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역사 속의 이성> _Die Vernunft in der Geshichte_ 국역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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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0월 6일 페이스북.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 속의 이성: 역사철학서론>. 개역판.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92.


두 번째 초안, 철학적 세계사(1830).


A.  세계사의 일반적 개념


철학적 고찰은 우연적인 것을 떨쳐버리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우연성이란 외적 필연성, 즉 그 자체가 한낱 외적 사정에 지나지 않는 원인에 귀착되는 필연성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 즉 세계의 궁극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 정신이나 심정이 지닌 어떤 특수목적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이때 우리는 그 궁극목적을 이성을 통하여, 즉 그 어떤 특수한 한정된 목적이 아닌 오직 절대적 목적에만 스스로의 관심을 두고 있는 이성을 통하여 포착해야만 / 한다. 이 절대적 궁극목적은 자기 자신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이 자기의 관심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스스로의 지주를 마련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다. 이성적인 것은 즉자 대자적 존재자로서 모든 것은 이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다. 이성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러나 실로 정신 자체가 흔히 국민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 개진되고 현현되는 데서처럼 이성의 명백한 목적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의욕의 세계는 결코 우연에 내맡겨 있지는 않다는 믿음과 사상을 안겨주어야만 한다. 모든 국민이 겪어나가는 사건 속에서는 궁극목적이 지배적인 것이며, 또한 이성이 세계사 속에 있다는 것--그러나 어떤 특수한 주관의 이성이 아닌 신적이며 절대적인 이성--이 우리가 전제로 하는 진리이거니와 이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곧 세계사 자체의 논구이며, 다시 이 논구야말로 이성의 상이며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본래적 증명은 바로 이성 그 자체의 인식Erkenntnis 속에 깃들어 있거니와, 이 이성은 오직 세계사 속에서 입증될 뿐이다. (50-51)


필연적인 것-이성(정신)-민족국가의 연결. 우연성의 배제는 알튀세르 이후의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자들, 아도르노를 포함한20세기 중반 이후의 비판적 철학자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우연성 자체의 찬미로 나아가는가("부정신학"), 혹은 우연성을 재흡수하는 체계의 건설로 나아가는가(이 경우 헤겔의 거부라기보다는 좀 더 신중한 되풀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에 따라 몇 가지 갈래로 나뉠 뿐 이 문제가 진정으로 극복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한 마디로 우리는 여전히 헤겔의 틀 안에 있다.



...이 철학적 세계사의 정신적 원리는 모든 관점의 총체성이다. 철학적 세계사는 모든 국민의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와 그 역사를 고찰하면서 어떤 개별적 상황이 아닌 전체 속을 일관하는 일반적 사상을 다루는 것이다. 이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우연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수많은 특수성이 단 하나로 포괄되어야만 한다. 결국 역사는 각기 다른 실존의 모든 측면을 자체 내에 총괄하는 가장 구체적인 대상을 눈앞의 표적으로 삼거니와, 이때 역사의 개체, 역사적 개인은 바로 세계정신der Weltgeist이다. 이렇듯 철학이 역사와 겨루는 가운데 모름지기 이 철학은 구체적 대상을 스스로의 대상으로 하여 그 필연적 전개·발전을 고찰한다....철학적 세계사가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것das Allgemeine은, 그것이 제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이와 나란히 하여 또 다른 규정들이 현존할 수 있는 그런 한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이 보편자는 모든 것을 자체 속에 포괄하며, 또한 모든 곳에 현재화되어 있는 무한의 구체자das unendlich Konkrete이다. (55)


