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_Giving an Account of Oneself_ 인용 및 노트. [130823-31]

Reading 2014.03.18 11:59



*2013년 8월 23일 페이스북.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를 다 읽었다. 책 한 권 읽기가 쉽지 않은 내 환경을 이해하는 분들께는 조금 의아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곧바로 한번 더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 책이 한 번 읽어서 도저히 이해못할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다. <불확실한 삶>보다는 좀 더 까다롭고 집중해서 읽어야하겠지만, 국역본은 버틀러의 악명높은 글쓰기가 온전히 다가올 정도로 문장이 어렵지는 않다. 다만 여러 주제의 분산된 글쓰기로 기억되는 <불확실한 삶>과는 달리 조금 더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 장의 챕터로 구성된 <설명하기>는 나름의 서사를 갖는다. 버틀러는 1장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조망한 뒤, 2장에서는 타자가 주체의 기원에서부터 주체가 제거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 타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새롭지는 않은) 주장으로 나아가, 3장에서 비로소 다시 1장에서 슬쩍 보여준 윤리와 책임의 문제로 진입한다. 중요하지 않은 장은 없겠지만 내게는 3장이 역시 제일 중요하고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버틀러는 크게 여섯 명의 사상가들, 헤겔, 니체, (정신분석가) 장 라플랑슈Jean Laplanche, 이마누엘 레비나스, 푸코, 아도르노를 다루는데, 분량을 떠나서 핵심은 마지막 둘인 푸코와 아도르노에 있다. 각각 헤겔과 니체가 1장에서부터 버틀러가 다루는 문제틀의 시작에 해당한다면,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는 라플랑슈와 레비나스를 다루면서, 또 대립시키면서 논의를 전진시키며(버틀러는 라플랑슈에 좀 더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면밀하게 검토되는 쪽은 레비나스다) , 최종적으로 3장에서는 아도르노와 푸코를 연결시키면서 텍스트 전체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다만 버틀러가 흔히 그렇다고 얘기되듯--나는 버틀러에 대해서 대략의 소감을 말할 정도로 그를 읽지는 않았다--결론은 최초에 독자가 기대했을 법할 정도로 아주 분명히 나지는 않는다. 물론 버틀러는 단호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가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게 과연 최초의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변으로 읽힐 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다시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텍스트 자체가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당연히 좀 더 꼼꼼히 읽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몇 가지 논점이 내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던적인/포스트구조주의적인 주체구성의 틀을 받아들이면서도, 일견 (윤리적 책임을 논하기 위해 필요한)주체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길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떻게 다시금 윤리적 책임의 문제를 꺼낼 수 있는가? 양효실 선생의 역자 소개에서도 언급되듯 버틀러가 애초에 포스트모던 이론가로 분류되었다면, 그가 이 책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은 그를 단순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로 볼 수 없게 만든다(각자 나아가는 방향이 꽤나 다르지만 나는 그와 지젝, 바디우, 가라타니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 이후'의 사상가로 간주한다--이 지점에서 나는 역자의 해제와 시각이 조금 다르다). 버틀러가 아도르노와 푸코, 특히나 진정한 후기의 푸코(통상적으로 한국에서는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권>의 푸코를 후기 푸코라 간주하곤 하지만, 위의 두 책은 집필된 시기나 조금 더 앞선 텍스트, 예컨대 <담론의 질서>와 같은 저술과의 관계에서 볼 때는 단절보다는 연속적인 면모가 좀 더 강하며, 오히려 <성의 역사 1권>과 10년 가까운 단절이 있었던 <성의 역사 2권> 및 <성의 역사 3권>에 '후기'라는 수식어가 붙는 쪽이 알맞다고 본다. 푸코의 권력 이론은 담론의 이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쪽에 가깝고, 오히려 주체의 자기구성, self-making 과 같은 문제야말로 푸코 자신의 권력 이론에 내재한 '담론의 감옥'에 제출하기 위한 답변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내가 알기로 진정한 의미에서 후기 푸코를 제대로 다룬 책은 몇 종 없다. 디디에 에리봉의 전기가 어느 정도 '단절'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고--그러나 이 책이 이론적인 면모를 충분히 해갈하지는 않는다--, 푸코를 다룬 책 중에서 그의 전체적인 면모를 가장 잘 조망한 책은 역시 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이다; 나는 지금까지 읽은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개설서 중에서 사토의 책만한 걸 본 적이 없다)를 연결시키는 까닭도 결국에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출하기 위해서이다. 이 주제 자체가, 결국에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틀 위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동시에 이론적인 태도와 삶의 태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윤리/도덕을 다루고자 하는 내게 중요한 문제다.

