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에밀: 교육론>. 인용 및 간략한 코멘트들.

Reading 2014. 10. 16. 03:12

장 자크 루소. <에밀: 교육론>(_Emile de l'Education_). 1762. 전3권. 박은수 역. 성문각, 1973. [<루소 전집> 전 7권의 1-3권] 주요부분 인용 정리.


[국역본 1권]

제1부 [유년기]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두가 다 좋다. 사람 손에서 모조리 나빠진다. ... 모두를 뒤집어엎고, 모두를 일그러뜨린다. 기형이나 괴물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자연이 만든 그대로는 두려들지 않아, 사람까지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말처럼 길을 들여야 한다. 정원의 나무처럼 자기 멋대로 뒤틀어 놓아야 한다.

 ... 편견·권위·필연성·본보기, 우리를 그 속에 몰아넣는 이 모든 사회제도가, 사람의 본성을 목졸라죽이고 그 대신 아무것도 주지는 않을 것이다. ..." (17)


"우리는 약하게 태어나, 힘이 필요하다. 빈손으로 태어나, 도움이 필요하다. 빈손으로 태어나, 도움이 필요하다. 어리석게 태어나, 판단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날 때에는 갖지 않으나 커서는 필요하게 되는 이 모두는 교육에 의해 주어진다.

 이 교육은 자연이나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해준다. 우리의 기능과 기관의 내부 발전은 자연의 교육이다. 이 발전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람들의 교육이다. 우리에게 작용하는 대상물들에 관해 우리 자신의 경험이 얻는 것은 사물들의 교육이다.

 그러니 우리는 저마다 3가지의 스승에 의해 육성된다. ..." (19)


"우리는 감각을 갖고 태어나, 나면서부터 주위의 사물들에 의해 갖가지로 자극을 받는다. 말하자면 제 감각을 깨닫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 감각을 낳는 대상물들을 찾거나 피하게 마련인 바, 처음에는 그 감각이 기분좋으냐 나쁘냐에 따라서, 다음에는 그 대상물들이 우리에게 알맞아 보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마지막에서는 이성이 주는 행복이나 완전성의 관념에 비추어 우리가 그 대상물에 대해 내리는 판단에 따라서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우리의 감각이 더욱 발달되고 경험이 더욱 많아질수록 넓혀지고 굳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습성에 얽매인 이 경향은, 우리의 편견 때문에 다소간 변질된다. 이러한 변질 이전의 이 경향, 이것이 바로 내가 우리의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는 이 본래의 경향으로 돌려야 하겠고, 우리의 3가지 교육이 단지 다를 뿐이라면 이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3가지가 서로 어긋날 때는 어떻게 되는가? 한 인간을 그 자신을 위해 기르지 않고 남들을 위해 기르고자 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는 화합이 불가능하다. 자연이나 사회제도와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한 인간을 만드느냐, 한 시민을 만드느냐,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 한꺼번에 양쪽을 다 만들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20-21)

: 로크적인 감각론을 받아들이되 여기에 자연과 사회제도의 대립을 두 가지 서로 다른 당위로 추가한다.


"자연인에게는 자기가 모두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을 닮은 것하고밖에는 관계가 없는, 단위수이고, 절대 정수이다. 사회인은 분모에 딸린 분자에 불과하며, 그 가치는 사회라는 전체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 좋은 사회제도란 사람을 변질시켜 그 절대적 존재를 빼앗고는 상대적 존재를 주어 자아를 단일공동체 속으로 옮길 줄을 가장 잘 아는 제도이다. 각 개인이 이미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통일체의 부분으로 알며, 전체 속에서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말이다. 로마의 한 시민은 가이우스도 투키우스도 아니었다. 한 로마인이었다. 자기 말고 오로지 조국만을 사랑하기까지 했다. ...

 라케다이몬 사람 파이다레토스는 3백인 의회의 의원이 되려고 나선다. 그는 거부당한다. 스파르타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3백명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아주 기뻐서 돌아온다. 나는 이러한 태도 표시를 진정한 것으로 보며, 그렇다고 믿을 만한 건덕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민이다." (21-22)

: 덕성, 공화국(시민됨), 일반의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무언가가 되려면, 자기 자신이 되려면, 또 한 인간이 되려면, 자기가 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 그가 인간인지 시민인지를, 아니면 동시에 양쪽이 다 되려고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런 비범한 인간을 누가 내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필연적으로 상반되는 이 2가지 목적[시민 대 인간]에서 반대되는 2가지의 교육형태가 생겨난다. 하나는 공적인 공동교육이고 또 하나는 개별적인 가정교육이다." (23)

: 직후 루소는 공적인 교육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결국 남은 것은 가정 교육이나 자연이 교육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교육된 인간이 남들을 위해 무엇이 될 것인가? 혹시 노리는 이중의 목적이 단 하나로 결합될 수라도 있다면, 사람의 모순들이 제거됨으로써 그의 행복의 큰 장애물도 제거될지 모른다. 이런 인간을 알아보려면 완전히 형성된 그를 보아야 할 것이다. ... 한 마디로 말해 자연인을 알아야 할 것이다." (24)


"모든 자리가 정해져 있는 사회질서 안에서는 저마다가 제 자리에 맞게 교육되어야 한다. 제 자리에만 맞도록 만들어진 개인은 그 자리만 벗어나면 아무 소용도 없어진다. 교육은 자기 운명이 부모의 천직과 일치되는 한도 안에서만 유효하다. ...

