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읽은 후)

Reading 2014.05.22 05:42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김상운 역. 후마니타스, 2014.

일본어 원저의 출간년도는 2009년이고 부제 또한 직역하면 "푸코에서 현재성의 철학으로"이다.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는 국역본에 새로 붙은 주제다. 개인적으로는 원서 쪽의 부제가 낫다. 국역본의 부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만 사토의 주장을 잘 정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적어도 "자기-경영적 주체"는 1부의 논의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한다). 번역은 <권력과 저항> 때도 그렇듯이 신뢰할 만한 역자의 신뢰할 만한 번역이고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권력과 저항>의 후속작이면서 소품격인데, 따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먼저의 저작부터 같이 읽는 게 좋긴 하다.



<권력과 저항>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와 권력> 또한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다룬다. 즉 신자유주의에서 지배-권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주로 푸코의 통치성 틀을 가져와서 설명하고, 저항의 가능성은 들뢰즈에 대한 독해를 통해 탐색한다. 보론으로 알튀세르와 버틀러의 주체화/복종화subjection를 가져와서 주체=종속이 한번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즉 최초의 주체화 이후에도 저항의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먼저 권력을 설명하고 그 다음 권력에 대항하는 논의를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전개한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와 형식적으로도 거의 유사하다. <권력과 저항>을 집필할 때 출간되지 않았던 푸코의 통치성/신자유주의 연구(<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및 주권적 폭력에 대한 최신의 논의(아감벤과 데리다의 슈미트/벤야민 읽기)를 수용했다는 것, 그리고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천 개의 고원> 간의 단절을 넘어 두 텍스트의 연계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차별점이 되겠다. 여전히 수많은 이론가들의 논리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연결시킨다는 점이 이 텍스트의 최대의 강점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그것말고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조금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활용하는 광경을 보고 싶었으나 (몇몇 사례 인용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론들을 조합하여 큰 정세적 판단을 하는 지점에서 더 내려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1부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푸코의 분석 위에서 다른 이론틀을 접합한다. 1장에서 사토는 낸시 프레이저의 포스트-포드주의에 관한 시대구분을 참고하여 70~80년대에 걸쳐 이전의 (규율권력이 중요시되었던) 복지국가와는 구별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고 본다. 프레이저가 포스트 포드주의적 통치를 "전 지구화된 다층적 시스템, '(일국적인) 사회적인 것'의 해체, 포드주의적 주체의 자기 규제의 쇠퇴와 폭력적 억압의 회귀라는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한다면 사토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포스트 포드주의적 통치성 분석의 선구"로 읽는다. 이어 사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푸코의 논의를 요약정리하면서 두 가지 주목할 코멘트를 덧붙인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시장화된 자기 통치 기법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만을 사회 안에 '살게 하고', 그 기법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사회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또는 그것은 사회 안에 살아야 할 사람과 사회 바깥에서 살아야 할 사람 사이에 절단선을 긋는 것이다"(56 - 로익 바캉의 <가난을 엄벌하다>나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참고할 수 있겠다). 이것이 통치성 혹은 국가적 지배의 성격이 어떻게 바뀌는가에 대한 분석이라면, 사토는 이어 시카고 학파의 인적자본론에 대한 푸코의 독해를 가져오면서 이러한 지배가 동시에 "다른 방식의 자기 관리 가능성으로서의 주체화"(57), 곧 국역본 부제에 나온 "자기-경영적 주체"를 생성한다고 말한다. 특히 후반부의 코멘트가 중요한데, 주체화의 문제와 통치성의 문제를 연결시킴으로써 푸코가 해당 강의 이후 계속해서 성찰했던 주체화의 테마를 푸코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주제 안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지금까지 <주체의 해석학> 및 <성의 역사> 2,3권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까닭이 이 텍스트들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배려와 주체형성의 문제를 이전의 권력/지배분석과 연결시키기 곤란하다는 난점에서 비롯되었다면, (<권력과 저항>에서 보다 상세하게 제시된) 사토의 독해는 두 문제를 동일한 차원 안에 놓고 사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푸코가 '주체화', '통치성'의 기획을 통해 제시했던 것은 바로 권력의 명령 혹은 시장의 명령에 의거하지 않은 자기 통치의 가능성인 것이다"(59).


2장은 푸코의 시카고 학파에 대한 독해 중에서 특히 범죄예방에 대한 분석을 가져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하나의 특징으로 "환경 개입 권력"의 성격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해당 파트의 요약에 가깝다. "환경 개입 권력이란 환경에 개입해 리스크를 통치 가능한 것으로 변환하고, 리스크를 초래할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단순히 사회 바깥으로 배제하는, 리스크 관리와 배제의 권력인 것이다"(76). 