텍스트 자체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나는 이 텍스트는 분명히 (다소 헤겔적인 뉘앙스를 띠고) '서사'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윗 부분에서 몇 번 그런 언질을 남겼듯, 3장은 결국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며, 2장은 그 질문의 시작점이자 3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설명하기>는 운동하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나는 이런 것들을 '서사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런 종류의 텍스트는, 마치 헤겔이 그러하듯, 전체의 시점에서부터 다시금 세부를 조망해야만 한다. 물론 <설명하기>가 헤겔의 위대한 <현상학>만큼이나 서사라고 불릴 수는 없겠지만, 이 텍스트의 서사적인 측면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고, 그런만큼 버틀러를 충실하게 따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일독을 마친 후에야 생기는 전체의 시점이 필요하다(그러나 내게 과연 그러한 시간과 기억력이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런 자신감은 없다...).

사실 내게 이 텍스트가 진짜로 중요한 이유는, 버틀러가 다름 아닌 푸코와 아도르노를 연결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대략 2년 전 푸코를 어느 정도 읽고(기껏해야 4,5권 정도였지만) 아도르노를 처음 접하던 시절에 나는 둘 사이에 꽤나 의미있는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다만 지금은 단지 둘 만이 아닌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사상과 사상의 역사적 배경을 연결시킬 때 필연적인 유사성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내게 이론 공부의 길을 사실상 열어준 선배 U에게 내 막연한 감상을 이야기했을 때 곧바로 일축당했지만(사실 선배U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쪽에는, 벤야민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푸코를 아도르노와 비교하는 걸 기분나빠하지 않았었나 싶다ㅋ), 그리고 푸코와 하버마스를 연결하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정작 아도르노와 푸코를 연결하려는 작업이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적어도 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갖가지 경향성들과 주체구성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사유들이, 그것도 역사적인 시각을 항상 잊지 않는 사유들이 애초에 맞대어질 수 없다면 이상한 게 아닐까? 비록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에는 여전히 나의 아도르노 읽기는 한정적이며 후기의 푸코는 사실상 미지의 영역에 가깝지만, 어쨌든 나는 버틀러의 텍스트로부터 그러한 시도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실행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시도가 행해졌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좀 더 철저하게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버틀러는 다만 아도르노는 약간 고정적인 항수처럼 다루며, 후기 푸코를 독해하면서 아도르노의 문제틀과 연결시키기 위해 끌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석과 철학, 그리고 (카프카의 텍스트 일부분이지만)문학을 오가면서 논의를 아주 천천히 그러다가 갑자기 확 진전시키는 버틀러의 움직임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가 다루는 텍스트의 광범위함만이 아닌 그가 어떻게 텍스트를 다루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텍스트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다루는 지를 드러내는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수사학rhetoric을 다루는, 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말해지는가를 다루는 버틀러의 논의방식을 다시금 주목하고 싶다: 이 부분에서, 나는 <설명하기>의 곳곳에서 폴 드 만Paul de Man의 그림자를 느낀다. 결국 나의 이론공부 어디 한 구석에는 드 만의 그림자가 호시탐탐 자신의 텍스트를 읽어줄 것을 요구하면서 남아 있고, 나는 (가라타니와 함께) 폴 드 만으로부터 배태한 또 한 명의 포스트-포스트모던 이론가를 마주한다.




*2013년 8월 31일 페이스북. 이유는 모르겠는데 뒤의 1/3 정도 인용 및 코멘트가 잘렸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적겠지만 그럴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Butler, Judith. _Giving an Account of Oneself_. 2005.

(국역본은 2013년 양효실 선생 역으로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나왔다)


인용 중간에 "/" 표시는 페이지 분할, "//"는 문단분할 을 가리킨다. 