 자연의 질서 안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만큼 그들의 공통된 천직은 인간의 상태이다. 인간이 되게 제대로 교육된 자는 누구나 인간과 관계되는 구실들을 제대로 다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내 제자를 군인으로 삼건 성직자로 삼건 변호사로 삼건 내게는 상관없다. 부모의 천직 이전에 자연이 그에게 인간의 생활을 요구한다. 사는 일이, 내가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직업이다. 내 손에서 떠날 때 분명 그는 법관도 군인도 신부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일 것이다. 그는 필요하면 한 인간으로서 되어 마땅한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운명이 그의 자리를 바꾸려들어도 헛일, 그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을 것이다." (25)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소의 자연인이 이후 19세기 독일에서 '교양인'이라고 불리는 개념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 하에서 이미 주어진 고정된 직업이 아닌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상관없는 인간 또는 자연인 자체의 형성이 요점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자연인의 육성이 요구되는 상황은 이미 신분에 따라 사람의 직업 및 중요성이 결정되는 사회가 아닌 개개인의 능력 및 덕성과 같은 요소에 따라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업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람의 중요성이 평가받는 사회가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컨대 사회적 신분체계 및 이에 수반하는 직업의 유동성이 루소의 자연인/인간 개념의 역사적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연인/인간 개념이 덕성을 왕, 귀족과 같은 신분이 아닌 개개인의 됨됨이에 부여한다는 사실도 기억해두자.


"아이들에게 가르칠 학문은 하나밖에 없다. 인간의 의무라는 학문이다. 이 학문은 단일하며, 크세노폰이 페르시아인들의 교육에 대해 설사 무슨 말을 했건, 이 학문은 갈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이런 학문의 선생을 교사라기보다는 스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에게는 가르치는 일보다 지도하는 일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교훈을 줄 것이 아니라, 그 교훈을 찾아내게 해야 한다." (45)

: 인간의 형성이라는 주제. 훈련. 헬레니즘적?


"악은 모두 약함에서 온다.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만 악한 것이다. 강하게 해주면 착해질 것이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자는 결코 악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

 이성만이 우리에게 선과 악을 아는 법을 가르쳐준다. 우리더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게 하는 양심은, 비록 이성과는 따로된 것이긴 하지만, 이성 없이는 발달될 수가 없다. ..." (73)



제2부 [소년기]


"용기를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가벼운 고통을 겁 없이 참는 일이며 차차 큰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나는 에밀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기는커녕, 한 번도 다치지 않고 고통을 모르고 자란다면 오히려 딱하게 여길 것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맨먼저 배워야 할 일이며, 잘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92)


"절대적인 행복이나 불행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 가장 행복한 자는 가장 덜 고생을 당하는 자다. 가장 가엾은 자는 가장 덜 기쁨을 느끼는 자다. 언제나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많다. 이는 만인에게 공통되는 차이다. 이승에서의 인간의 지복이란 따라서 부정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당하는 고생의 최소량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고통감은 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기쁨의 관념은 모두 다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욕망 모두는 부족을 전제로 삼고, 느껴지는 모든 부족은 괴롭다. 따라서 우리의 비참은 바로 우리의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 있다. 능력이 욕망과 맞먹는 감성적 존재는 완전히 행복한 존재일 것이다.

 그럼 인간의 지혜는, 참 행복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의 욕망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우리의 힘 아래 있다면, 우리 능력의 한 부분은 할 일이 없어져 우리는 우리의 존재 모두를 즐기지 못할 테니까. 우리의 능력을 넓히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도 동시에 더 큰 비례로 넓어진다면 우리는 더욱 비참해질 뿐일 테니까. 따라서 그것은 능력을 넘는 욕망을 줄이는 데 있으며, 힘과 의지를 완전히 동등하게 하는 데 있다. 모든 힘이 활동하면서도 마음은 평온을 유지하고 인간이 제대로 가다듬어진 상태에 있게 될 것은 바로 이런 때 뿐이다." (98-99)

: 여기에서 루소는 일견 쾌락-고통에 따라 인간이 움직인다는 로크적/공리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소간의 변화를 가한다. 조금 뒷세대인 벤담과 비교할 때, 루소는 쾌락과 고통의 감각을 욕망과 능력의 차이에 귀속시킨다. 이때 욕망과 능력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또 다른 심급이 등장하며 이 심급으로부터 나오는 역량/덕성virtue이야말로 루소에게 핵심적인 개념이다. 계속 보자.


"인간은 약하다고 말할 때 그 뜻은 무엇인가? 이 약하다는 말은 하나의 관계를, 이 말이 적용되는 자의 어떤 관계를 가리킨다. 힘이 욕구를 넘는 자는 비록 곤충이나 벌레라 하더라도 강자다. 욕구가 힘을 넘는 자는 코끼리나 사자라 하더라도, 정복자나 영웅이라 하더라도, 신이라 하더라도, 약자다. 제 본성을 무시한 반역의 천사는, 제 본성에 따라 조용히 산 행복한 인간보다 더 약했었다. 인간은 생긴대로 살기에 만족할 때는 아주 강하다. 인간성을 넘어서려들 때는 아주 약하다. 그러니 능력을 넓힘으로써 힘을 넓히겠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아라." (99)

: 앞서 말했듯 욕망와 능력의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역량에 따라 루소가 강하고 약하다고 부르는 차이가 결정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개체 간의 '객관적인' 능력이 아닌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제어하는지, 곧 (주관적인) 역량의 차원에 개체의 강하고 약함을 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요컨대 외부에 힘을 가하는 물질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역량이 그 인간의 탁월함을 결정한다.


"[편지를 받고 자신의 불행을 비로소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의 예를 들며] 그의 불행은 사실이었다고 여러분은 말하겠지. 좋다, 하지만 그는 그 불행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럼 그는 어떤 상태에 있었던가? 그의 행복은 가공의 것이었다. 알겠다. 건강·쾌활·안락·정신의 만족은 이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있지 않은 곳에만 존재한다." (103)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만 뜻대로 하기 위해 자기 팔끝에 남의 팔을 이어댈 필요가 없는 사람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좋은 것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은 권력이 아니고 자유다. 정말로 자유로운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아, 자기 마음에 드는 일밖에는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근본적인 격률이다." (105)

