"를 상실하는 사태가 초래되면서 마치 그 반작용처럼 "그가 몇몇 경우에 한해 인격적 관계들에 집중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을 타인과 나누고 타인 속에서 확인받고자 할 가능성"이 출현한다(27). 사랑은 이렇게 새로이 출현한 "집중적인 인격적 관계"(28)에의 요구 위에서 그러한 관계 상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상징적 코드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변천을 추적하는 작업은 한편으로 소통매체 및 그 구체적인 실현양상의 변화를, 그러한 소통을 요구하는 인격적 관계의 등장을, 더 나아가 인격적 관계에의 요구를 만들어내는 근대 사회로의 이행과정을 추적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루만이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어디까지 나아가는지는 계속 읽어가며 확인해야겠지만 적어도 그 이론적 가능성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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