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36호 (2014년 상반기)

Reading 2014. 6. 4. 03:44

<안과 밖> 2014년 6월호를 읽었다. 생각해보니 <안과 밖>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기로나마 본 게 처음이다. 알바를 끝내고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비판적인 영혼이 풀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평소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번 호는 나름대로 필진은 좋았던 것 같다. 우연인 건지 처음과 마지막 모두에 현재 서울대 영문과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선생님들의 글이 세워져 있더라(5년쯤 뒤 두 분 다 퇴임하시고 나면 솔직히 그 빈 자리가 쉽게 채워질 것 같지는 않다). 마치 마을의 출입구에 있는 장승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면 조금이나마 설명이 되려나. 실제로 가장 두터운 내용이기도 했고.


 셰익스피어를 다룬 파트의 두 번째 글은 칼 슈미트를 다루는데 슈미트를 정치철학을 (슈미트랑 아감벤만 얘기하는 대신 샹탈 무페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게 나름 반짝 공부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정치적인 것의 귀환>보다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인용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열심히 공부했다는 건 알겠지만 딱히 유효한 층위에서 자유주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도 않고, <햄릿>(셰익스피어의 그 <햄릿>이다. 슈미트가 원래 오만가지 다 다루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는데 이 텍스트에 대해서 쓴 책이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에 갖다붙인 해석은 내가 르네상스에 무지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별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충 읽기엔 슈미트-벤야민(<비애극>)-바로크-자유주의 비판-셰익스피어...식으로 연결을 짜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비애극>의 바로크 관련해서 주권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그걸 자유주의 비판으로 끌고 가려면 상당한 비평적 곡예가 필요할텐데 (개인적으로는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납득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다음 글은 읽지 않았다.


 '삶과 말', '문학상담'을 다룬 두 편의 글은 일종의 대안 인문학을 탐색하는 시도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글의 가볍고 무거움을 떠나 어쨌든 흥미롭게 읽혔다. 개인적으로 학교 밖에서, 특히 대학이라는 상당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하는 (그리고 투자한 몫에 비해 많은 걸 얻어가기가 매우 힘든) 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문학상담은 아직 그렇게 윤곽이 잡힌 것 같지는 않았으나 애초에 한국에서 그 실천적인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음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이런 종류의 실천들을 어떻게 엮고 발전시키고 고민할 수 있는가를 계속 생각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런 것들을 일시적인 일탈이나 흥밋거리, 되도 않은 이론에 입각한 자위질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나처럼 계속해서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을 살아오는 삶이야말로 비정상적이고 잉여적인 삶, 우리 사회의 특수한 조건 하에서나 가능한 삶이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한테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이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일은, 특히나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무언가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안다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대학구조조정 및 대학개혁을 다룬 글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현재 대학구조조정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가, 대학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한 것은 좋기도 하면서도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조금이나마 성찰해보는 사람에게는) 상식적이다. 오랜만에 빌 레딩스Bill Readings의 텍스트(_The University in Ruins_)가 언급되는 게 반갑기도 하고. 예전 법인화 투쟁/자치회 모임에서 대학론 세미나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두 편의 글 모두 (약간 피곤에 쩔어 졸면서 읽어서 사실 기억이 좀 뒤섞여 있다-_-;;;) 훔볼트나 칸트 식의 대학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인데, 나야 불만이 없지만 만약 반대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이브한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까? "기업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자"는 주장에 맞서 반대자가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왜 너희는 그런 특권적인 위치에 남아있으려고 하는데?"라고 물을 때 지금의 논리로 쉽사리 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다들 각성합시다 정도의 이야기로 끝나는 대신 지배구조governance의 문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학생참여(그러나 대학원생은?)까지 언급하는 부분은 나름 예전의 진부한 '인문학 위기론' '대학 위기론' 보다는 덜 관념적이어서 훨씬 좋았다. 그러나 지배구조에서 이야기를 끝낼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여기가 교육/연구기관이라면 무엇을 위해 교육하고 연구하는지를 다시 묻지 않으면 결국에는 "근대 대학의 시초가 된 독일 베를린 대학의 이념을 따르자면..." 식으로 일종의 전통에의 복귀밖에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말해서 나는 이제 전통적인 '교양교육',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 '부르주아적 인문교육'이 대학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주장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학졸업 이후에도 윤택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학이 존재했을 시기일 뿐이고, 오늘날처럼 심지어 중상층 이상의 사람들조차 극심한 경쟁적 삶으로 내몰리는 조건 하에서 그런 식의 주장은 공허한 가상밖에 될 수 없다.