: 앞서 언급한 욕망과 능력을 염두에 둔다면, 욕망이 능력을 초월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루소에게 있어 이상적인 상태인 '자유'이다(자연스럽게 푸코가 말한 헬레니즘적 주체화 과정이 떠오른다). 이 이상적인 상태, 덕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그것에 구속되지 않는 역량이 중요해지며, 루소의 교육은 이러한 역량/덕성을 함양하여 인간을 '자유로운' 상태로 인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의 의존이 있다. 하나는 사물들에 대한 의존으로, 이는 자연에 말미암는다.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의존으로, 이는 사회에서 말미암는다. 사물들에 대한 의존은 아무런 도덕성도 없이, 자유를 해치지 않고, 악을 낳지도 않는다. 사람들에 대한 의존이란 무질서한 것이어서, 온갖 악을 나으며, 주인과 종이 서로 타락시키는 것도 이 의존 때문이다. 사회 속의 이런 악을 바로 잡을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대신 법을 두는 일이며, 개인 의지 모두의 행위를 능가한 현실적인 힘으로써 일반 의지를 무장하는 일이다. 여러 나라의 법들이 자연의 법처럼 인간의 어떤 힘으로도 결코 이겨낼 수 없는 불굴의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이때 사람들에 대한 의존은 사물들에 대한 의존으로 되바뀔 것이다. 국가 안에서 자연 상태의 모든 이익을 시민 상태의 그것과 합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악덕을 면하게 해주는 자유에다, 인간을 미덕으로 끌어 올려주는 도덕성을 합치게 될 것이다." (107-08)

: 여기에서 일반의지=법이 곧 자유=덕성을 사회적 삶 속에서도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성은 힘의 브레이크"(118)


"아이에게 주어야 할 첫 관념은 자유의 관념보다는 소유의 관념이다." (134)

"우리는, 소유 관념이 어떻게 해서 절로 노동에 의한 첫 소유자의 권리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가를 알게 된다." (138)

: 소유와 노동.


"내가 알렉산드로스의 행위에서 아름답게 보는 바가 무엇이냐고? ... 그것은 알렉산드로스가 미덕을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기 목과 목숨을 걸고 그것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 오, 그 삼킨 약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던가!" (162)

: 미덕.


"감각을 훈련하는 일은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제대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며, 이를테면 느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배운대로밖에는 만질 줄도, 볼 줄도, 들을 줄도 모르니까 말이다." (204)

: 벤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각의 훈련이라는 모티프.



3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갠 저녁나절에 확 트인 지평선으로 지는 해가 고스란히 보이는 그런 곳으로 산책을 나가, 해 지는 지점의 눈대중이 되는 것들을 보아둔다. 다음날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해가 돋기 전에 같은 곳으로 간다. 해가 제 앞에 던지는 불의 화살들을 가지고 멀리서 자신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불이 늘어나 동쪽이 온통 타오르는 것 같다. 그 광채를 보고 해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기다린다. 금방금방 나타나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다. 마침내 해가 보인다. 번쩍이는 한 점이 번개처럼 솟더니 당장에 온 공간을 채운다. 어둠의 장막이 사라진다. 인간은 제가 사는 땅을 알아보고 그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푸른 들이 밤 사이에 새로운 생기를 얻었다. 그것을 비추는 태어나는 낮, 그것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첫 광선들이, 빛과 색을 눈에 반사하는 이슬의 반짝이는 그물에 뒤덮힌 푸른 들을 보여준다. 합창하는 새들이 모여 일제히 생명의 아버지에게 인사한다. 이 순간에는 단 한 마리도 잠자코 있지는 않는다. 새들의 아직도 약한 지저귐이 하루의 나머지 시간보다는 더 느리고 다정스러워, 편한 잠에서 깨어난 나른함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상쾌한 인상을 감각에 가져온다. 아무도 물리치지 못할 황홀의 반 시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토록 거창하고 아름답고 감미로운 광경은 누구도 냉정하게 두지는 않는다." (273-74)


"내가 보기에 자연 교육의 가장 잘된 개론을 제공하는 책이 한 권은 있다. 그것은 우리 에밀이 읽을 첫 책이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오랫동안 그의 장서 모두를 이룰 것이고, 나중에도 여전히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로빈슨 크루소다.

 ... 편견을 초월해서 사물들의 진짜 관계에 대한 자기 판단을 정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립된 인간의 위치에 자신을 놓고 그 인간이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의 이익에 비추어 판단하듯이 판단하는 일이다." (306)


"기술의 사회는 솜씨의 교환에서, 장사의 사회는 물건의 교환에서, 은행의 사회는 어음과 돈의 교환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념 모두는 서로 관련이 있고, 그 기본 개념들은 이미 얻어져 있다. ...

 어떤 사회도 교환 없이는, 어떤 교환도 공통되는 척도 없이는, 어떤 공통 척도도 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는 저마다, 사람들에 있어서건 사물들에 있어서건 인습적인 어떤 평등을 으뜸가는 법칙으로 가지고 있다."(315)


"사물들 사이의 인습적인 평등은 돈을 발명케했다. 왜냐하면 돈이란 갖가지 물건의 가치에 대한 비교의 표적에 지나지 않으니까. 또 이런 뜻에서 돈은 사회의 진짜 굴레다." (316)


"여러분은 사회의 현행질서가 불가피한 혁명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으며, 여러분의 아이들이 당할지도 모를 혁명이 여러분이 미리 짐작하거나 막아줄 수가 없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 질서만 태산같이 믿고 있다. ... 우리는 위기 상태와 혁명의 세기에 다가들고 있다. "(325)


"단순한 관념은 비교된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단순한 관념이라 부르는 복합감각 속 못지않게 단순한 감각 속에도 판단은 있다. 감각 속의 판단은 순전히 수동적이어서, 느껴지는 것을 느끼고 있음을 입증한다. 지각이나 관념 속의 판단은 능동적이다." (344)



[국역본 2권]

4부. [2차 성징(?)]