1장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



"명령이 자기-제작이나 자기-정교화의 행위를 강제한다는 것은 명령이 주체에게 일방적이거나 결정론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령은 주체의 자기-정교화를 위한 무대를 설치하는데, 이런 자기-정교화는 항상 부과된 일군의 규범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규범은 자신의 필연적 결과로 주체를 생산하지 않으며, 주체는 또한 자신의 반성성을 취임시키는 규범을 무시할 만큼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의 조건들과 늘 갈등한다. 이런 갈등 중에 행위성 혹은 자유가 작동한다면, 그것은강제하면서 강제를 제한하는 장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윤리적 행위성은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식으로건 생산해야 할 때에도, 윤리적 행위성의 갈등이나 일차적 딜레마는 세계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삶의 조건들과 갈등한다는 것, 갈등--행위성--은 역설적이지만 이런 일차적인 조건으로서의 비자유unfreedom의 지속에 의해 가능해질 수도 있다." (36-37)


;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초점을 둔)이론의 역사에서 말한다면, 알튀세를 대표자로 볼 수 있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시작점은 고전적 유물론의 경제결정론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아도르노가 던진 비슷한 질문에서 함축되듯, 체제는 단순히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동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사실을 해명해야 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물질적인 요건만이 아닌 어떤 요인이 인간주체의 삶을 조정하는가? 알튀세에게는 이데올로기,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푸코에게는 담론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아마도 그람시의 '헤게모니'에서 선취될,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전장 자체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시점은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 정도에서나 도입된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결정론을 비판하는 '정신의 계보학'은 최초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가 하나의 결정론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데올로기의 초역사성에 각주로 따라붙는 언제나-이미always-already와 같은 표현이라거나, 푸코에게 가해진 '담론의 감옥' 같은 비판이라거나. 사토 요시유키(<권력과 저항>)가 보여주듯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권력이론의 대표적인 저자들, 알튀세, 푸코, 데리다, 들뢰즈는 이런 이론적 폐색을 어떤 식으로든 돌파하려고 했고--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대표적으로 아도르노의 체계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남았으며, 심지어 영국의 E.P. 톰슨에서도(<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의 서문을 보라) 반향을 남긴다--, 이후 이들의 사상적 후계자들에게도 이 문제는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주자들 중 한 명인 버틀러는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윤리적 주체를 답변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표현이 단순한 절충론으로 오해되는 걸 막기 위해서 보다 상세한 설명이 붙는다; "윤리적 행위성의 갈등이나 일차적 딜레마는 세계에 의해 생산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 반성성을 작동시키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삶의 조건들과 갈등한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사실 이전의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에게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버틀러보다 유물론의 입장에 가까운 제임슨은 저 유명하고 그만큼 난해한 <정치적 무의식>_The Political Unconscious_의 1장, "해석에 관하여"("On Interpretation")에서 유사한 모델링을 전개한다. 다만 버틀러에게 '규범'이 우리의 제한된 자율성이 작동하는 무대였다면,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적 층위의 결정"을 라캉의 실재the Real와 등치시키는) 제임슨에게는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 가장 중요한 토대로 남아 있으며 이 위에서 의식의 갖가지 영역들이 반자율적semi-autonomous으로 기능하며 텍스트와 주체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전자가 보다 유동적인 체제를 전제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역으로 가라타니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표현을 빌리자면, 물질적인 사회구조를 생략하고 있다고도.



"여기서 나는 보다 일반적인 다음 질문에 천착하고 싶다--자기정초적이지 않은 주체, 다시 말해서 출현의 조건이 완전히 설명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그런 주체를 단언하면 책임의 가능성,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훼손될까? // 우리가 말하자면 처음부터 나뉘어졌고, 무정초적이거나 혹은 모순적인 게 진짜 사실이라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책임감의 개념을 정초하기는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자기-지식의 한계를 시인하는 주체 형성 이론이 어떻게 윤리와 책임을 개념화하는데 봉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주체가 자신에게 불투명하고, 완전히 투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전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거나 타자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자유와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가 분명 맞다.주체의 불투명성은 어쩌면 주체가 관계적 존재, 초기의 일차적인primary 관계들이 항상 의식적 지식에 소용이 없는 그런 존재로 구상되었기에 나온 결과일지 모른다. 자신에 대한 무지unknowingness의 순간들은 타자들과의 관계의 맥락에서 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런 관계들이 명백하고 반성적인 주제화thematization에 항상 소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일차적 관계성의 형태들을 요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회복불가능한 관계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그런 불투명성은 우리의 형성 아안으로 들어올 것 같고, 의존성의 관계들 안에서 형성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위상에서 그런 불투명성이 나오는 것이다. // 이런 자아에의 일차적인 불투명성--형성적 관계들에서 유래하는--을 가정하는 것은 타자에게 윤리적 태도를 취하는 데 특수한 함의를 갖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불투명한 것이 타자와의 / 관계 때문이라면, 또 이런 타자와의 관계가 우리의 윤리적 책임감의 현장을 이룬다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다름아닌 주체가 자신에게 불투명하기 때문에 주체는 가장 중요한 자신의 몇몇 윤리적 속박bonds을 초래하고 유지한다는 결론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37-39)


