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크하이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 읽고 정리.

Reading 2014.09.09 01:19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의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 / "Traditional and Critical Theory") 영역을 읽었다(이 텍스트는 Horkheimer, Max. _Critical Theory: Selected Essays_. Trans. by Matthew J. O'Connell. NY: Seabury, 1972. 에 수록되어 있다). 비판이론과 프랑크푸르트 1세대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살펴보지 못한 게 걸리던 차(나는 아직 블로흐, 호르크하이머, 존-레텔의 책을 1권씩 읽었을 뿐이다...프롬은 너무 어릴 적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뭔지도 모르고 읽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추천을 받았고 짬이 되는 김에 읽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전에 <도구적 이성 비판>(_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_) 국역을 읽어보았을 뿐이다(논문을 쓰기 전에 읽었다면 특히나 공리주의-정치경제학에 대한 내 입장을 조금 더 분명하게 잡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급한 대로 구글에서 영역본 파일을 찾아서 읽었다. 5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인데, 아마 pdf를 ocr 돌려서 워드로 옮겨서인지 부분부분 표현이 수상쩍은 지점들이 있다. 독일어를 영어로 옮긴 텍스트 답게 문장은 제법 까다롭다(어휘는 의외로 그렇게 걸리지는 않았다). 영어로 비판적 사유를 진행하는 글을 오랜만에 읽어서 뒤로 갈수록 뇌에 과부하가 걸려 힘들었다. 물론 호르크하이머의 기본적인 입장이 있고 이 글은 그 입장을 계속해서 변주하면서 전진하기 때문에 사실 주장의 중심만 파악하고 있다면 이해 자체가 어려운 글은 아니다. 아래의 글은 뇌가 과부하된 상태에서 새벽까지 졸음을 참아가면 억지로 1회독 한 후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쓴 글이라, 그렇게 깊은 수준의 정리는 못 된다는 걸 감안해주길 바란다.


 아도르노를 읽을 때도 어느 정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비판이론은 그것이 무엇과 적대하는가를 먼저 살필 때 좀 더 선명해진다. 호르크하이머의 글은 '전통 이론'의 핵을 이루는 근대 과학/철학의 근본전제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주제를 구성하는 명제proposition을 어떠한 모순 없이 총합sum-total한 것이 동시대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이며(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 이러한 '방법'의 기원은 당연히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하는 근대 철학에서 나온다. 철학에서는 J.S. 밀이나 현상학자들이 이러한 계보에 속하며 후설Edmund Husserl의 <논리 연구>_Logische Untersuchungen_가 이 논문이 집필된 1937년의 시점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론은 모순이 결여된 조화Harmony, 상징들의 순수하게 수학적인 체계a purely mathematical system of symbols를 지향한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흐름 자체에 비판을 가하는 대신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기원한 두 가지 형태의 사회이론으로 논의를 전환한다. 하나는 허버트 스펜서 이래의 (영미식) 경험주의적 사회이론, 다른 하나는 (독일이 주된, 그러나 뒤르켐도 포함된) 관념적/추상적 사회이론이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두 경향 모두 (이론의 실천적 가치를 논외로 하는) 자연과학의 정신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말한다; 첨언하자면 이러한 전술, 곧 두 대립되는 항이 공통적으로 기대는 지반을 지적한 뒤 그 기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는, 3번째 항을 제시하는 논법은 아도르노의 실증주의/현상학(하이데거) 비판에서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매우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철학의 현재성"Die Aktualität der Philosophie 및 <사회학 강의> 등을 참고). 17세기 코페르니쿠스적 체계에서부터 실증주의/실용주의 및 신칸트학파에 이르는 정신과 부르주아적 노동분업의 모티프를 연결시키는 호르크하이머의 진술은 다소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흥미롭다(물론 그는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과 20세기의 실증주의자들의 차이는 지적한다); 뒤이어 언급하겠지만, 1937년이라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적 학문이라는 표현 자체가 경멸적이고 비판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음은 염두에 두자.