"그러니 여러분의 제자에게는, 불쌍한 자들의 고통이나 가난한 자들의 고생을 영광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버릇을 들이지 말라. 또 그가 그들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본다면, 그들을 동정하도록 가르쳐줄 생각도 하지 말라. 그 불행한 자들의 운명이 자기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들의 불행이 모조리 자기 발밑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 불가피한 뜻밖의 숱한 사건들이 단박에 자기를 그 속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시켜주도록 하라. 태생도 건강도 부도 믿지 말도록 가르쳐주라. 행운의 온갖 변천을 보여주라. 자기보다 더 높은 상태에서 그 불행한 자들보다 더 낮은 상태로 굴러떨어진 사람들의 노상 흔해빠진 예를 찾아주라." (31)

: 혼란의 세계에서 루소의 교육이 덕성/미덕의 육성으로 향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는 마침내 도덕의 질서로 들어간다. 인간의 둘째 단계를 우리는 막 지나왔다. 여기가 그럴 자리라면 나는 마음의 첫 움직임들로부터 양심의 첫 목소리들이 어떻게 솟아오르며, 사랑과 미움의 감정들로부터 선악의 첫 개념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밝혀보겠다. 정의와 선이 그저 추상적인 말, 이해력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적인 순수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원시적인 감정의 제대로의 진보에 불과한, 이성이 비춰주는 넋의 진짜 감정임을 보여주겠다. 양심과는 관계없이 이성만으로는 어떤 자연의 법칙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자연의 권리도, 사람 마음의 자연적인 요구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서는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52-53)


"남이 나에게 그래주었으면 하는 대로 나도 남에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에도, 양심과 감정밖에는 진짜 근거랄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마치 남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할 뚜렷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더구나 내가 같은 처지에는 결코 있게 되지 않을 것을 도덕적으로 확신하고 있을 때에는 말이다. 또 이 격률만 충실히 지키면 남도 나에 대해 그것을 지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나에게 보증해 줄 것인가? [...] 그러나 넘치는 어떤 넋의 힘이 나를 내 동류와 동화시켜,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느끼게 될 때는, 그가 괴로워하기를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내가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위의 가르침의 근거는 따라서, 내가 어디 있다고 깨닫건 나의 안락을 바라게 만드는 자연 자체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연법칙의 가르침들이 이성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이 가르침들에는 더 확고한 근거가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파생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인간정의[justice]의 원리다. 복음서에는 법칙의 요약으로, 윤리학 전체가 요약되어 있다."(53f)

: 여기에서 루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이성만이 아닌 일종의 '도덕감정'을 내세운다. '도덕감정'은 거칠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느끼게 되는 기능이다. 홉스와 로크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없었고, 이들의 계보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벤담은 인간은 그렇게 느끼지만 그것은 허구,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 주제에 대해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역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_Theory of Moral Sentiment_으로, 기회가 된다면 루소와 스미스를 비교하는 작업도 흥미로울 것이다.


"인류의 공통되는 우발 사건들에 의해 사람들을 그[에밀]에게 보여준 다음, 이번에는 사람들의 다른 점들에 의해 그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연적인 불평등과 사회적인 불평등의 척도, 사회질서 전체의 일람표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사회를 통해 사람들을 연구해야 한다. 정치학과 윤리학을 따로따로 다루려는 자들은, 그 어느 쪽에서도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원시적인 관계들에 눈을 돌리면, 사람들이 어째서 그 영향을 받아야 하며, 거기서 어떤 정념들이 생겨나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그 관계들이 늘어나고 긴밀해지는 것이 반대로 정념들의 발달에 의해서임을 알게 된다. 사람들을 자주적이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완력보다도 마음의 절제다." (54)

: 개인-사회의 분할불가능함. 실제로 <에밀>은 한 아이의 양육으로부터 시작해 시간이 지나며 아이가 성장해 나감에 따라 점차 서술의 범위를 넓혀 정치체 및 사회에 대한 논평으로까지 나아간다; 일견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를 분석하는 틀처럼 보이지만, 루소는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려운 저자다. 예컨대 사회를 개인이라는 부분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이론들과 달리 루소에겐 명백히 개인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가 다시금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러한 권력과 아주 무관한 개인,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반의지와 같은 이상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자연상태에서는 사람 사이의 단순한 차이가 하나를 또 하나에게 예속시킬만큼 클 수는 없기 때문에, 자연상태에는 깨트리지 못할, 사실상의 평등이 있다. 사회상태에는 터무니없는 헛된 권리의 평등이 있는데, 그것은 이 평등을 깨트리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를 억누르기 위해 최강자에게 주어진 국가권력이, 자연이 양자 사이에 둔 일종의 균형을 깨트리기 떄문이다. ["모든 나라의 법률에 보편적인 정신은 언제나 약자에 대해 강자를,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에 대해 가진 자를 두둔하는 일이다. 이러한 폐단은 불가피하고 또 예외도 없다." 55f] 사회질서 속에서 겉보기와 실제 사이에 보이는 모든 모순이 이 첫 모순에서 생겨난다. 언제나 다수는 소수에, 공공이익은 개인이익에 희생될 것이다. 정의니 종속이니 하는 저 허울좋은 말들이 언제나 폭력의 연장으로, 부정의 무기로 쓰일 것이다. 그 결과로서, 딴 계급들에 유익하다고 자칭하는 특별계급들도 실은 딴 계급들을 희생시켜 제 계급 자체에만 유익할 따름이다. [...] 그런데 이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55)

: 계급/계층이 주체가 되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다시금 개인의 심리학으로 이동한다.


"제 마음을 해칠 위험 없이 인간의 마음을 이해시켜주기 위해, 나는 그에게 멀리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으며, 딴 시대나 딴 곳에 있는 그들을 보여주어 그 무대는 볼 수 있으나 거기 나서는 일은 없도록 해주고 싶다. 바야흐로 역사를 가르칠 시기가 온 것이다. 그가 철학 공부 없이도 사람들 마음을 읽게 될 것은 바로 역사에 의해서다. 이해관계도 정념도 없이 단순한 구경꾼으로서, 그들의 공범자나 고발인으로서가 아니라 재판관으로서 그들을 보게 될 것은 바로 역사를 통해서인 것이다." (57-58)


"서루 죽이는 국민들의 역사는, 우리는 아주 온전하게 갖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번식하는 국민들의 역사다." (58)


"유모나 어머니들은 자신이 아이들에게 베푸는 정성을 통해 아이들에게 애착을 갖게 된다. 사회적인 미덕의 실천이 인류애를 사람들 마음 밑창에 심어준다. 사람이 착해지는 것은 착한 일을 함으로써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여러분의 제자더러 힘닿는 모든 선행은 다 하도록 시키라. 극빈자들의 이해관계가 바로 그의 이해관계가 되도록 해주라. 지갑만 가지고가 아니라 정성을 가지고 그들을 돕도록 해주라. 그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자기 몸과 시간을 그들에게 바치게 하라. 그들의 대리인이 되게 하라. 그가 평생 이보다 훌륭한 일을 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미덕의 실천에서 얻어지는 그 굳은 확신을 가지고 그가 그들을 위해 시비곡직을 따지게 되면, 누가 귀담아 들어준 적도 없던 얼마나 숱한 피압제자들이 정당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인가." (83)

: 실천을 통해 미덕이 주체에게 스며드는 것. 푸코를 비롯한 오늘날 이론으로 옮기면 실천에 의한 주체화과정.


