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 / 피터 브룩스.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Reading 2014. 6. 10. 01:49

스티븐 내들러Steven Nadler의 스피노자 전기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_Spinoze: A Life_ 국역본(김호경 역, 텍스트, 2011; 원서는 1999는 Cambridge UP에서 출간)을 읽었다. 현재 UWM(Univ. of Wisconsin-Madison)에 재직 중인 내들러는 <에티카를 읽는다>_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_가 같이 국역이 되어있고, 찾아보면 modern Jewish Philosophy 에 대한 개설서 및 early modern philosophy 나 말브랑슈Malbranche에 대한 연구서도 쓰고 편집을 맡았다(아예 UWM Center for Jewish Studies 센터장이다...). 쉽게 말해 스피노자와 17세기 유럽철학, 그중에서도 유대철학("근대유대철학"modern Jewish Philosophy이라는 표현이 쓰이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전문가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 전기의 Thanks to 리스트에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cois Moreau의 이름이 들어있다. 마트롱의 텍스트 국역본 부록 중에 책이 출간되고 30여년 뒤 마트롱이 후배 연구자들과 대담하는 내용이 실려있는데, 모로도 (마트롱의 자장 안에서 연구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대담자로 참여한다. 프랑스와 영미권의 스피노자 연구가 어느 정도 연결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려나?


텍스트는...나는 스피노자의 다른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내들러의 책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내들러의 전기를 먼저 읽고 스피노자 읽기를 시작하면 더 얻는 부분이 있으리라 본다. "스피노자의 가장 완전한 전기"라는 광고문구가 결코 허당이 아니라서 실제로 스피노자가 쓴 책들을 읽을 때 참고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적지 않게 있다. 예컨대 나는 홉스와의 유의점만 생각하면서 <신학정치론>(특히 성경에 대한 해석론)을 읽었으나, 내들러의 책을 먼저 읽었다면 의미심장하게 보았을 구절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내 예상보다 데카르트주의의 침투에 저항하는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종교적 상황이 꽤나 험악했다는 것과 사실을 포함해,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과 <에티카>를 쓰면서 무엇을 타겟으로 삼았는지(<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의 가까운 지인을 결과적으로 살해한 종교적 반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의도한 것이다), 당대의 사상적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텍스트가 어떻게 읽혔고 또 어떤 함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들러는 꽤나 유용한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내들러의 스피노자 전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흐름이다. 독자를 제일 먼저 당혹하게 만들 것은 (매우 상세한) 유대인 공동체의 형성 및 생활에 관한 역사다. 나는 이 텍스트를 읽기 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교재판소가 공식적으로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처벌하고 추방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활동이 매우 왕성해 반유대주의를 피해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스페인과 뒤이어 포르투갈을 탈출할 정도였는 줄은 몰랐다. 본래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스피노자의 집안 또한 이베리아 반도를 탈출해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에 대규모로 정착한 유대인들에 속한다.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고 거주한 유대인들 또한 이베리아에서 온 세파라디 유대인과 동유럽에서 온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이 구별된다. 여튼 그들은 전 유럽을 휘몰고 있던 반유대주의를 피해 네덜란드에 정착하면서 원 거주민들에게 자신들이 매우 협조적이고 질서정연한 집단임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결과적으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랍비 및 마아마드(세속적인 지도자 집단)의 엄격한 태도 및 강력한 권력행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17세기 전반에 걸쳐 네덜란드가 처해 있던 국내외 정치-경제적인 상황이다. 주지하다시피 무역을 통해 성장해나갔으며 (이 흐름에 편승해 유대인 상인들이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할 수 있었다) 짧게나마 유럽패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네덜란드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등과의 관계에 따라 경기의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7세기 초-중반에 걸쳐 스페인,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며, 이는 곧 네덜란드 각 주 내의 정치경제적 정세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내의 정치적/종교적/사상적 갈등의 향방에 주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보다 보수적인 칼뱅주의자들과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으며, 이들의 갈등국면이 어떻게 전개되냐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스피노자의--그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이단적인 이론으로 인해 헤렘(파문, "진멸")을 당한 후 그에게는 항상 무신론자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관심사가 진리와 공동체의 문제를 포함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두 번째 항목과 연결지어 내들러는 당대 데카르트주의와 자연철학적 논의들이 어떻게 발전/수용되었고 그것이 스피노자의 입장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개설 