아감벤과 데리다의 주권(적 폭력)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는 3장이 아마 이 텍스트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흥미진진할 부분일 것이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산출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정성의 증대는 '노골적인 억압에 의해 파묻힐 가능성이 높다'. 이런 '노골적인 억압'의 수단을 이루는 것은 주권 권력의 강화와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의 규칙화'다"(86-87). 즉 고전적인 자유주의 모델이 (홉스 식의) 주권권력=국가이성raison d'etat의 외부에서 그것을 견제하고 해체하는 시장영역의 강조에 기반한다면, 신자유주의는 그와 같은 주권권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기존의 사회적 규범이나 중간세력과 같은 장애물들을 '예외를 규칙화하는' 주권 권력의 행사로 파괴하거나 우회하는 것이다(주권의 사법에 대한 우위는 사실 홉스의 텍스트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데리다가 사례로 드는 근대 경찰을 이야기하면서 사토는 "국가와 경찰이 일체화되는 안전확보장치에서는 [벤야민이 제기했던]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사이의 분리가 중지된다'.... 이런 안전 확보 장치가 기존의 법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법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자주 행정명령이라는 비입법적 수단을 통해 법을 '발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98-99). 이러한 수단은 '예외 상태의 규칙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예외 상태의 규칙화라는 통치 기법이란 법질서를 중지하고, 법의 힘을 지닌 정부 명령에 의해 현실적인 것을 규범화하고자 하는 통치 기법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할 때, 현실적인 것의 규범화란 정치체제에 통합 불가능한 범주의 시민, 비시민을 물리적으로 제거, 배제하는 것이다"(109). 현대 주권권력의 작동에 대한 분석을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접합시키면서 사토는 과거 복지국가의 "규율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배제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13). 이는 특히나 도식적인 간결함에서 오는 힘이 있지만, 우리는 사토의 분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앞서 푸코가 누차 서로 다른 형태의 통치성/권력의 작동양식이 공존하고 뒤섞임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부는 들뢰즈의 논의를 통해 저항 전략을 탐색한다. 다만 1부가 어떤 식으로든 약하게나마 현대의 정세와 맞닿아 있었다면, 2부는 훨씬 더 이론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다. 들뢰즈의 활용 그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사토가 들뢰즈를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에 맞서 탈주체화/탈복종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를 통해 (자기경영적 주체로 편입불가능한 이들을 탈락시키는) "배제의 구조를 침식하고 무화하는 것"(118)이다. "[반-라캉적인 무의식 개념으로서] 비인칭적이고 생산적인 '복수의 특이성/단독성의 해방'의 장"(164)-"인칭이나 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개체화"(168), 기관없는 신체와 "복종화에 저항하고 스스로 욕망의 생산자가 되는 주체들의 집합('주체 집단'groupe-sujet)을 만들어 내는 배치"로서의 "집단적 배치"(170)와 같은 개념틀들은 흥미롭고 사토의 설명도 깔끔하다. 다만 나는 아직 들뢰즈의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사토의 논증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요건은 1부에서 설명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맞서 저항이 가능한 주체화의 방식 및 배제에 대항하는 이론적 탈출구를 들뢰즈로부터 찾는다는 것인데, 사실 애초에 독립적인 논문으로 집필된 부분이기도 하고...결정적으로 들뢰즈의 텍스트에 대한 독해 이상으로서 읽히지는 않는다. 이는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억압을 우리가 너무나 자명하게 바라보게 되어 단순히 이론적인 탈출구를 제시받는 정도로는 냉소적인 반응밖에 나오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볼륨은 많지 않은 텍스트고, 사토 본인이 말하듯 <권력과 저항>의 속편으로서의 성격(그는 일반론-구체적인 적용이라 말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권력>이 그만큼 구체적인 적용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굉장히 강점이 있고 매력적인 텍스트로 읽히는데, 들뢰즈를 잘 아는 독자들이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주체화가 저항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구체적인 정세분석이 어떤 형태로든, 다른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원칙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자본에 대한 대항은 대항적인 경제체계에 대한 고민이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나는 절멸하지 않고 남아있는 맑시스트들이 이론적 실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는 정치경제적 여건들에 대한 사유와 대안적 체제의 가능성을 가장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특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튼 1부와 2부 사이에는 딱 2부의 '일반론'에 결여된 구체적인 층위만큼의 간극이 있고, 그것이 이 텍스트의 완성도를 약화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내가 여전히 <트랜스크리틱>이 그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이론적인 실천보다 앞서 있는 텍스트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 텍스트가 오늘날의 이론적 실천은 불완전하게나마 프로그램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독보적으로 먼저 깨달았기 때문인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에서는 벌써부터 이론 연구자들이 통치성의 실천을 바탕으로 정세분석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론틀 자체의 설명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단지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는 사실만을 안다.

Trackbacks 0 : Comments 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