"그것들은 감각의 영역을 벗어나 있어. 그것들을 간파하기 위해 우리는 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상력밖에는 가진 게 없거든. 저마다가 이 상상의 세계를 가로질러 좋다고 생각되는 길을 트고 있지. 자기 길이 목적지로 통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 그런데도 우리는 다 간파하고 싶고 다 이해하고 싶어하거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일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일이야. 우리는 아무도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고 자백하기보다는 무턱대로 마음을 정해 있지도 않은 것을 믿기를 더 좋아하거든. 그 한계를 우리는 알지 못하는 하나의 큰 전체, 그 창조자가 우리의 어리석은 논쟁에다 내어 맡기고 있는 그 큰 전체의 작은 부분인 우리는, 그 전체가 그것 자체로서 무엇이며 그것에 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젓기를 바라기에는 하찮은 존재야." (118)

: 칸트. 헤겔.


"물질이 영원한 것이건 만들어진 것이건, 수동적인 어떤 원리가 있건 없건, 전체는 하나이어서 유일한 지혜를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틀림없거든. 왜냐하면 같은 체계 속에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목적, 즉 세워진 질서 속의 전체의 유지에 협력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나는 볼 수가 없으니 말이야. 바라고 행할 수 있는 이 존재, 스스로 능동적인 이 존재, 그가 무엇이건 요컨대 우주를 움직이고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이 존재를 나는 하느님이라고 불러요. 이 이름에다가 나는 지혜와 능력과 의지의 관념들을 몰아 결부시키고, 그것들의 필연적인 결과인 선의 관념을 결부시키거든." (135)

: 스피노자.


인간의 본성에 관해 숙고함으로써 나는 거기에 판이한 두 가지 근원을 발견한 것으로 생각해쓴ㄴ데, 그 하나는 인간을 영원한 진리의 연구나, 정의와 아름다운 도덕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현자의 더없느 즐거움이 되는 그러한 지성세계의 영역으로 높여주고 있었고, 또 하나는 인간을 비열하게도 그 자신 속으로 되끌어내려 감각의 지배와 그 앞잡이인 정념들에 굴복시키고, 첫 근원의 감정을 불어 넣어주는 것 모두를 그 정념들로 가로막고 있었어. 이 두 가지의 상반되는 움직임에 끌려다니며 시달리고 있다고 깨달은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 그래, 인간은 하나가 아니야. 나는 바라면서 바라지 않고 있고, 자신이 동시에 노예이면서 자유롭다고 느끼고 있어. 나는 선을 알고 또 좋아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거든. 나는 이성에 귀를 기울일 때는 능동적이고, 정념에 끌려다닐 때는 수동적이며, 내가 져서 넘어갈 때의 가장 고약한 괴로움은, 버틸 수도 있었다고 깨닫는 일이란 말야." (139)

: 인간 동기의 복수성을 깨닫는 순간 그때 당위, 덕성, 자유와 같은 개념들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요즈음 철학은, 바위들이 생각한다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 같다. 요즈음 철학은 자연에서 감각존재들밖에는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말아, 사람과 돌 사이에 발견하는 차이라고는, 사람은 감동을 아는 감각존재이고 돌은 감동 없는 감각존재라는 점 뿐이다. 헌데 물질이 다 느낀다는 말이 옳다면, 감각하는 단위체 즉 개별적인 자아를 나는 어디서 알아볼 것인가? 물질의 각 분자 속에서인가, 아니면 집합체들 속에서인가? 이러한 단위를 나는, 액체와 고체 속에, 혼합물과 원소 속에 똑같이 인정할 것인가? 자연에는 개체들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 개체들이란 무엇인가? 이 돌은 개체인가, 개체의 집합체인가? 하나만인 감각존재인가, 모래알들만큼의 감각존재를 포함하고 있는가? 기본적인 원자 하나하나가 감각존재라면, 하나가 또 하나 속에서 자신을 느껴 자아 둘이 하나로 융합되게 하는 저 내면적인 교감이 이해될 도리가 있겠는가? 인력이란 그 비밀이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자연법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질량에 따라 작용하는 인력에는 공간 및 가분성과 양립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만은 이해할 수 있다. 감정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하는가? 느끼는 부분들은 퍼져있지만 감각존재는 불가분이어서 하나다. 나누어질 수가 없어 전체 아니면 무다. 감각 존재는 그러니 물체가 아니다. 유물론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더러 생각을 부정케 한 바로 같은 어려움들이 감정도 마땅히 부정케 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첫 발을 내디딘 그들이 왜 다음 발도 내딛게 되지 않겠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힘들 것도 없을 것이고, 또 자기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어떻게 느낀다고 감히 우겨대는가?" (140-41f)


: 감각론/경험주의에 대한 반박. 오로지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만을 유의미한 실재로 인정한다고 할 때, 감각론은 바로 그러한 감각을 통해서 지각될 수는 없는 '감각의 주체'를 논리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기에 일종의 난국에 빠지게 된다. 요컨대 나는 감각의 대상들은 인식할 수 없지만 인식하는 나 자신은 인식할 수 없기에 그것을 유의미한 실재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단순히 감관을 통해 대상을 수용하는 주체만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 곧 애초에 물리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나'라면 소박한 감각론으로는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는다. 루소는 경험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본능'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시 한 번 진행한다(155-56f).


