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미학강의1>. 6강 일부 인용 및 코멘트.

Reading 2014. 6. 15. 14:19

"이른바 미적인 해석이라고 말하는 작업들에서는 미적인 해석들이 현재 생산되는 예술 앞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미적인 해석들은 이른바 현대 예술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비교적 오래되고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명료하며 그 결과에 따라 예술을 해석할 수 있으며 전통적 예술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면서 조용히...[sic]해석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확산되어 있는 견해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 생각을 접맥시킬 수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예술이 진리의 전개라고 어느 정도 독단적으로까지 말한 바 있으며, 이것을 여러분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헤겔이 말하였듯이, 예술이 정말로 진리의 전개라는 견해를 우리가 갖고 있다면, 이것은 예술의 진리 내용이 스스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미 창조된 예술작품들의 내용은 정적인 내용이 아니며, 어떤 고정적인 것, 사물적인 것으로서 항상 동일하게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의 내용은 스스로 변신을 거듭하며 어떤 확실한 도약까지 성취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도약에서는 그 어떤 것은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전혀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비교적 오래된 작품들을 새로운 작품들보다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적인 작품들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그 생각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불안이거나, 놀이 규칙과 갈등관계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거나, 또는 예술에 대한 사물화된 관계일 것입니다. 사물화된 관계는 이미 법전처럼 편찬되어 있는 예술작품들과 생동감 있는 관계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예술작품들에만 해당됩니다. 내 견해를 매우 극단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가장 난해하고 가장 복잡한 동시대의 작품들이 더욱 깊은 의미에서 볼 때는 동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과거의 단순한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견해를 말하고자 합니다. 과거의 예술작품들은 항상 감정이입이라는 우회로와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작품들은 영혼의 상황에 대한 구성,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인 역사철학적으로 확고한 공식의 재구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흐의 작품이 교회에서 정돈된 신앙심과 경건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특정한 배열 관계에서 그 내용을 갖는 것이 맞다면, 이러한 내용을 정말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그러한 영혼의 상태로 어느 정도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낭만주의도 예술작품의 내용을 이렇게 파악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낭만주의는 작품내용을 이렇게 파악하면서 예술적 종합주의에 문을 활짝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레즈의 작품처럼 매우 어려운 현대적 작품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바흐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레즈의 작품을 사실상으로는 오래된 작품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적절하게 이해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초기 루카치가 말했던 "선험적 장소"의 동일성, 즉 경험의 선험적으로 주어진 내적인 전제 조건들이며,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불레즈의 작품과 같은 현대 작품과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래된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이해는 끝을 모르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문학사에서 과거의 유명한 작품들을 '흠모'하면서 일종의 교양의 우회로와 같은 방식으로 자체적으로 의문투성이인 개념인 '미적 즐김'으로 표시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생깁니다....문학사에서 그렇게 시도하는 이유는 과거의 유명한 작품들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과거의 작품들은 통례로 볼 때 즐길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문학사에서 보이는 이러한 관점에 표명되어 있는 모든 견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 제기되는 미적인 물음들에 대한 포착이 의미를 갖고 가장 나쁜 의미에서 단지 대학 강단에서나 고리타분하게 언급되는 문제로만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시대에 고유한 의식 상태와 일치하는 포착은 가장 진보적인 예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그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들에서 보이는 황금률 조각 방식에 이미 주문이 되어 있으니 그 방식에 따라 작품을 측정하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학강의1> 6강 135-37.



 길고 까다로운 내용이 문단구별도 없이 (참고로 내 인용한 부분은 그 문단의 중간에서부터 시작한다) 죽 이어져 있으니 읽기에 쉽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부분부분이나마 곱씹으며 숙독할 만 하다. 비평 혹은 연구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까지 반성되지 않은 지점이 적잖이 발견되며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어깨를 붙잡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자기반성에서 완전한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심지어 아도르노의 사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확실히 아도르노의 사유는 이해하기에 까다롭다. <미학강의1>을 읽으면서도 내가 예상했던 정도보다 무척 자주 읽기를 멈추고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며 생각을 해도 분명하게 납득이 되지 않는 지점들이 적지 않다. 아직 헤겔의 미학을 읽지 않은 탓도 크겠지만, 어차피 사상가의 사유를 따라가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그가 전거로 삼고 있는 텍스트를 먼저 살피고 삼키는 과업은 사유를 따라가는 과정과 동시에 행해져야 할 일이지 먼저 에피타이저를 먹고 본 요리를 먹는 식으로 진행될 수는 없다. 읽으면서 따라가야 하지 그와 같은 높이까지 먼저 올라가서 시작해야 한다는, 또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결벽증적이고 순진한 태도는 어떠한 지적인 진전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람들 중의 하나로 아도르노를 거론할 때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해하고 읽는지 질문받는 때가 있다.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를 한번에 전부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지점에서 공감하는 모티프를 그의 사유에서 맞닥트리는 일에서부터 그를 '읽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논문을 위한 읽기에서처럼 내 주장에 필요한 내용만 골라내는 '동일성의 읽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예술작품 자체가 그러하듯 읽기 또한 정적인 경험이 아니며 독서가 진행될수록 독서의 주체 자체를 바꾸어 나가야만 한다--독서과정에서 주체는 진동하고 변모한다. 내 경험에 새겨져 있는 모티프가 그의 사유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나아가고 또 반성되는지를 보면서 점차 그에게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지점들을 점차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가장 작은 모티프에서 출발해 이 사람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면서 나 자신의 사고과정을 확대시키고 스스로가 자명하게 전제하고 있던 태도들에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도르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미메시스'mimesis, 즉 대상을 모방하는 과정을 나는 읽기와 사유의 과정에서 어느덧 자연스럽게 실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를 조금씩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미메시스 혹은 타자=객체=대상을 가장 깊은 지점에서부터 모방하면서 그를 이해하려는 과정은 지금도 나에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독서의 윤리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지침 중 하나로 남아있다; 특히나 사유 자체를 기록한 텍스트들을 읽을 때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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