마이클 벨Michael Bell 소개글은 좋았다. 내친김에 모레띠나 제임슨, 특히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관련 구분은 제대로 비교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마침 여기서 다루는 텍스트를 유쌤이 선물로 주신 적도 있고 해서. 전부터 몇 번 읽어보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사실 무의식의 창고에만 넣어두고 있었는데 조금 눈에 다시 띈다. 여튼 복고적인 문학주의자도, 이론의 언어만을 나열하는 내용없는 사람들도 아닌 조금 다른 가능성들을 탐색하는 연구자들은 언제나 중요하다.


문강형준의 글은...내가 그가 다루는 <엘리시움>에 별 흥미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저 그랬다. 예전에 정말 몇몇 부분만 훑어본 <파국의 묵시록>도 그렇고,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이 사람의 글은 주제나 주제를 장식하는 수사는 그럴싸한데 읽어서 딱히 배운다는 느낌은 안 든다. 생각이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느낌? 그냥 같은 층위에서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이 글의 주장을 극도로 단순화하자면 <엘리시움>이 그려내는 암울한 세계와 희망의 서사가 나이브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런 이야기는 이미 나올만큼 나오지 않았나? <엘리시움>이 <아바타> 정도로 뜬 영화고 그걸 본 진보들이 엄청 희망을 품었다, 뭐 이런 거라면 납득이 가겠지만 내 주변 사람 중에서는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사람 자체가 없어서;; 그리고 묵시록적 세계든, 묵시록-이후의 세계든 사례만 나열한다고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니라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아직까지는 꿰어서 뭘 만들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그가 다루려는 소재는 어쨌든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서평들은 대체로 평범.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을 다룬 글은 "그래서 법 밖의 정의가 뭔가요"라는 질문만 남겨놓고 끝나고, 제임슨Fredric Jameson 대담집을 다룬 글은, 사실 같은 필자의 가라타니 고진 서평을 예전에도 읽은 적 있는데, 비슷하게 열심히 읽은 티를 내지만 딱히 그 서평을 읽어서 뭔가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제임슨도 유명한 것치고 한국에서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도 별로 못 봤고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도를 보여주는 글도 아직 못 읽어봤다-_-; 그냥 혼자 _The Political Unconscious_읽는 게 훨씬 배울 게 많았다. 그리고 나는 왜 한국에서 제임슨 언급하는 사람들이 아도르노랑 그를 안 엮는지 이해가 안 된다. 루카치랑 엮는 것보다는 훨씬 중요하지 않나? 그가 _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_을 쓴 시기랑 거의 겹치게 상당한 난이도의 아도르노 연구서 <후기 마르크스주의>_Late Marxism_을 썼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웃기게도 후자는 아도르노 전공자, 그러니까 독문학자 김유동 선생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정작 전자는 아직도 번역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맑스주의와 형식>_Marxism and Form_에서도 아도르노를 언급하는 파트에서 (당시까지 아도르노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던) 제임슨은 텍스트 읽기의 방법론으로 아도르노가 갖는 의의를 강조하고, <후기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아도르노가 특히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얼마나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강조한다는 사실만 언급해 두자.