; 이 책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목표하는 바를 가장 명확한 언어로 진술하는 부분이다. 수많은 사상가들 및 그들의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가 이어지면서 나아가는 <설명하기>를 불필요하게 난해하게 간주하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은 이 부분을 항상 염두에 두고 독서를 이어나가야 한다. 자, 여기에서 버틀러의 주장을 좀 더 간편하게 정리하는 시도를 해본다면, 기존에 주체가 담론과 규범의 효과들로 형성된다고 주장했던 이론들이 결과적으로 주체로부터 윤리적 책임을 박탈한다고 독해되었다면(주체가 따르는 규범들이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주체 자체가 더 이상 윤리적 토대를 담지한다고 볼 수 없기에), 버틀러는 오히려 주체가 담론, 규범, 타자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모든 주체가 보편적으로 불안정하고 서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윤리적 책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작업을 통해 버틀러는 일차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주체로부터 윤리적 책임감을 끌어내며 이차적으로 포스트모던(이라고 간주되는) 이론가들의 작업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작업이 전제하는 것, 그가 과연 어떠한 윤리적 책임감에 도달하려는지, 그가 자신 도달하려는 목적지 자체에 대해서도 충분히 비판적인지는 끊임없이 질문되어야 한다.



"가끔은 다름 아닌 타자의 인정불가능성이 인정을 통치하는 규범들에 위기를 초래한다...//푸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개방은 확립된 진리 체제의 한계를 문제삼는 것이다. 푸코는 그때 자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덕의 신호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을 인정하려는 욕망 혹은 저 사람의 인정을 얻으려는 욕망이 때로 나 자신의 진리를 확립시키는 진리 체제에 질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동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규범들 안에서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규범들과의 비판적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따라서 설사 윤리적 관계를 2자적인 것으로, 아니 전pre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윤리적 질문을 제기할 때--"나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나는 규범성의 국면 외에 권력의 문제 틀에도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우선 "나"와 "너"가 존재해야만 하고, 또 규범적 틀이 이런 출현과 만남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규범들은 나의 행위를 인도할 뿐 아니라 나 자신과 타자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만남의 출현을 조건짓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46-47)


; 버틀러는 지속적으로 타자("너")와 사회적 규범을 구별한다. 주체가 최초의 구성순간에 양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할 때에도 버틀러가 둘을 하나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설명하기>는 본격적으로 타자와 규범을 적어도 주체형성의 기능에서는 대립시키고 있지 않지만, 이 부분은 둘을 단순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존재로 인해 규범(주체와 동일시되지는 않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 규범과 타자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거의 몇 안되는 부분이기에 염두에 둘 가치가 있다. 둘의 구별에 대해 버틀러가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분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전제-암시하는 내용들은 텍스트를 다 읽은 뒤에도 우리들이 계속해서 떠올려야만 한다.