여기서 헤겔의 입장을, 그 논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보편성에 대한 입장이 갈린다. 즉 우연적인 것들, 개별적인 것들을 생략하는 보편자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가는지, 또는 "모든 것을 자체 속에 포괄"하는 보편자라는 개념 자체는 수용하되 헤겔이 여기서 제시한 국가를 보편자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지. 나는 기본적으로 후자를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 논리 전개에 있어서 단순히 개념으로서의 보편자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대신 우리의 세계가 실제적으로 세계의 모든 개별자들을 연결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제적 시장과 그에 딸린 제반 요소들에 의해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은 이미 연결되어 있다. 자본은 기존의 우연적인 것들을 거부하기는 커녕 그것들로부터 효용을 창출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굳이 말한다면 오늘날 진정으로 재고를 요청하는 우연적인 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폐기물들이다. 단순히 보편자를 긍정하는 대신 당위로서의 보편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연적인 것들을 단순히 따로 사고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연적인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초래되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B. 역사 속에서의 정신의 실현


정신이란 사유하는 것이며 또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유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존재한다는 것과 그 존재하는 양식에 대한 사유이다....(84)


정신은 자기 외면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내면에서 통일성을 발견하면서, 오직 자체 안에서 자적 자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자기의 실체를 외면에 지니고 있다면, 반대로 정신은 자적 자존하는 존재인바, 이것이 다름 아닌 자유이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의존적이라면 이때 나는 나 자신이 아닌 어떤 타자에 관계할 뿐더러 또한 그와 같은 외적인 것이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자존 자립할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85)


동물은 그의 표상을 관념적인 것, 또는 현실적인 것으로 지니지 않음으로써 그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내적 자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물론 동물도 역시 생명체로서 자기 운동의 / 원천을 자체에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동물은 자기 내부에 자극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외적인 것에 의해서 흥분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역시 자기 내면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동물에게는 현존하지 않는다. 동물은 자기 자신에 의하여 자체 안에서 스스로 분열되어 있다. 동물은 그의 충동과 이 충동의 맍고 사이에 아무것도 삽입시킬 수가 없으니, 즉 동물은 아무런 의지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억제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동물을 흥분시키는 것은 그의 내부에서 발동되는 일종의 내재적ㅇ니 수행·구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립적인 것은 운동이 그의 내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운동을 저해할 수가 있고 그럼으로써 또 그의 직접성과 자연성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아Ich이다라고 생각하는 것Denken이 곧 인간 본성의 근원을 이룬다. 정신으로서 인간은 직접적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러한 매개의 운동이 곧 정신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정신의 활동은 직접성의 초탈이자 부정이며, 또한 자기 내면으로의 귀환이라고 하겠으니, 결국 그는 자기활동에 의하여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그런 것이다....정신은 오로지 그의 결과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종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식물은 종자와 함께 시작되지만, 그러나 이 종자는 동시에 식물의 전체적인 생명에서 얻어진 결과이므로, 식물은 종자를 산출하기 위하여 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종자는 개체의 시작과 결과이기도 하며, 또한 이렇듯 출발점이며 결과로서의 이 두 측면은 서로가 상이하면서도 또 동일물이라고 하는 것, 즉 한 개체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개체의 시초가 /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삶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씨앗 속에 담겨 있는 단순성의 형식과 식물이 이어가는 발전경과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들 두 측면은 하나의 개체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88-90)



...정신의 표상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실재화하는 것이 된다....이때 이 실현의 소재, 즉 그 지반이 다름 아닌 보편적 의식으로서의 국민의식이다. 결국 이러한 의식이 국민의 모든 목적과 관심을 내포하며, 또한 국민의 모든 목적과 관심은 이 의식에 적응하는 가운데 바로 이 의식이 국민의 법·도덕, 그리고 종교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식은 비록 개인으로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다만 하나의 전제로서 기정사실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국민정신의 실체적 측면을 이룬다. 그런데 이 의식은 마치 필연성과도 같아서, 개인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육성되는 가운데 전적으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은 한낱 육성된 것이거나 또는 그 결과만도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개인 자신으로부터 발양된 것이며, 따라서 또 단지 그에게 주입된 것도 아니다. 즉 개인은 바로 이와 같은 실체 속에 안겨 있는 것이다. (92)