수준에서나마 상세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더욱 강하게 읽어나간) <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통해 최초로 주목받는 학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유대인 공동체 바깥에서 데카르트 철학 및 기타 자연철학/과학을 배웠고 또 가르쳤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칸트 이전의 다른 근대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학업은 오늘날에 굳어진 철학과 과학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신학정치론> <정치학논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가 홉스나 그로티우스, 마키아벨리와 같은 선대의 인문주의 전통을 충실히 습득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스피노자 본인이 청년기까지 교육받은 유대적 지식(특히 성서에 관한)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지적 배경이 네덜란드를 떠나지 않았던 스피노자로 하여금 영국 및 독일, 프랑스 등에서 활동하던 다른 지식인들과 계속해서 교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개설적인 설명들을 제공한다. 텍스트의 8장부터 10장까지는 찬찬히 읽어두면 좋다(특히 10장 "호모 폴리티쿠스"는 <신학정치론>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 12장의 일부분은 <정치학논고>를 읽을 때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좋은 책이라는 건 분명한데, 번역은 안 읽히진 않지만 조금 아쉽다. 부분부분 (영어문장을 떠올리며 읽는 게 좋을) 어색한 문장이 보이고, 번역어는 기존 역어랑 조금씩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이 내들러의 책을 번역한 <에티카를 읽는다>에서 번역어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역자가 몇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을 충실히 살리려 노력한 것은 좋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을 따로 정리해서 간단한 참고자료를 만들어 두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부제인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는 전혀 내용과 맞지 않는다. 출판사가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모르겠는데, 종교를 도발한 철학자라면 차라리 내용과 맞겠지만 내들러의 전기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기존의 철학적 입장들과 어떻게 충돌하는지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국역본 표지 뒤에는 니체, 헤겔, 맑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로부터 영향받은 사람들의 목록을 적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막상 책 내용은 스피노자의 영향사를 전혀 그려내지 않는다(나는 조지 엘리엇에 대한 항목이 나올까 헛되이 기대한 사람이다...). 이런저런 점에서 국역본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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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룩스Peter Brooks.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발자크, 헨리 제임스, 멜로드라마 그리고 과잉의 양식>_The Melodramatic Imagination: Balzac, Henry James, Melodrama, and the Mode of Excess_. 국역본(이승희, 이혜령, 최승연 역, 소명출판사, 2014)을 읽었다. 원저는 본래 1976년에 나왔고(Yale UP) 1995년에 새로운 서문을 덧붙여 다시 나왔다. 국역본은 1995년판을 기준으로 번역했다. 번역의 질은 솔직히 좋지 않다. 공역이라 들쭉날쭉한 것도 있고, 역자들이 서유럽문학사를 잘 몰라서인지 고유명사를 엉터리로 번역하는 부분들이 제법 있다.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를 "책커리"라고 쓴 부분은 ㅆ와 ㅊ가 구별되지 않는 일본어 중역을 의심케 한다...쇼데를로 드 라끌로Choderlos de Laclos를 코데를로스 드 라클로스라고 쓰는 것도 좀 어이가 없고. 기본적으로 역자들이 한국어를 그렇게 잘 하지 않아서 조금만 구문이 복잡해도 영어문장을 떠올리거나 원문을 대조하면서 읽는 게 낫다. 세미나에서 급하게 읽는 게 아니었다면 그냥 원서를 읽었을 거다. 대략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지만 좋은 번역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의향은 없다. 


폴 드 만의 제자이기도 한 브룩스 본인이 지금은 (서사이론을 포함해서) 워낙 거물이고 이 책도 <플롯 찾아읽기>_Reading for the Plot_과 함께 그의 주저에 속해서, 책 자체는 문학/문화연구자들이 일독할 가치가 있다. 브룩스는 여기서 먼저 "과잉의 양식"("양식"mode이라는 단어가 무게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맑스에게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 갖는 의미를 떠올려보자)으로서 멜로드라마를 정의한 후 대중적인 극양식/표현양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가 프랑스 혁명 이후 급속히 세속화되면서 "신성함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을 상실한" 유럽에, 특히 프랑스의 대중예술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멜로드라마 혹은 멜로드라마적인 것의 (역사적인) 성격을 해명하는 작업과 함께 브룩스는 이것이 단순히 대중적인 극예술에서 뿐만이 아니라 발자크와 디킨즈, 제임스와 같은 서구근대문학의 정전들에도 어떻게 선명히 드러나는지를 밝힌다. 저자의 작업을 70년대의 맥락, 곧 한창 정전의 재구성 및 재독해가 초점으로 떠올랐을 시점과 연결시킨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적인 것을 다시 끌고 오는 브룩스의 전략이 1) 대중예술의 양식으로서 멜로드라마를 서구 근대를 형성하는 역사적 자장의 산물로서 "역사적 산물"/"의미있는 것"의 위치에 올려놓고 2) 서구의 문학정전들이 이전 및 동시대의 대중적인 예술양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히며 3) 낭만주의-사실주의-근대문학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서구근대문학의 목적론적인 역사서술을 무너트리는 것을 의도한다고, 혹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겠다("19세기 리얼리즘"을 문학사의 중심에 놓는 서술에 대한 비판으로 우리는 리얼리즘VS모더니즘 논쟁을 다시 참고하여 비교할 수 있으리라).


