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율리시스>. 10장에 대한 노트: 시선과 시점의 문제.

Reading 2014. 10. 5. 19:08

원래 뒷부분에 더 써야 하나 일단 사고의 단초 자체는 마련해 놓았으므로 여기까지만 적는다.






<율리시스>(Ulysses) 10장: 부재하는 대상, 부재하는 시선

 

<율리시스> 10떠돌아다니는 바위들(The Wandering Rocks)에서는 무려 10명이 넘는 인물들의 삶이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10장은 제일 먼저 예수회의 존 컨미(John Conmee) 신부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해 총독 부부의 마차행렬 장면을 끝으로 총 19개의 크고 작은 대목들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중 앞서 나온 여러 인물들이 행렬의 배경으로 스치듯 언급되는 마지막 대목을 제외하고 총 18개의 크고 작은 일상을 다룬다(공교롭게도 <율리시스> 전체는 총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는 어느 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의식과 행동의 흐름을 좇지만, 사이먼 디덜러스(Simon Dedalus)와 카울리 신부(Father Cowley), 벤 돌라드(Ben Dollard)의 대화(Oxford World Classics 판 기준 234-36), 벅 멀리건(Buck Mulligan)과 헤인즈(Haines)의 대화(238-40)처럼 어느 한 인물의 의식에 중점을 두는 대신 여러 인물 사이의 대화 자체에 초점을 두는 대목들도 있다.

물론 조이스는 단순히 각각의 부분들을 나열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한 대목의 주연급이 다른 대목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 또는 단순한 배경으로 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각각의 시점(인물)은 서로 다른 시점(인물)을 자신의 시야에 포착한다. 예컨대 존 컨미 신부가 잠시 주목하고 곧 지나쳐간 상이군인("A onelegged sailor" 210)은 이윽고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적인 대목에서 다시 등장하며(216), 10장의 후반부 멀리건과 헤인즈의 대화 대목에 스치듯 지나가는 배경처럼 다시 한 번 언급된다(239). 아마 여기서 한 세기 전 본격적으로 인물의 재등장기법을 활용했던 발자크(Honoré de Balzac)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에 등장했던 라스티냑(Eugène de Rastignac)과 보트랭(Vautrin)<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에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소설들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바와 같이, 10장에서 조이스는 여러 인물들이 서로를 향하게 함으로써 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하나의 사회를 구축하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이러한 기법적인 공통점을 조금 더 생각해보자. 19세기 리얼리즘 소설 전통(이런 것을 이렇게 쉽게 지칭할 수 있다면)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특성 중 하나는 어떠한 세계나 사회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욕망이다. 이러한 목표를 가장 원대한 야심을 품고 직접적으로 천명했던 발자크를 제외하고라도, 디킨스(Charles Dickens)의 런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영국시골처럼 소설가와 그가 재현하는 특정한 사회-시공간이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맞닿아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심지어 발자크적인 플롯 구축에 가장 적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경우에도 우리는 권태로운 시골사회와 동떨어진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이나 혁명 전후 파리를 뺀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욕망은 더블린이라는 공간을 도저히 뺄 수 없을 것 같은 <율리시스>에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19세기 유럽소설 전통에 비추어볼 때 조이스가 갖는 상이함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고리오 영감>에서 발자크는 소설의 첫 부분을 라스티냑이 이제 새로이 세 들어 살게 될 파리의 한 하숙집에 대한 극도로 꼼꼼한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디킨스의 <블리크 하우스>(Bleak House)는 지독할 정도로 안개로 뒤덮인 런던에 대한 묘사가 그 서두를 차지하며, 런던이 아닌 한 공장도시를 배경으로 한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서 총천연색의 강물과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그려내는 대목은 아마도 산업혁명과 관련해 디킨스에게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루카치가 근엄하지만 살짝 미소를 띠고 바라볼 19세기 유럽소설 전통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율리시스>10장으로 돌아오면 무언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질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곧바로 말하자면 조이스가 복수의 시선들을 중첩해 만들어낸 세계에는 19세기적 공간혹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없다. 우리는 더블린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떠올릴 수는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더블린의 교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건물의 기둥이 몇 개인지 등등에 대한 (물질적인) 공간에 대한 인상을 받을 수는 없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부재가 곧바로 세계를 재현하려는 소설의 사명(물론 이러한 사명19세기의 몇몇 국가에 특유한 것일 뿐임을 먼저 지적하자)을 회피하는 일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기 전에 한편으로 부재하는 것의 빈자리를 무엇이 대체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이 글의 앞에서 살핀 바를 기억한다면 조이스가 자신의 텍스트에서 어떤 사회 혹은 마치 하나의 사회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감각 자체를 방기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독립된 때로는 거의 파편적으로 보일 정도의 시선, 인물, 의식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목들이 병렬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 대목들은 서로 간에 시선을 교환함으로서 각각의 대목이 단순히 주관적인 망상 혹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될 수 없도록 붙들어준다. 조금 추상적으로 말해보자면 일종의 시선들 사이에 일종의 상호인정(inter-recognition)이 존재하며 이 상호인정들이 하나의 사회와 같은 가상’(schein)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설이 그려내는 대상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에만 몰두하는 대신 이러한 대상들의 성격이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를 함께 질문해야 한다. 앞질러 나가자면, 19세기 서유럽의 리얼리즘 소설 전통에서 세계구축/묘사는 세계의 외관에서부터 인물의 내면까지를 포괄하는 서술자의 시선을 요구한다. 곧 그 소설 내에서 여러 인물들이 제 아무리 상이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그들 및 그들이 사는 세상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시점만 존재한다면 이 모든 요소들을 총체적인 사회상으로 종합시키는 것은 오로지 기술적 숙련의 문제일 뿐이다(어떤 면에서 19세기 소설 전통과 20세기 소설 전통 사이에 있는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러한 숙달의 정점이자 동시에 기술적 숙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통합하는 시점의 문제를 <율리시스>10장에 질문해보자. 분명 이 소설의 곳곳에 전지적 작가시점이 사용되고는 있으나 19세기 리얼리즘적 전통과는 상이함을 알 수 있다. 개개 인물의 내면을 아주 디테일하게, 마치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확대시켜보는 것처럼 진행되는 서술은 있지만, 인물들 및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포착하고 종합하는 형태의 거대한서술자를 조이스가 활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특히나 10장과 같은 경우에서 서술자가 갖는 시선으로서의 성격의 독특함은 두드러진다. 마지막 대목에서 특정한 인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전체를 그려내는 시점을 취하지만, 이때도 실제로는 거리를 찍는 사진사처럼 거의 군중 스케치에 가깝게 인물들을 나열할 뿐 10장 전체적으로 조이스는 사회 자체를 직접적으로 포괄하고 그려낸다는 의미에서의 전지적 시점을 형성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것처럼 공간 혹은 세계 자체에 대한 묘사를 인물/개별 시점의 상호인정이 대체한다고 할 때 이는 동시에 만사를 포괄하는 시점 자체를 채택하지 않고 이를 개별 시점들을 엮어내는 방식으로 대체함을 의미한다. 즉 한편으로는 세계를 지각하는 단위 및 방식이 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으로 하강함과 동시에, 서로 다른 개별적 의식들의 연결망이 사회를 재현하는 새로운 장치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전환 혹은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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