"사실 <정신현상학>을 따라 말한다면, 나는 내가 겪는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된다. 즉 인정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타자가 되고, 그렇게 해서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정지한다. 그렇다면 인정의 과정에는 구성적 상실constitutive loss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정의 행위를 통해/변형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나의 과거의 모든 것이 모여서 인정의 행위를 통해 알려지지는 않는다. 그 행위는 과거의 조직방식과 그 의미를 바꿈과 동시에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현재 역시도 바꾼다. 인정이란 행위를 통해 "자기에로의 귀환"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도 불가능해진다. 타자와의 만남은 어떤 귀환도 불가능할 자아의 변형을 초래한다. 이런 교환이 일어날 때 자아와 관련해서 인정되는 것은, 자아는 자기 내부에 머무르기 불가능하다고 밝혀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할수 없이 자기 밖에 있어야 하고 자기 밖에서 행동한다. 우리는 자기 밖에서, 자기에게 외적으로 발생하는 매개를 통해서, 자신이 만들지 않았던 규범이나 관습--이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저자나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의 작인agent으로 식별할 수 없다--에 의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의 관점의 가능성 내부에서부터 나를 조건짓고 동시에 나의 방향상실을 초래하는 관점은 타자의 관점에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관점은 내가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과 또한 타자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도 통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립해 있는 단순한 짝dyad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둘 사이의 교환을 조건짓고 매개하는 것은 언어, 관습, 교환에 관여한 이들의 관점을 초과하고, 사회적 성격을 가진 규범들의 침전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개인적인 만남을 야기하고 방향상실을 초래하는 비개인적 관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 헤겔은 가끔 인정을 2자적 구조로 이해했다는 비난을 받지만, 우리는 인정투쟁이 <정신현상학>의 핵심적인 부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신현상학>에서 무대화된 인정투쟁은 2자 관계를 참조해서 사회적 삶을 이해하기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결국 이 장면에서 도출되는 것은 관습Sittlichkeit ["인륜성"] 체계와 규범에 대한 사회적 설명이다. 상호적 인정은 그런 규범을 통해 생사투쟁이나 속박체계 system of bondage 둘 중 어느 하나가 함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안정적인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다. // 2자적 교환은 인정투쟁에 가담한 이들이 관점을 초과하는 일군의 규범들을 가리킨다. 무엇이 인정을 가능케 하는가를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단지 타자라고, 나를 알고 있고 나를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타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 타자 역시 오직 암묵적이긴 하지만 어떤 기준, 즉 누군가에게 자아와 관련해서 인정할만한 것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확립하는 기준인 내가 누군인지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한 틀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일차적으로는 내가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내 얼굴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내적 능력을 통해서 인정--그럼에도 우리는 인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을 수여한다. 나의 얼굴이 독해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얼굴의 해독성을 조건짓는 시각적 틀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가능하다....가령 인간의 얼굴에 윤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우선 인간적인 것the human을 위한 틀, 그때그때 사례에 맞춰 바꿀 수 있는 틀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시각적 재현을 놓고 어떤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려한다면, 인간의 얼굴로서의 얼굴에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을 조건짓고 매개하는 것은 다양하게 인간화하고 탈인간화하는 참조 틀일 것이다. //


 따라서 얼굴에 윤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시각 장의 규범성을 필요로 한다. 얼굴이 나타나는 내부로서의 인식론적인 장이 이미 존재할 뿐 아니라 권력의 작동 역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오직 어떤 특수한 인간중심적인anthropocentric 성향과 문화적 틀에 의해서만, 주어진 어떤 하나의 얼굴은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얼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누구는 얼굴, 쉽게 읽히는 가시적인 얼굴을 획득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 만남의 틀을 이루는 언어가 존재한다. 그 언어에 배태되어embedded 있는 것은, 무엇이 인정가능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구성하지 않는가와 연관된 일군의 규범들이다. 이것이 푸코의 핵심이고, 다음과 같이 질문할 때 푸코는 어떤 면에서 헤겔을 보충한다--"오늘날의 존재 질서에 유념한다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이런 "질서"가 자신의 생성의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것, 그의 말에 따른다면 진리 체제는 그의 자아의 진리, 그가 자신에 대해 제공하는 진리, 그가 인정할 수 있는 인간으로 알려지고 인간이게 하는 진리, 그가 자신에 대해 부여할 수 있는 설명을 구성하거나 구성하지 않을 것을 강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51-55)