"이리하여 감각적인 대상물들의 인상과, 나더러 자신의 타고난 빛에 따라 원인들을 판단케 하는 내면감정으로부터, 내가 알아두어야 하던 주된 진리들을 끌어낸 다음에 내게 남은 할 일은, 내 행동을 위해 거기서 어떤 격률들을 끌어내어야 하고, 나를 땅위에 놓아준 이의 의도에 따라 여기서의 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을 자신에게 과해야 하는가를 찾아내는 거지. 여전히 내 방법에 따라, 나는 이 규칙들을 어느 고상한 철학의 원리들에서 끌어내지는 않고, 그것들이 자연의 손에 의해 지워지지 않는 글자들로 내 마음 밑창에 적혀 있음을 발견해.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나 자신과 상의하기만 하면 돼.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은 다 좋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다 나쁘거든. 모든 까쥐스트casuiste들 중의 으뜸은 양심이며, 사람이 번거로운 추리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양심과 흥정할 때뿐이지. [...] 이성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속여. 이성을 거부할 권리를 우리는 너무 많이 얻었어. 헌데 양심은 결코 속이는 법이 없으며, 인간의 진짜 길잡이지. 양심의 영혼에 대한 관계는 본능의 육체에 대한 관계와 같거든. 양심에 따르는 자는 자연에 순종하고 있어 길잃을 걱정이 전혀 없어." (154-56)


"혼의 밑창에는 정의와 미덕의 타고난 원리가 있어, 그 원리에 비추어 우리는 자신의 격률과 상관없이 자기 행동과 남의 행동을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인데, 내가 양심이라 이름하는 것이 바로 이 원리지. 헌데 이 말에 대해 자칭 현자들의 아우성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어린 시절의 틀린 생각이니, 교육에서 오는 편견이니 하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어. 인간의 정신 속에는 경험에 의해 들어온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 우리는 무엇이건 얻어진 관념들에 비추어서밖에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한술 더 뜨거든. 모든 국민들에 보편적이고 분명한 이 일치를 그들은 감히 물리치고, 사람들의 판단의 뚜렷한 부합헤 반대해, 자기들만이 아는 애매한 어떤 예를 찾아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간단 말야. [...] 회의주의자 몽테뉴가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서 정의의 개념에 어긋나는 습관을 파내려고 쏟는 고생이 그에게 무슨 소용인가? 그가 가장 이름난 저술가들에게는 주기를 거부하는 권위를 가장 수상쩍은 나그네들에게는 준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인가?"(160-61)


: 위의 두 인용단락을 같이 볼 것.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및 <윤리형이상학의 정초>를 참고할 것. 이런 대목에서 루소가 칸트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분명해보인다. 존 로크가 <인간오성론>_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_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원적 원리innate principle 같은 것은 없다는 논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루소가 본능 및 양심을 거론하면서 경험론자를 비판하고 경험의 심급 이전의 층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떠한 원리를 정립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루소와 칸트 시대 윤리학이 성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그러한 '주어진 근본원리'를 믿는 것만으로도, '자연'에 따르는 것만으로도 객관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믿음이 가능했다는 데 있다; 이른바 계몽의 좋았던 옛 시절이다. 예정조화를 언급한 라이프니츠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손"을 꺼낸 스미스 또한 <도덕감정론>에서 매우 유사한 작업을 언급한다--곧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선으로 이끌게 하는 원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 자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선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함축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30여년 뒤 프랑스혁명의 추이에 따라 산산조각나고, 이른바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이론으로서의 고전파 경제학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맬서스에게 붙인 레테르에 따라) "음울한 학문"(the dismal science)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도덕감정이든 뭐든 선험적으로 선을 가능하게 하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원리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오로지 쾌락추구와 고통의 회피만이 삶의 목적이며 이성이란 그것을 계산하는 능력에 불과하다는 공리주의(효용주의)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출현한다.


"무신론이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화에 대한 사랑보다는 선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자기 서재에 가만있을 수만 있다면 만사가 어떻게 되건 자칭 현자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다. 그의 원리들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을 번식시키는 풍습을 파괴하고 그들을 인류로부터 떼어놓음으로써, 그들의 모든 애정을 국민에게도 미덕에도 해로운 은밀한 이기주의로 몰아넣음으로써,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을 막고 있다. 철학자의 무관심은 전제주의 국가의 평온과도 비슷하다. 죽음의 고요다. 전쟁보다도 더 파괴적이다.

 이리하여 광신은 비록 그 직접적인 결과들에 있어서는 오늘날 철학정신이라 불려지는 것보다 더 해롭더라도, 그 궁극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훨씬 덜 해롭다." (211f)

: 물론 루소가 '광신'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드러나듯 그가 복고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을 비판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자. 그가 무신론으로부터 목도하는, 끌어내는 필연적인 귀결은 극단적인 형태의 자유주의=이기주의=공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곧 도덕감정이든 선이든 (종교가 함유하는) 모든 가상들을 치워버렸을 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중요한 '실증적인' 인간이 태어난다. 오늘날로 돌아와서 자유주의가 휩쓴 뒤 다시금 (가상일지라도) 이념을 꺼내드는 사상가들의 출현은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오, 나의 친구, 나의 보호자, 나의 스승이여! 당신이 계속 갖고 있는 것이 제게는 가장 중요할 때 당신이 버리고자 하는 그 권위를 도로 가지세요. 여태까지는 저의 약함 때문에 그걸 가지셨지만, 이제는 저의 뜻에 의해 그걸 가지시게 되어, 제게는 더욱 신성한 것이 될 겁니다. [...] 저는 당신의 법칙에 따르고 싶고, 언제까지나 그러기를 바라며, 이는 저의 변함없는 뜻입니다. 설사 당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제 본의는 아닐 겁니다. 저를 저버리는 저의 정념들을 미리 막아 저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그 정념들의 노예가 되지 않게 막아주시고, 제가 저의 관능 아닌 저의 이성에 따름으로써 저 자신의 지배자가 되도록 강요해주십시오." (237)

: '자유'와 '복종'이 뒤엉키는 순간. 이는 어떤 면에서 '교양'의 완성지점을 보여준다(교양소설에 대한 고전적 저술인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_The Way of the World_가 여기에 대해 탁월한 사례분석을 수행한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칸트와 헤겔이 함께한다.