브룩스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역사적 맥락을 간략하게 보충한다. 주지하다시피 인문주의-계몽의 시대(17-18C)를 거쳐 질서 및 공적인 것을 상징하는 두 가지 영역, 곧 종교와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이 (철학, 과학, 정치철학 등을 선두로) 가해진다. 이러한 공격이 폭발한 것이 프랑스혁명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초월적인 것의 현실화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던--로베스피에르가 몰락 직전에 최고 존재를 숭상하는 이성종교의 제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프랑스혁명의 몰락 및 실패와 함께 사실상 인식론적/윤리적 차원에서 진/선을 담보하는 계기들은 더 이상 순진하게 신뢰받을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서구 근대의 정치-경제적 전환을 이끌었던 영국 및 프랑스 모두에서 경제적인 삶이 급속도로 강조되어 갔으며 양국 모두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경제 전 영역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혁명의 시대"). 브룩스는 멜로드라마 및 고딕소설이 (낭만주의의 후계자로서) 이전 시대에 비판받고 파괴된 질서의 잔여물들을 보존하고 표현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더 이상 순진한 형태로 신뢰할 수 없게된 윤리/덕성을 "표현"하고 청중/독자들에게 "인지"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기법적으로 극단적이고 과장된 "과잉 양식"mode of excess을 채택한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이것이 극단화되어 루소와 디드로에게서 볼 수 있었던 "침묵"muteness의 강조, 즉 기존의 오염된 언어 자체를 배격하고 제스처와 침묵, 동물 등과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멜로드라마에서 "미덕"virtue 혹은 "도덕-감정"moral sentiment은 그 존재가 당연하지 않은만큼 더욱 더 "과장된 양식"으로 "표현"되어 청중/독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는 것이다(브룩스가 언급하지 않는 지점까지 논의를 확장시킨다면, 도덕-감정은 멜로드라마적 대중예술을 통해 사적인/개인의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공적인 성격을 획득한다). 결국 브룩스의 텍스트는 이 너댓 개의 개념들만 잘 이해하는 것으로도 대략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의 1장부터 4장까지가 멜로드라마적인 것의 설명 및 실제 극화된 형태들을 분석하면서 과잉의 양식을 풀어내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긴 5장과 6장은 각각 둘 다 극작가를 지망했던 발자크와 (발자크를 자신의 전범으로 삼았던) 헨리 제임스를 다룬다. (세속적인 성공과 덕성이 뒤얽히는) 발자크와 ("의식의 멜로드라마"로 전화하는) 제임스는 조금 더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 것 같아서 여기에 내용을 덧붙이지는 않겠다--지금 옆에 텍스트도 없다-_-;. 다만 나는 이 텍스트가 과장된 양식, 기호화된 양식, 그리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멜로드라마적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는 동시대 한국의 대중예술을 독해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브룩스가 결론부에서 덧붙이듯, 우리는 항상 정치를 멜로드라마로 이해하기도 한다...정치(철)학이 그 자신을 얼마나 대중적인 편견에서 벗어난 과학으로 만들고자 한들, 정치의 대중적 이해는 계속해서 대중예술의 근본적인 모티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 말해두자; 이것은 분노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닌 그저 사실일 뿐이다). 나는 단적으로 어느 정도 정식화된 수많은 웹툰들과 이른바 "막장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TV드라마들을 언급하겠다. 혼돈의 시대, 비극적인 전망 자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멜로드라마가 (일종의 부재하는 질서의 재인지로서) 다시 번성한다는 브룩스의 해명이 도덕적 준거점을 상실하고 매우 빠르게 속물화된 사회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의 한국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들어맞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대중예술들을 우리의 성급한 편견이나 단순한 소비로부터 벗어나게 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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