cf. theories of ideology


...역사 속에서는 인간행위의 계열이 곧 인간 자신인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소행의 결과는 비록 쓸모가 없다 하더라도 그의 지향·의도는 가상할 만하다고 얘기한다. 물론 개별적인 경우에 인간이 그렇게 가장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국부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여기서 진실은 외면과 내면이 서로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역사에서는 그와 같이 안팎의 양면을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따위의 잔꾀는 발붙일 수가 없다. 즉 모든 국민에 의한 행위, 이것이 곧 국민들 자신이며, 또한 그 모든 행위는 바로 그들 자신의 목적인 것이다.(101)


...만약 우리가 보편적인 이성은 스스로 완수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경험적인 개별자와는 무관한 것이다....물론 우리는 특수한 사물·사실과 관련하여 세계 속의 많은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 본다면 현상계에서 드러나는 개별적 사실을 놓고 많은 것을 못마땅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경험적 특수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우연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5)


만약 자유 그 자체가 일단 내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와는 달리 자유의 수단이 되는 것은 직접 우리의 눈앞에 드러날 정도로 역사 속에서 표출되는 외적인 것, 또는 현상적인 것이다. (118)


물론 개별적인 경우를 보면 인간은 보편적인 법에 반하여 스스로의 특수한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인 지반이며 실체적인 것으로서의 법이 혼탁해지지는 않는다. 세계질서 속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즉 여기서는 열정이 한 쪽 자양분이라면 이성적인 것은 다른 쪽의 자양분에 해당된다. 결국 열정은 활동자이다. 그런데 이 열정은 결코 언제나 인륜에 대립되는 것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을 실현시킨다..../... 관심·이해(利害)는 전적으로 특수적인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심이나 이해가 반드시 보편적인 것에 대립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때 보편적인 것은 특수적인 것을 통해서 현실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125-26)


어떤 국가이건 그것이 자체 속에서 이런 면으로 번영하며 또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이 국가의 일반적 목적과 시민의 사적인 목적이 서로 일치하여 양자가 서로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 만족과 실현에 다다라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그 자체로서도 이미 극히 중요한 명제이다. (128)


...개인이나 민족의 생동성은 한편으로 그들 자신의 것을 추구하고 충족시키면서도 또한 이를 무의식중에 수행하는 가운데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하나의 좀 더 고차적이며 웅대한 것의 수단과 도구라고 하겠는데,...(129)


...즉 세계사 속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목적으로 하고, 또 달성하고자 하는 것, 또는 그것이 직접 알고 의욕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것은 스스로의 관심을 실현시키긴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는 비록 내면적으로 그 속에 깃들어 있을지라도 결코 그들의 의식이나 의도 속에 담겨 있지는 않던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성사된다. (130)


헤겔이 특수한 것들을 보편자 안으로 끌어안는 방식. 아담 스미스Adam Smith를 상기시킨다. 다만 스미스의 경우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헤겔처럼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다. 역으로 스미스가 철저히 개인의 관점에서만 특수자, 즉 개인들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킨다고 간주한다면 이 또한 명백한 오해다(<도덕감정론>을 보라). 어떤 면에서 헤겔은 스미스의 텍스트에서 불분명하게 남아있던 "개인을 초과하는 전체적인 것"을 보다 뚜렷이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스미스에게서 그것이 신의 의지 혹은 보편적인 이상으로서 당위의 형태에 가깝게 등장한다면, 그리고 도덕감정moral sentiment가 그 당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제공된다면, 헤겔에게서 총체성은 실재하고 또 자신을 실현시키는 정신으로서 좀 더 실체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스코틀랜드 계몽학파의 스미스는 그 자신의 전통에서 선조격이라 할 수 있는 존 로크John Locke와 헤겔 사이의 징검다리처럼 느껴진다. (헤겔이 스미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루카치의 고전적인 연구 <청년 헤겔>을 참조하라)