 상기한 학적 전통에서 "앎의 주체"knowing subject를 독립적인 인식주체로 상정하고, 그에 따라 이러한 주체 또는 (칸트적인) 인지구조에 수용되는 세계에 대한 앎의 '객관적인' / 불변의 지식이 획득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호르크하이머는 '역사'를 도입하면서 주체-객체의 분리된 불변성을 비판한다. 곧 우리가 '자연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세계-사회 자체가 인간 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산물이며,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인지 구조 또한 그러한 세계로부터 유래한 역사적 산물이다(후자의 논의는 후에 존-레텔에게서 보다 급진적인 형태로 다루어진다...<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볼 것). 곧 주체-객체는 양자가 서로의 영향을 받는 역사적 산물로서 (호르크하이머는 이 표현을 아주 아껴 사용하지만) 변증법적 운동 안에서 뒤얽혀 있다. 상술하지는 않겠지만, 호르크하이머는 이 비판이론의 시선에서 지각-측정도구measuring instrument의 문제, 도구와 인체기관human organ의 뒤얽힘, 칸트 철학에서 물자체의 불확실성과 부르주아 경제의 불확실성 간의 상동성, 칸트와 헤겔의 관계, 철학/연구자와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의 관계 등을 짤막하지만 요점을 담아 풀어낸다--오늘날은 아주 새로운 시선은 아니지만, 나름의 논리의 힘이 있다. 연구자 본인을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 안에서 읽는 것은 통속적이지만, 연구자의 개념적 도구 자체를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시각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여전히 배울 게 있는 면이다. 참고로 이 시기의 호르크하이머에게 비판 이론의 '비판'은 곧 정치경제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 곧 맑스주의적 뉘앙스와 불가분에 있음을 지적해두자(206쪽 각주 14).


 칸트와 헤겔, 혹은 양자의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경향과 공동체-보수주의적 경향 양자를 함께 비판하는 것 또한 이항대립을 삼항조의 구도로 바꾸는 비판이론의 장기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예컨대 개인을 '자율적 자아'autonomous ego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관점과, 개인이 어떠한 '정신적 핵'(절대지가 됐든 민족국가가 됐든)의 표현expression형으로 간주하는 우파 이데올로기 양자의 대립구도는(210) 호르크하이머 동시대의 사회 이론 간의 갈등으로 또 이어진다. 즉 '객관적으로 확인가능한 사실'인 개인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총합을 사회로 간주하는 경험주의적 입장('전체는 부분의 합이다')과, 개인을 초과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로부터 출발하는('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관념적 사회이론 간의 갈등이 있다면, 호르크하이머는 양자에게서 시간성 혹은 역사적인 시점이 부재함을 비판한다. 물론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지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파시즘과 같은 우파 이론에서 말하는 모순없이 포괄적인 총체성, 또는 주체와 객체의 '화해'와 같은 모멘트는 상품교환의 원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현재에 주어져 있지 않으며 그러한 모순의 계기를 극복한 미래에나 가능한 (아도르노의 용어를 가져온다면)가상schein일 뿐이다(시간, 미래,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로는 에른스트 블로흐, 국역된 텍스트로는 <희망의 원리>를 참고하라).