"자기 동포이기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는 자신을착하다고 깨닫기 때문에 자기와 가장 닮은 자들은 더구나 사랑하게 될 것이며, 또 도덕적인 일들, 착한 성격에서 말미암는 모든 일에 있어서의 취미의 일치에 의해 그 닮은 점을 알아보는 그는, 남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무척 기쁠 것이다. 그는, 남이 나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기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잘한 일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나는 기쁘다. 나를 존경해주는 사람들이 스스로도 존경받게 된다는 것이 나는 기쁘다." (265)


"전에는 역사에서 사람들을 그 정념에 의해 연구했듯, 지금은 사교계에서 사람들을 그 풍습에 의해 연구하는 그는, 사람 마음에 들거나 거슬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흔히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취미[goût]의 원리들에 관해 철학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를 통해 그에게 알맞은 연구이다.

 취미의 정의는 멀리 찾아가면 갈수록 더 길을 헤매게 되는 법이다. 취미란 가장 많은 사람들 마음에들거나 들지 않는 것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벗어나면 취미가 무엇인지를 영 알지 못하게 되고만다. 그렇다고 해서 안목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대다수가 하나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는 건전하게 판단하지만, 만사에 대해 대다수처럼 판단하는 사람들은 얼마 없으니까. 또 가장 보편적인 취미들이 합쳐져 고상한 취미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안목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으니까. 가장 흔한 선(線)들이 모여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은 얼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쓸모가 있으니 좋아한다든가, 해로우니 싫어한다든가 하는 것이 여기서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취미는 이해관계가 없거나, 있어도 재미 정도가 고작인 그런 사물들에밖에는, 그래서 우리의 필요와 관련되는 사물들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후자를 판단하는 데는 취미는 없어도 되고 욕망만으로 족하다. 취미의 순수한 결단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이, 또 그토록 엉뚱하게 만드는 것같아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취미를 결정하는 본능 말고는 그 결단의 이유가 따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또한 도덕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취미의 법칙들과 물질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취미의 법칙들도 구별해야 한다. 후자에 있어서는 취미의 원칙들이 전혀 설명되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모방에서 말미암는 것 모두에는 도덕적인 것이 끼어든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물질적인 것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아름다움이 설명되는 것이다. 만사에 있어 취미를 풍토나 풍습·정체·문물제도에 좌우되게 만드는 국지적인 규칙들이 취미에는 있다는 점을 나는 덧붙여두겠다. 나이·성별·성격에 말미암는 딴 규칙들도 있으며, 취미를 두고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뜻에서라는 점을 말이다.

 취미란 모든 사람이 타고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로 갖고 있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 있어 같은 수준으로 발달하지도 않아, 모든 사람에 있어 갖가지 원인에 따라 변하기 쉬운 것이다. 가질 수 있는 취미의 정도는 자기가 받은 감수성에 달렸다. 그 연마와 그 형태는 자기가 살아온 사회들에 달렸다. 첫째로, 많이 비교해보기 위해 많은 사회에서 살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놀이와 무위의 사회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의 사회에서는 기준이 기쁨이 아니고 이해관계이니까. 셋째로는, 불평등이 너무 심하지 않고 여론의 횡포가 대단치 않아, 허영심보다는 쾌락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반대의 경우에는 유행이 취미를 억눌러,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눈에 띄게 해주는 것을 구하게 되고 마니까.

 이렇게 되면 고상한 취미가 대다수의 취미라는 말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때 대다수에게는 이미 자신의 판단이라고는 없어진다.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생각에 따라서밖에는 판단하지 않게 되고 만다. 좋은 것보다는, 그들이 좋다고 인정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언제나 저마다가 자신의 생각을 갖도록 해주라, 그러면 그것 자체로서 가장 기분좋은 것이 언제나 대다수의 찬동을 얻게 될 것이다.

 일에 있어 사람들은 모방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취미의 진짜 본보기는 다 자연 속에 있다. 이 스승에게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그림은 더 뒤틀어진다. 우리가 자신의 본보기를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들로부터 끌어내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때여서, 기분이나 권위에 좌우되는 변덕스러운 아름다움이란 이미, 우리를 이끄는 자들 마음에나 들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만다.

 우리를 이끄는 자들이란 예술가와 귀족과 부자들이고, 그달 자신을 이끄는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나 허영심이다. 부자들은 자기네 재산을 과시하려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먹으려고, 소비의 새로운 방법들을 앞다투어 찾는다. 그래서 대단한 사치가 판을 치게 되어 얻기 힘들고 값나가는 것을 좋아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자연을 모방하기는커녕 자꾸 거역해야만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된다. 사치와 악취미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취미가 비싸게 먹는 경우 그 취미는 언제나 가짜인 것이다."(266-68)

: 취미에 관하여.


"나의 사귐들의 유일한 밧줄은, 서로의 애착, 취미의 일치, 성격의 부합이 될 것이다. 나는 부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귈 것이고, 사귐의 매력이 이해관계 때문에 상하는 것은 도저히 두고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부유해져도 얼마간의 인정이 남아있게 된다면, 나의 봉사와 선행을 멀리 펼쳐나가겠지만 내가 주위에 갖고 싶은 것은 궁정이 아니라 사교계이고, 졸개들이 아니라 친구들인 만큼, 나는 식객들의 주인은 되어도 그 패트런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주 평등이 나의 사귐에 아주 순진한 호의를 남겨줄 것이고, 의무도 이해관계도 끼어들 까닭이 없는 데서는 기쁨과 우정만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283)

: 우정에 관하여. 궁정과 사교계를 대립항으로 놓는 것 체크.



[국역본 3권]

제5부. [청년기의 마지막. 소피의 소개, 에밀과 소피의 만남 및 결혼까지.]