...인륜적 전체는 제한적인 것이어서 바로 이 인륜적 전체는 자기를 능가하는 하나의 더욱 고차적인 보편자를 지니게 되는데, 결국 이 보편자로 인하여 인륜적 전체는 내적인 파탄을 겪는다. 결국 하나의 정신적 형태로부터 또 다른 정신적 형태로의 이행은 앞서간 보편자가 그 자신의 사유를 통하여 하나의 특수자로서 지양된다는 데 있다. (141)


[국민정신의 붕괴와 함께 세계정신이 전진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개념이 이미 완벽하게 형성해놓은 선행했던 현실양태가 격하되고, 분쇄되고, 또 파괴된다는 문제와 결부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념의 내적 발전을 통해서 행해지지만, 다른 면으로는 이 이념의 발전 자체가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이념의 수행자이며 동시에 그 실현을 가져오는 것은 다름 아닌 개인이다. 여기서야말로 기존의 공인된 의무·법률·권리와, 그리고 이 기존제도에 대립하여 이를 침해하고, 또 그 근본과 현실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것 못지않게 선하고 유용하고 또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듯이 보이는 내용을 지닌 새로운 가능성 사이의 전면적인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가능성은 역사적 잠재력을 지니고 대두됨으로써 다른 종류의 보편자를 한 국민이나 국가의 존립근거를 이루는 보편자로서 내포하기에 이른다. 이 보편자야말로 생산적인 이념의 한 계기이자 또한 자기 자신을 지향하며 또 그렇게 추동되는 진리의 한 계기이다. (142)


"보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던 무언가가 붕괴되고 새로운 보편자로 이행되는 과정. cf. Francis Fukuyama / "After Postmodern"



시종의 눈에는 영웅이 존재할 수 없다는 널리 알려진 격언도 있지만, 나는 여기에 덧붙여서 "그러나 그것은 그가 영웅이 아니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시종이야말로 시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만 하겠는데--괴테도 역시 이보다 2년 뒤에 내가 한 것과 같은 말을 되풀이한 일이 있다. (151)


즉 특수자는 서로가 쟁투를 일삼는 가운데 그 가운데 어느 한편은 몰락하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보편자는 오히려 이러한 투쟁과 특수자의 몰락을 통해서만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 보편자는 저해당하지도 않는다. 즉 대립과 투쟁에 직면하거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보편적 이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배후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아무론 침해나 공격을 받지 않은 채, 오직 열정이라는 특수자로 하여금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의 힘을 탕진하도록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이성이 스스로를 위하여 열정을 발동시키는 가운데, 다시 이 이성이 스스로 실존계에 정립되는 것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을 우리는 이성의 간계die List der Vernunft라고 부를 수 있다....이 경우에 대개 개별적 특수자는 보편자에 비해 너무나 하찮은 것이니, 즉 여기서 개인은 다만 희생되거나 포기되어 버린다. 결국 이념은 현존재성이나 무상함에서 오는 부담을 그 스스로 지불함이 없이 개인의 열정으로 하여금 그 짐을 지게 하는 것이다. (154)


저 악명높은 "이성의 간계."