 여기까지가 '전통이론'으로서의 근대 부르주아 사회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아마도 호르크하이머의 논문에서 가장 논쟁적으로 읽힐 부분은 영역본 213쪽에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전통이론', 즉 고전적 맑스주의의 혁명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일 것이다. 요점은 '전통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주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필연적인 사실이었다면, 비판이론은 특정한 사회조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주체가 되기 위한 '올바른 지식'correct knowledge을 반드시 획득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건전한 인간오성"healthy human understanding의 존재를 순진하게 받아들일 뿐이며 비판이론은 그것을 불변의 소여로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조건들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이 암묵적으로 서구 맑스주의의 출발점이었던 루카치와 이후 구좌파로 불리게 될 이들을 겨냥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호르크하이머의 설명을 추가적으로 옮기는 대신 1937년의 이 대목이 유럽의 비판적 사회이론의 역사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전환으로 등장하는가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곧 호르크하이머의 이론적 '교정'은 이미 왜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승리했는가를 곱씹고 있던 그람시와 함께 네오-맑스주의Neo-Marxism의 문을 열어놓으면서 사실상 1960년 대 이후 유럽의 신좌파들이 마주치게 될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한다. 이 질문을 죽을 때까지 곱씹었던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문제는 다음의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는가"(<부정변증법 강의>)? 무엇이 혁명주체가 될 운명이었던 이들을 가로막았으며, 프롤레타리아들은 왜 혁명주체가 아닌 민족국가 또는 더 최악의 경우 파시스트 대중동원에 이끌려 갔는가?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이론'의 역사적 진행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은, 특히 서유럽의 좌파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 질문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한다는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중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예술=영화의 잠재력을 믿었던 이(벤야민)와 대중을 조종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서의 대중문화를 목도한 이(아도르노)의 간극이 있다. 먼저 이 질문을 유발한 사태와 강제로 맞닥트려야 했 프랑크푸르트 1세대는 물론이고,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해명하려 했던 알튀세르, 국가권력과 통치성, 주체화에 대해 계속해서 캐물었던 푸코와 같은 프랑스 신좌파는 물론이고, 가장 反이론적 성향을 보여주었던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 계급을 주어진 경제적 조건이 아닌 관계로 사유하거나(E. P. 톰슨) 민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홉스봄, 베네딕트 앤더슨)로 나아가게 된 사실 또한 예외는 아니다(이탈리아의 자율주의자들은 아직 내 시야에 들어와 있지 않다).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혁명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혹은 그렇다고 알려진) 루카치와 경제/생산력결정론에 매몰된 구좌파들이 지나치게 순진하게 보이는 것은 대중정치의 역사적인 흐름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데서 당연하다(이 문제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관점은 다음 글을 참고. 군 시절에 썼던 글이라 지나치게 축약된 표현 및 검열을 피하기 위한 우회적인 표현들이 섞여 있는데, 대략의 논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http://begray.tistory.com/49). 여튼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호르크하이머가 추가적으로 제시하는) 지식인의 문제, 계급 내의 분할과 같은 추가적인 질문들이 배태됨만을 이야기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이라는 시점을 한번 더 강조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아직까지 비판이론을 통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믿음 또한 이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했듯 주체와 객체의 화해가 미래의 과제라면, 이러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항으로 주체의 저항이 언급되며, 비판이론은 이러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다. 호르크하이머는 논문의 후반부에서 비판이론의 성격 및 비판이론의 관점에 의한 사회비판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사회의 '내적 역학'inner dynamics으로서의 교환원리를 추출하여 그로부터 유럽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확장을 설명한다거나. 이러한 설명에서 논리적 필연성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이 마찬가지의 시각을 공유하나, 핵심은 전술한 바와 같이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대략의 진술은 사실 논문의 전반부에서 제시된 것과 큰 차이는 없으나, 호르크하이머가 고전적 자본주의와 후기 자본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은 한번 정도 읽어볼 만 하다. 자유주의 시기에 법적 소유권/사적 소유가 중요했다면 후기자본주의, 즉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법적인 소유자가 아닌 자본의 거대한 결합체의 '관리'management(235)가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법적 장치의 기능 또한 변화한다(어쨌든 이 대목에서 푸코 혹은 알튀세르적 장치를 비교항으로 떠올려도 아주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환과 함께 이전의 소유권 또는 법적 관계는 점차 무력화되며, (사적 소유자로서의) 개인의 상대적인 독립 또한 취약해지고, 경제적인 것에 대한 문화적 요소의 의존 또한 보다 '유물론적'materialistic이 되어 경제적 요소들이 개인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침투한다. 이러한 시기에 이론의 논리 또한 변모하며 호르크하이머는 야만으로의 퇴행에 맞서 비판이론이 어떠한 성격을 가져야하는가를 설명한다.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급한대로 영역본에 기초해서 옮겨본다).


"[...] 그러나 사유하는 이의 행위의 특유의 목적은 그것이 무엇을 성취하고 또 기여할지를 대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며, 이는 파편화되지 않은 총체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 자체의 본성이, 그러므로, 그것을 역사의 전환과 인간 사이의 정의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사회 정신'과 '민족 공동체'를 향한 시끄러운 요청 뒤에 개인과 사회 간의 적대는 그 어느 때보다 커진다. 학문의 자기인식은 그 어느 때보다 추상적이 된다. 그러나 사유의 순응과, 사유란 고정된 소명이자 전체로서의 사회 내에서 자기 폐쇄적인 영역이라는 집착은, 사유의 바로 그 본질을 배반하는 것이다."

... Yet the characteristic mark of the thinker's activity is to determine for itself what it is to accomplish and serve, and this not in fragmentary fashion but totally. Its own nature, therefore, turns it towards a changing of history and the establishment of justice among men. Behind the loud calls for "social spirit" and "national community," the opposition between individual and society grows ever greater. The self-definition of science grows ever more abstract. But conformism in thought and the insistence that thinking is a fixed vocation, a self-enclosed realm within society as a whole, betrays the very essence of thought. (242-43)


8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야만으로의 퇴행이 다시 한번 고개를 쳐드는 지금, 호르크하이머의 말은 아직도 강한 울림을 갖는다. 특히나 극우파들의 퇴행적인 집단행동 직후의 시점에서 사유와 비판의 가치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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