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비판적 읽기.

Reading 2014. 5. 27. 04:02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책담, 2014.


즐겁게 하지만 가볍게 읽고 지나치려던 이 책에 조금 더 비판적인critical 시선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 하게 된 계기는 작년 저자가 내게 직접 말해주었던 내용이 방금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출간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거대한 사기극』(http://begray.tistory.com/12)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책의 논지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는 나에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답에 관해 조만간 책을 쓸 계획이라고 답했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은 직후에 저자와 나눈 대화에서 그가 아직 자신의 '해결책'을 전부 내놓지 않았음을, 조만간 또 다른 저술이 집필될 계획임을 알 수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2014년 초에 출간된 이 책이 어떤 형태로든 그가 제기한 문제에 나름의 해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부란 무엇인가』는 확실히 『거대한 사기극』보다도 스타일에 공을 들인 책이라 훨씬 적은 노력을 기울여도 이 책만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이 책 자체보다 조금 더 큰 맥락 하에 쓰여졌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아직 독자적인 사상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하고 드러내는 중인 이원석이라는 비평가가 어떠한 서사를 그려내면서 전진하고 있는지를 희미하게라도 밝힐 수 있다면 이 글은 성공이다.


앞 문단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사기극』-『공부』의 관계를 문제-해결의 쌍으로 바라본다(중간의 『자기계발서 읽기』는 일단 지나치자). 즉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일종의 자기폐쇄적 주체화의 담론으로서 자기계발의 논리가 한국사회를 점거한 광경을 고발하고 드러내는 것이 전자의 목적이라면, 후자는 전자와 다른 대안적인 형태의 '주체화'subjection로서 '공부'를 재발굴/재정의하면서 일종의 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2부 6장이 "우정에 토대한 대화"라는 부제를 단 것은 나의 가설을 거의 확증한다. 눈치빠른 독자라면 곧바로 알아보겠지만 이원석은 계속해서 주체화라는 현대 비판이론의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를 쫓고 있다. 그는 이론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대신 지금까지 진행된 논의의 틀을 빌어와 한국의 동시대에 곧바로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히 문화비평가/문화연구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그가 강조하는 주체화의 형식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다루는 책의 제목에 직접적으로 언급되듯 한국인들에게 가장 폭넓고 강력하게 적용되는 주체화의 방식은 역시나 '공부'다. 우리는 『사기극』 또한 근본적으로 한국인들의 공부/학습과정에 초점을 맞춘 책임을 상기할 수 있다. 애초에 자기계발은 그것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분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학습법, 공부의 방법이다. 한국에서 공부는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일뿐만아니라 그것이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체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짓는데 그치지 않고 주체가 무엇인지를, 그 내용을, 인격을, 역량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진실로 특권적인 주체화의 방식이다. 이원석의 연작은 한국에서 그러한 주체화의 방식이 어떻게 오염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정화하고 다시 사회변혁적인 역량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나 자신이 그와 같은 주체화의 과정과 평생 긴밀한 연관을 맺어온 입장에서 나는 저자가 선택한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저자의 두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한 권의 책 내에서 재현하는 최근의 사례로 사토 요시유키의 (훨씬 이론적인 텍스트) 『신자유주의와 권력』(http://begray.tistory.com/80)이 떠오른다. 애초에 사토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권력-저항의 쌍개념이기에 이원석의 논의와 사토의 논의가 형식적으로 유사한 형태를 띤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은 아니다. 물론 두 저자를 지금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애초에 텍스트에 부여한 무게 자체도, 둘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층도 무척이나 다르다. 