...주관적 의지는 하나의 구체적인 삶, 즉 그 속에서 주관적 의지가 본질적인 면에서 운동하며, 동시에 이 본질적인 것을 자기 현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그러한 현실성을 지닌다. 이 본질적인 것, 즉 주관적 의지와 일반자의 통일이야말로 다름 아닌 인륜적 전체로서, 이를 다시 그 구체적인 형태에서 보면 이것이 곧 국가der Staat이다. 국가란 그 속에서 개체가 자기의 자유를 지니면서도, 또한 이 개체가 일반자의 앎과 신앙과 의욕을 이루는 한에서만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그러한 현실태이다....그런가 하면 또 국가는 모든 개개인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그러한 인간의 집합체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유를 대하기를 마치 다른 여러 주체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주관이 그의 자유를 제한하는 나머지, 이와 같은 공동의 제한과 모든 성원 상호간의 방해작용으로 인하여 각자에게 겨우 그가 견뎌낼 만큼의 협소한 여지가 주어지는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때 자유는 한낱 소극적으로 파악된 데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법·인륜·국가, 그리고 오직 이것만이 자유의 적극적 현실태이며 그 충족인 것이다. 개별자의 임의성은 결코 자유일 수가 없다. 따라서 제한된 자유는 많은 욕구의 특수적인 면에 관계되는 자의에 불과할 뿐이다. (161)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모든 이치를 그는 국가로부터 힘입고 있는 까닭에, 결국 그는 국가 안에서만 자기 본질을 지니는 셈이다. 그리하여 또한 인간은 그가 지니는 일체의 가치와 일체의 정신적 현실성도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여기서 진리는 일반의지와 주관적 의지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것이 국가 안에서는 법률이나 일반적 내지 이성적인 모든 규정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 주관적 의지 즉 열정은 활동적인 것, 그리고 실현시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이념은 내면적인 것으로서 결국 이 양면적 종합으로서의 국가야말로 현존하는 참으로 인륜적인 생명체이다. (162)


우리는 정신적 개체, 즉 민족이 자체 안에서 계통화된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한, 이를 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호칭이 자칫 애매한 뜻을 풍기는 이유는 흔히 우리가 국가와 국법을 종교·학문·예술과 구별하여 다만 이를 정치적 측면에서만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국가는, 마치 우리가 정신적인 것의 현상을 말할 때, 왕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한 민족을 정신적 개체로 파악하거니와, 이때 우리는 민족의 외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민족의 정신이라고 불렀던 것, 다시 말해서 민족의 진리나 본질에 관한 국민의 자기 의식과, 그리고 민족 자체에게 진리 일반으로 통용되는 것, 즉 국민 속에 살아 있으면서 이를 지배하는 모든 정신적 힘을 들추어내는 셈이다....그런데 보편성의 이러한 형식을 취하면서 국가가 형성해 놓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특정한 내용이 곧 민족의 정신 그 자체이다. 현실적인 국가는 모든 그의 특수한 사건·전쟁·제도 등에서 바로 이 정신에 의하여 활력이 불어넣어져 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내용은 전적으로 자의, 개별적 특성, 순간적 착상, 개성이나 우연성에서 벗어난 확고하고 견실한 것이다. (166)


헤겔이 여기에서 특수자와 보편자와의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헤겔은 단지 두 입장의 가운데에서 아주 잠시만 유지될 수 있는 평형점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국가-정신에 의한 전적인 지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들 간의 불협화음이 놓여있는 그 사이 어딘가 말이다. 다만 그가 이야기한 '자유의 적극적 현실태'로서의 공동체는--오늘날 공동체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적 지향점이 되는--분명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자유에 대한 비판으로서 남아있다. 이때 지적되어야 할 점은, 먼저 정신=이념의 담지자로서의 국가와 그것을 실현시키는 매개로서의 주관적 의지=개인이라는 도식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개인으로부터 이념이 발돋움할 수 없다면(아마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칸트겠지만), 혹은 개인이 단순히 국가/공동체로부터 주어진 이념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며 그것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탄생할 수 있는 장소라는 논리가 선행해야 할 때만 헤겔의 논지를 거부할 수 있다(아도르노가 비판적 개인에 때로 체념섞인 호의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부르주아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헤겔을 비판하기 위한 근본적인 시작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공동체 주의자들, 적어도 국가의 전적인 지배를 거부하는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주어진 논리적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복수의 이념을 적어도 동적인 형태로라도 갖는 '공동체'가 가능한가?(적대, 좀 더 오래된 문제로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문제를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문제로 끌어들인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떠오른다) 정신이 아닌 정신'들'의 공동체는 가능한가? 다시 질문한다면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활동이 사실은 (지배적인 정신과 다른) 정신의 소산물일 때, 우리는 우연적인 것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가? 혹은, 아도르노의 하이데거 비판의 한 형식을 빌려 말한다면, 헤겔은 사실 이미 실체화되었다는 점을 빼고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요소를 자의적으로 필연으로서 승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필연적인 것=정신은 어떻게 규정가능한가?(헤겔의 편리한 무기: 사후적 시점) 