 나 자신이 기본적으로 제임슨을 통해서 아도르노를 처음 읽은 사람이기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임슨의 예술작품에 대한 주요한 전제들과 독법을 언급할 때 아도르노가 지금보다는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_The Political Unconscious_ 이야기하면 맨날 알튀세르만 이야기 되지만 (실제로 개설서들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난 솔직히 말하자면 이 텍스트에서도 아도르노 얘기는 빼놓고 알튀세르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논의는 핵심을 전혀 짚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제임슨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런 개설서부터 찾아 읽지만 사실 별로 도움은 안 된다. 굳이 말하면 알튀세르는 (_Postmodernism_에서 만델님이 차지하는 위치처럼) 일종의 역사철학, 유물론적 사회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배경틀에 가깝지 사실 실제로 제임슨이 무엇을 하는지 똑바로 보고 배우는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직 제임슨을 읽는다면) 보통 사람들이 서장 "On Interpretation"이랑 결론만 보고 다 읽었소 하고 치우는데 뭐 정말 맑스주의 문학논쟁사 따라가려고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 어떻게 활용되는구나, 총체성totality 개념을 제임슨이 어떻게 살리려고 하는구나, 이런 거 하려는 게 아니면 별로 소득이 남지가 않는다. 차라리 2장부터 결론 직전 장까지를 읽는 게 훨씬 배울 것도 많고 남는 것도 많다. 결국 <언어의 감옥>_The Prisonhouse of Language_부터 M&F랑 PU까지의 작업에서 (내가 <포스트모더니즘> 부터의 작업은 맨날 읽는다고 마음만 먹고 손도 못대서 말을 못하겠다-_-;;) 제임슨이 하는 일은 맑스주의 '비평' 전통('이론' 전통과는 조금 구별되어야 한다...분명히 말하건대 제임슨의 비평방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맑스주의가 아닌 형식이다!)이랑 프랑스 이론을 결합시키고 활용하는 거다. 그리고 그걸 실제로 활용하는 중요한 사례가 PU의 2장부터 결론 전 장까지인 거고. 결국 비평가로부터는 그 사람이 어떻게 비평을 하는가를 봐야하는데 그 부분 갖고 쓸만한 코멘트를 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은 없다.


 아감벤을 다룬 유쌤의 마지막 글은...꽤 오래 전부터 생각하신 글이었으니까. 예전에 꽤나 다른 형태의 초고는 군대에서 한번 읽어봤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억지로 잘라낸 내용을 덜 잘라내서인지) 지금 <안과 밖>에 실린 형태가 더 좋았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이걸 갖고 더 큰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또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유쌤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그럼 푸코로 넘어가야 되기 때문에...(난 결국 아감벤을 뿌리부터 파려면 하이데거랑 푸코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이데거는 솔직히 원래 그거 하던 사람이 아니면 누가 해도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이번 글에서도 푸코와 아우슈비츠 관해 의미심장한 각주가 하나 있다. 나는 그게 엄청 신경 쓰이고, 솔직히 그 부분은 좀 더 해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글의 전개만 놓고 보면 크게 해명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유쌤의 독자로서 생각해보면 더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안과 밖>을 처음으로 읽은 사람의 감상은, 솔직히 영문학 전공자로 대학원 이상 공부하는 사람 아니면 손이 잘 가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다른 필드에 있거나 아니면 약간 최근의 비평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는데 심심하면 한번 훑어보겠지만 굳이 정기구독을 할 요인은 없을 듯? 글 수준이야 나름대로 무난하게 유지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애초에 이 비평지의 지향 자체가 무언지 잘 모르겠다. 제대로 된 문화비평지도 아니고, 본격 연구지도 아니고, 최근 정세를 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기본적으로는 영문학 전공자들 중에 이론이랑 정세, 요즘 판 돌아가는 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모토인 게 아닐까 추측은 해보는데 사실 영문학 전공자들이 그런 부분에서 선진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도 옛말이고, 어차피 이론이랑 정세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쪽보다 훨씬 더 최신 / 전문적인 논의들을 따라가고 있지 않나? 나랑 비슷한 취향이라면 차라리 교수신문 / 중대신문 같은 거 읽을 거고. <크리티카> 읽을 때랑 비슷한 기분인데 <크리티카>는 그래도 좀 더 넓은 분야에 필진이 있다보니 가끔 좀 챙겨둬볼만한 내용이라도 나온다(가장 기억나는 글은...바흐친 연구동향 소개한 거랑 벤야민 <기술복제>논문 재번역한 거 정도...). 아니면 차라리 서두의 글이나 마이클 벨 다룬 글처럼 최근 연구동향이나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람을 소개하는 데 좀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거나. <창비>가 겪고 있는 문제랑 비슷한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이 평론지(?)가 무엇을 의도하고 만든건지 잘 잡히지 않는다. 뭐, 어쩌면 그게 오늘날 우리들의 위치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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