내가 사토를 언급한 까닭은 사토가 자신의 저술에서 중추로 삼고 있는 도식, 곧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들의 틀을 이원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신자유주의적 주체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사토와 이원석의 논의에서 '지배'에 해당하는 부분(이원석의 경우『사기극』)을 읽으면서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푸코의 텍스트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선구적으로 예견하면서 그중 신자유주의적 주체화/복종화의 형식을 암시하는 진술을 한다; 예컨대 질서자유주의에서 모든 주체의 기업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이라든가 미국의 신자유주의 이론에서 베커/슐츠 등이 전제하는 '합리적 주체'를 거론하는 부분을 보라. 사토는 직접적으로 푸코의 틀을 참고하여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조응한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의 형식을 "자기-경영적 주체"로 명명한다. 이것이 이원석이 『사기극』에서 그려낸 자기계발적 주체와 근본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은 명백하다--이원석은 그러한 주체의 자폐적이고 맹목적인 면모를 들춰내고 그러한 주체가 사실상 자기기만/자기파멸적 경로를 걷고 있을 뿐임을 주장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이원석이 『사기극』을 쓸 때 푸코의 강의록을 참조하든 참조하지 않았든 간에 (강의록의 한국어판 출간일을 고려하면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푸코적인 문제틀 안쪽에 『사기극』을 위치시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의 문화비평계에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담론'을 포함해서, 자아심리학과 같이 푸코의 논의와 이원석의 예시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례는 얼마든지 널려있다; 푸코를 매우 지지하는 독자에게는 이원석의 연구는 푸코를 직접적으로 참고하지 않았음에도 푸코의 예견이 어떤 형태로 실현되었는지를 증명하는 텍스트로 읽힐지도 모른다.


사토가 자신의 텍스트 후반부에서 푸코의 문제틀에 대한 이론적 답변으로 들뢰즈를 독해한다면, 이원석은 『사기극』의 문제제기의 답변으로 제출한『공부』에서 한걸음 직접적으로 푸코에게 다가간다--물론 주체화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사토와 이원석이 제출한 답변은 그 상이한 차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유사한 논리적 틀에 입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부』에서 명시적으로 인용되는 말년의 푸코, 특히 『주체의 해석학』(http://begray.tistory.com/82)에서 전개된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의 논리는 이원석의 답변과 상당히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푸코의 성실한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통치성, 곧 국가적 지배의 실천을 분석하던 푸코는 갑작스럽게 주체, 정확히 말해 주체화의 형식으로 논의의 방향을 전환하면서 서구 근대와 다른 형태의 주체화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주체의 해석학』은 이런 푸코의 노력이 가장 많이 투여된 강의록으로, 여기에서 그는 플라톤적 주체화와 기독교적 주체화에 가려진 헬레니즘적 주체화/자기-배려의 가능성을 다시 제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원석이 소크라테스-플라톤을 말하면서『주체의 해석학』을 인용하는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푸코는 소크라테스-플라톤적 자기 배려와 거리를 두면서 자신이 선택하는 대안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푸코의 자기 배려가 실상은 자기 자신의 형성하는 과정임을, 보다 직접적으로 자기 수련/수양과 거의 겹쳐져 있음을 이해한다면 『공부』와 푸코의 대안으로부터 근본적인 유사성을 읽어내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내친김에 『공부』의 목차를 보면, 먼저 현재 한국사회에 퍼진 공부의 인식에 대해 간략한 비판을 제기한 뒤 곧바로 동아시아(유교)-고대 그리스(철학)-중세 기독교식 수련을 검토한다. 그 뒤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는 실제로 일종의 '기술'로서 암송-묵상-대화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틀이야말로 고대로 거슬러올라가 당대의 실천/장치/기술을 탐색하고 복원하는 『주체의 해석학』, 나아가 푸코의 근본적인 방법론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가? 종합적으로, 『사기극』-『공부』는 『안전, 영토, 인구『생명관리정치의 탄생』-『주체의 해석학』의 쌍과 꽤나 닮아있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나는 이원석과 푸코의 틀의 유사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혹은 아예 전자가 후자의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그게 문제가 되면 사토나 웬디 브라운를 비롯해 통치성을 활용하는 수많은 뛰어난 연구자들은 뭐가 되나?). 