국가의 정신은 이러한 인륜성, 즉 자신의 정신과는 차이가 있다. 국가의 정신은 사상이나 감정의 형식을 띠고 있는 정신이 아니라 의식과 의욕과 앎의 형식을 띠고 있는 정신이다. 국가는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자연의 세계로서 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풍속이 인륜적 존재의 직접적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가가 있는 데에는 법률이 속하는 까닭에, 결국 이것은 풍속이 한낱 직접적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인식된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의 형식을 띠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보편적인 것이 인식됨으로써 국가의 정신적 요소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때 개인은 법률에 복조앟면서 그 자신이 바로 이러한 복종 속에서 자유를 지닌다는 것을 깨우치거니와 이럼으로써 개인은 곧 자기의 고유한 의지와 관계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여기에 바라고 인식된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국가 속에는 개인의 자립성이 현존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인식하는 자이기 때문데, 다/시 말하면 그들의 자아를 보편자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는 이러한 자립성이 현존하지 않거니와 여기서 가족의 구성원들을 결합하는 것은 자연충동이다. 국가 안에서 비로소 그들은 자기 반성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국가 안에서는 개인에게 대상화되어 있는 것, 즉 이들 개인에게 대립해 있는 것과 개인이 이에 반하여 스스로의 자립성을 지니는 것 사이의 분열이 빚어진다. (172-73)


세번째로 논의해야 할 점은 사법privatrecht, 즉 바로 지금 언급된 바 있는 유한적 욕구와 관련된 법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는 인격적 자유의 발달에 관한 문제, 즉 노예제도는 시행될 수 없다거나 혹은 소유는 자유롭다라는 등의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된다. 완전한 인격적 자유나 완전히 자유로운 소유란 오직 전적으로 특정한 원리를 지니는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즉 법의 원리는 어디까지나 일반적 원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예컨대 기독교적 종교가 표방하는 일반적 원리는 첫째로 하나의 정신, 즉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 둘째로 모든 개인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절대적 정신성을 부여받아야만 할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서 개인은 그 인격면에서 무한적이며 또한 자기의식 일반으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정받는다....이런 까닭에 기독교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은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다시 말하면 재산, 그것도 특히 자유로운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193)


개인의 자립성이라는 문제. 개인의 자립성은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반성적인 것이다. / 동시에 개인의 소유권. 자립성과 사적 소유의 연결.


만약 개별적 의지의 원리가 국가의 자유를 받드는 유일한 의무로 간주되며 또 국가에 의하여, 그리고 이 국가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에 개별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아무런 헌법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개별적 의지의 원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장치는 국가가 필요로 할 만한 것에 주목하여 자기 의견을 공표하는 몰의지적인 준거에 지나지 않으며, 다시 개개인을 소집하여 투표를 시킴으로써 여기에 나타난 각기 다른 제안에 대한 표수를 산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숫자상의 운산을 제도화하여 찬반 결정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 국가 그 자체는 하나의 추상체로서 이는 보편적인 실재성을 시민에 두고 있지만, 또한 이 국가는 현실적인 까닭에 한낱 일반적인 실존은 자신을 개체적인 의지와 활동으로 규정하여야만 한다. 여기서 정부와 국가 행정 일반의 필요, 즉 허다한 국가업무를 관장하여 이에 관하여 결의하거나 집행방법을 결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를 실제업무에 준용해야 할 시민에게 명령을 내리는 당사자들의 개별화나 선별의 필요가 /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국가에서도 역시 국민이 전쟁을 결의하면 장군이 그들의 진두에서 전쟁을 지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럼으로써 또한 명령하는 쪽과 복종하는 쪽,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구별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195-96)


아마도 직접적으로 로크를 비판하며, 명령하는 쪽으로서의 정부와 국가 행정(이후 <법철학>에서 상술될)의 역할을 꺼내드는 대목.