첫 부분의 남녀차이에 대한 설명은 명백히 이원론에 입각하여 여성을 남성을 보완하는, 그러니까 남성에 종속되는 형태로 그리고 있다. 상세히 인용하지는 않는다. 5부는 그외에도 서술자가 묘하게 자기 자신을 많이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념들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으로 갈라 한쪽에는 따르고 한쪽은 물리치려드는 것은 잘못이야. 정념들이란 우리가 지배할 때는 다 좋은 것이고, 지배당할 때는 다 나쁜 것이지. 자연이 우리에게 금하는 것은 우리의 애착을 우리 힘보다 멀리 펼치는 일이고, 이성이 우리에게 금하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일이고, 양심이 우리에게 금하는 것은 유혹당하는 일이 아니라 유혹에 지고마는 것이야. 정념을 갖고 안 갖고는 우리에게 달린 일은 아니지. 다만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어. 우리가 다스리는 감정은 다 정당한 감정이고, 우리를 다스리는 감정은 다 죄가 되는 감정이야." (182)

: 헬레니즘의 '자기 배려'에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정념의 지배와 덕성.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는 너는 그 의무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 일이 있니? 가장이 되면 국가의 구성원이 되게 마련인데,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를 너는 알고 있니? 정부가, 법률이, 조국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니? 네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살아가게 되어 있으며, 또 네가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니?" (188)

: 여기에서 자연인/개인과 공적인 삶(정부, 법률, 국가공동체)을 매개하는 계기로서의 결혼이 나온다. 고전적 교양소설 모델이 최종적으로 개인의 성숙을 결혼으로 이끌어 개인과 사회의 화해를 그려낸다면, 루소의 텍스트는 확실히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교양소설의 모델을 선취하는 면이 있다(그러나 그렇다면 <파멜라>_Pamela; or Virtue Rewarded_는?).


"무엇을 배우려면 여러 나라를 쏘다니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여행할 줄을 알아야 한다. 관찰하려면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알고자 하는 대상 쪽으로 그 눈을 돌려야 한다. 여행에서 책에서보다도 덜 배우는 사람도 많다. 생각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그래도 그들의 머리가 저자의 인도를 받지만, 여행에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볼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러는 배우려들지 않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통 없다. 그들의 목적은 전혀 달라, 배운다는 목적에는 아랑곳없다." (195)

: 이후 여행을 통한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인들의 성격을 설명한다. 루소의 화자는 에밀의 결혼 전에 그를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한 여행을 계획하고, 그곳에서 에밀이 무엇을 볼 것인지를 서술한다.


"관찰하기 전에 관찰을 위한 기준들을 만들어야 한다. 재는 것들을 대어볼 자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정치법학의 원리들이 바로 이 자다. 우리가 재는 것은 각국의 정치법들이다." (208)

: 민족과 사회의 탐구를 위한 최초의 기준. 이어 루소는 권력의 성격을 규명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임금이 뽑히기 전에도 국민은 국민일진대, 사회계약 아니고는 무엇이 국민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사회계약은 그러니 모든 시민사회의 기초이며, 이 계약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본질을 탐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계약의 본질 속에서다.

 이 계약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또 그것은 대체로 이런 문투로 표현될 수 있지 않겠는가를 우리는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재산과 몸과 생명과 온 힘을 공동으로 일반의지의 최고 지시에 맡기고, 각 부분을 전체의 갈라질 수 없는 일부로서 함께 받는다.

 이렇게 가정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용어들의 뜻을 정하기 위해, 이 결사행위가 각 계약자의 개체 대신, 집회가 갖는 투표수와 같은 수효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덕적인 집합체를 낳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공공체는 보통 정치체corps politique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그것은 또 구성원들로부터, 수동적일 때는 국가Etat라고, 능동적일 때는 주권자souverain라고, 같은 것들과 비교될 때는 권력puissance이라고 불려진다. 구성원들 자신에 대해서는, 집합적으로는 국민peuple이라는 이름이 붙고, 도시(국가)cité의 구성원이나 주권 참여자로서는 개별적으로 시민들citoyen이라고, 같은 주권의 복종자로서는 신민들sujets이라고 불려진다.

 이 결사행위에는 공공집단과 개인의 상호약속이 포함되어, 이를테면 자기 자신과 계약하는 셈인 각개인은 이중의 관계에 얽매이게 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겠다. 즉 개인들에 대한 주권자의 일원으로서의 관계와, 주권자에 대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관계에서." (211-12)

: 이후부터는 주지하다시피 루소적 사회계약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에밀>을 루소 사상의 가장 종합적인 저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한 국민의 특성과 풍습을 연구하러 가야 할 곳은 바로 이동이나 거래가 적어 외국인들의 여행이 적고 주민의 이동도 덜해 재산이나 신분의 변동이 덜한 외딴 시골들이다. 수도는 지나는 길에 보라, 그러나 그 나라는 먼 데까지 가서 관찰하라. 프랑스인들은 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뚜레느에 있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런던보다는 머셔에서 더욱 영국인답고, 스페인인들은 마드리드보다는 갈리시아에서 더욱 스페인인답다. 한 국민의 특징이 드러나 순수한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곳은 이런 동떨어진 곳들에서다. 통치의 좋거나 나쁜 결과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그런 곳들이다, 마치 보다 큰 반지름 끝에서는 호들의 비율이 더욱 정확하듯이.

 풍습과 통치의 필연적인 관계는 <법의 정신>에서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 관계를 연구하려면 이 저작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낫다. 그러나 통치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쉽고 단순한 두 가지 기준이 있다. 그 하나는 인구다.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서는 다 국가가 몰락해가는 경향이 있고, 인구가 가장 많이 느는 나라는 가장 가난하더라도 영락없이 가장 잘 통치되고 있는 나라다." (226) [다른 하나는 인구의 지역적 분포 정도. 루소는 인구가 고르게 퍼져 있을수록 국력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 시골에 대한 루소의 강조. 더불어 '인구'가 양적이고 또 공간적인 개념으로 파악되어 통치의 뛰어나고 못함을 따지기 위한 하나의 주요한 지표로 등장하고 있다. 맬서스 이전에 루소가 있었다는 걸 생각하기. <안전, 영토,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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