오히려 지금까지 한국의 푸코 연구가 푸코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비해 실제로 그를 활용하는데 썩 쓸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감안한다면(최근 어떤 선생은 "과연 한국에 푸코의 시대가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든다"라고까지 말했다), 이원석이 자신의 논의에 이토록 체계적으로 (의식적이든 아니든) 푸코를 가져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무엇보다 읽고 깊게 생각할만한--성과물을 낸 것은 한국의 본격적인 푸코 수용 25년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이원석의 주장과 논지 자체가 얼마나 유효한가에 있으며 푸코라는 틀은 그러한 논지의 유효함과 한계를 검증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는 편이 옳다. 『사기극』에 대해서 나는 나름대로의 코멘트를 제시했고 지금 당장 그 내용을 수정할 의향은 없다. 『공부』의 경우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었던 부분은 "스터디"와 "공부"의 차이를 지적한 27-29였지만) 결국 초점은 2부에 있다. 저자가 직접적으로 드러내듯 암송-묵상-대화는 사실 읽고(대상의 수용)-생각하고("묵상자의 내적 변화를 추구" 125)-말하기/쓰기(타인과의 상호작용=우정)에 조응한다. 물론 이 세 가지 과정이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자기계발의 담론의 자폐적, 독아론적, 맹목적인 성격을 정면충돌하도록 의도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묵상-암송-대화는 외부의 대상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자신을 확장/변화시키고, 타인과 "진실되게" 교류하면서 다시 처음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공부』의 대안적인 도식에 따른다면 주체는 계속해서 확장하고 마침내 사회적 선을 이룩할 수 있는 윤리적 역량을 품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많은 독자들에게 이원석이 제시하는 방법이 매우 흥미롭고 높은 효용을 가질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가 인용하는 고미숙의 텍스트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지만, 공부를 '몸에 새기는' 방식에 나름의 효용이 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순간에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물론 가장 치명적인 이의제기, 곧 이원석이 제안하는 방법이 일정 이상의 문화/경제적 자본을 보유한 이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은 제외하겠다). 단순히 확장되는 주체 혹은 윤리적으로 곁의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친구를 맺을 수 있는 주체가 사회의 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서 그러한 주체에게 비윤리적인 삶을 강요하는 사회적 조건, 곧 (신)자본주의적 체제를 넘어서고 극복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윤리적인 개인들이 사회구조 자체를 개혁하거나 구조가 강요하는 힘을 버티어낼 수 있는가? 맑스주의자로서 나는 여기에 다소 회의적이다. 두 번째, 이원석이 전제하는 윤리적인 주체가 사실상 자신과 가까운 이들 내에서만 자신의 '우정'을 지속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경험적으로 나는 "선량한 부르주아지들"끼리 매우 훌륭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장면을, 다시 말해 자신들의 집단 바깥에 어떠한 비참함이 펼쳐지든 진지하게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장면을 너무나 많이 목도했다)? 조금 이론적인 질문으로 바꾼다면, 주체가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와 "다른 북소리"에 맞춰 움직인다고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선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푸코가 자신의 텍스트에서 직접 언급하는 사례가 흥미로운 예시가 될 것인데, 곧 스토아학파적 자기 배려의 살아있는 예시인 세네카는 네로 치하에서 4년간 가까운 친구들의 호의를 활용하여 "3억 세르테르케스 은화를 긁어모았"다(456, f27). 이는 곧 독자적인 윤리에 입각해 스스로를 형성한 주체가 빠져드는 또 다른 맹목의 사례가 아닌가?(저자 본인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듯이 특히나 고전에 입각한 독서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주체화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역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두 질문은 『공부』가 푸코적 자기-배려의 틀에 입각해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장벽이다. 사토가 『권력과 저항』에서 푸코적 대안의 한계를 말하고 사회구성체의 문제를 제기한 알튀세르나 배제에 저항하는 들뢰즈("소수자-되기")를 '저항'의 가능성으로 선택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위에 제기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공부』자체만으로 답변하기란 내 생각에는 어려워보인다. 결국에는 그 자신이 예고하고 있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답변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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