실체로서의 국가는 여러 기관·활동범위, 그리고 특수한 보편성을 갖춘 하나의 체계로서, 이는 모두 그 자체로서는 각기 독립적이지만 그의 활동방향은 전체를 발현시키는 가운데 각기 그 독립성을 지양하는 데 있다. 유기적 생명체의 경우에는 그와 같이 특수화된 독립성이 서로 대립한다는 데 대하여 거론할 여지가 없으니, 즉 동물의 경우만 / 하더라도 그를 구성하는 모든 미립자 속에 생명의 일반적 요소는 현존해 있다. 그리하여 만약 일반적 요소가 그 속에서 제외되어 버리면, 거기에는 단순한 무기물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가지 국헌이 서로 구별되는 것은 이와 같은 총체성이 형태화되어 있는 그 형식과 관련된다. (200-01)


통일과 통일의 해체. KM; '국가' 혹은 '운명공동체'의 이론에서 개별자/특수자로서의 proletariat를 구별.


...오직 국민만이 이성과 통찰력을 지니며, 또 정의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위험스러운 그릇된 전제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국민들 가운데 각 파벌마다 국민의 이름을 걸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를 구성하는 데는 오직 교양이 뒷받침된 인식이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지, 결코 국민 대중에게 맡겨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204-05)


이제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은 국가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립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세계사 속의 그 어떤 국가도 바로 이 절대정신의 권리를 자처하고 나설 수는 없다. 모든 개개의 국가는 자립적인 개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한 나라의 독립은 오직 또 다른 나라의 독립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존중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계약에 의하여 확정되는데, 적어도 여기서는 법률상의 근거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는 이보다 더 고차적인 법이 유효하고 타당하다..../ 우리로서는 모든 국가에 대한 세계정신의 권리를 주목하면 되는 것이다. (206-07)


C. 세계사의 도정


동물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사유하듯이 또한 오직 인간만이, 그것도 오로지 사유하는 까닭에 자유를 지닌다. 자유의 의식이란 개인이 그 스스로를 인격으로서, 다시 말하면 그의 개별태 속에서 스스로를 자기 내적인 일반자로서, 그리고 일체의 특수자를 추상하거나 방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서, 또 스스로를 자기내적인 무한자로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238)



부록 1; 자연연관성 혹은 세계사의 지리적 기초


즉 인간이 일단은 감성적 존재인 한, 그는 어디까지나 자연과의 감성적 연관성속에서 자기 내적 반성을 거치는 가운데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57)


부록2; 세계사의 구분


결국 세계사의 목표는 정신이 스스로를 하나의 자연, 또는 자기에게 적합한 세계로 완성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정신에 관한 그 개념을 바로 이 제2의 자연, 즉 정신의 개념을 통하여 산출된 이 현실 속에서 발견하고, 객관성 속에서 자기의 주관적 자유와 합리성의 의식을 지니는 데 있다. 이것이 곧 이념 일반의 진보이며, 또한 이와 같은 입장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궁극적 의미이다. (336-37)


: "제2의 자연"


부록3; 1826 · 1827년도 겨울학기 강의의 보충


세계사의 면밀한 고찰을 통하여 나타나는 여러 대립은 일반적으로, / 첫째는 주관적 이성과 그 대상이 되는 역사와의 대립으로서, 이는 이론적 대립으로 불릴 수가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자유와 필연의 관계, 혹은 실천적 대립이 있다. (338-39)

국가의 정신은 이러한 인륜성, 즉 자신의 정신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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