; 1장의 마지막 부분인 이 긴 인용문에서 버틀러는 자신이 당장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을 주제까지도 함축하는 중요한 이론적 진술들을 하고 있다. 직전의 인용문에서 타자를 통해 규범의 비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이 인용문에서 버틀러는 타자를 초과하는 규범을 이야기하면서 명백히 헤겔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주체의 자기반성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주어진 나, 그보다 발전된 주어진 사회를 반성하는 나 보다 더 우월한 영역으로서 인륜성의 체계를 제시한다(그리고 그 최종적인 도달점이 민족=국가다; 그러나 스스로를 반헤겔주의자 전통에 놓는 적지 않은 이들은 헤겔이 이미 그들이 지향점으로 제시하는 지점을 돌파한 후에 인륜성을 내세운다는 것을 간과하곤 한다). 물론 버틀러가 그러한 규범, 푸코식의 용어로 "진리 체제"로 다시 표현되는 것을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리 체제의 역사성과 가변성, 다시 말해 그것의 한계를 (마치 주체의 한계를 지적하듯) 계속해서 강조한다--국역본 표지에 인쇄된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는가?"라는 문구는 그래서 이 텍스트가 한계를 다루고 있음을, 다시 말해 칸트적 비판의 성격이 짙게 배어있음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다(동시에 우리는 또 한명의 중요한 독일관념론자 헤겔이 칸트의 작업을 이어받아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진리 체제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곧바로 주체 혹은 그 역시도 하나의 주체인 (특수한) 타자가 진리 체제를 초월한 지점에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뒤이어 언급될 레비나스가 떠오르지 않으면 이상할 "얼굴"과 같은 표현을 언급하면서, 그 "얼굴"의 인식 또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규범으로부터 가능해짐을 지적하는 것, 즉 거칠게 말하면 레비나스를 헤겔에 인도하는 것. 어디까지나 자아는 진리 체제 안에서 태어나며 자신의 진리 체제를 의심하는 싸움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래서 후기의 푸코를 헤겔(뒤이어 아도르노)에 접근시키는 버틀러의 작업은 푸코가 행한 주체의 자기형성이 단순히 자아의 문제로 축소된 것이 아님을, 인식론적으로 보다 정교화된 모델링을 하고 있음을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주체와 타자를 초과하는 규범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적어도 규범 자체에 대해서는, 규범의 역사성과 가변성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는 추가적인 작업이 행해지지는 않는다(이 책의 후반부는 주체의 윤리를 주체 바깥에 있으면서도 주체를 형성한 사회에 연결시키는, 그래서 도덕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언급될 수 있도록 하면서 끝난다). 한편으로 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고 공들여 다뤄지는 푸코와, 단 몇 번 언급될 뿐이지만 텍스트 전체에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헤겔(버틀러는 푸코가 니체의 작업을 보완계승한다고 말하는데, 헤겔의 작업을 아주 작게나마 보완계승하는 역으로 아도르노와 푸코가 호출된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기존의 규범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논의들, 그리고 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의들이 각각 자신의 강조점을 지나치게 확대하면서 사실상 윤리와 도덕의 토대를 무너트리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주체의 주관적인 선택을 무반성적으로 긍정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면, 텍스트 전반에 걸쳐 도발적이면서도 신중한 버틀러가 규범의 한계를 잊지 않으면서도 주체와 타자주체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 나아가 주체의 주관성을 주체 밖에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단순히 우연적이라고 볼 수 없는 (예컨대 레비나스가 타자를 강조하는 방식이 '부정신학'이라는 조롱을 받는 데는 타자의 우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을 도입하는 것은 주체-주관성의 한계를 짓기 위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주체, 타자, 규범의 한계를 모두 지적하면서도, 그래서 그것들의 경계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도, 그것들의 경계를 녹여없애지는 않는 것. 주체는, 심지어 규범조차도수행적으로 구성되지만, 그 수행은 타자와 규범에 의해서 제한된 선택지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헤겔의 상호 인정 개념에서는 결국, 항상 거울이 암묵적으로 작동하는데, 이는 나는 타자가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어느 만큼은 알아야 하고, 타자가 우리 둘의 비슷함을/똑같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방에는 빛이 많이 있고, 거울들은 보통 유리창이기도 하다는 기가 막힌 일치도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인정을 이해한다면 재발하는recursive 미메시스의 악무한에 저항하는 외재성은 만날 일이 없다. 창문들을 어둡게 가리거나 빛을 흐리게 하는 불투명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인정의 장면에 대한 포스트-헤겔적인 독해, 즉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불투명성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야기시킨다는 독해를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항상적이고 부분적인 맹목, 우리 모두 공유한 맹목에 기초한 윤리 아닐까 싶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쓸만한 담론으로 제시하는 방법이 매회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이제, 자기들이 매순간 자기-동일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중지시키려는 타자들에 대한 인내를 당연히 수반할지 모른다. 자기-동일성, 더 특수하게는 완벽한 일관성coherence에 대한 요구를 중지시키는 일은 내게는 어떤 윤리적 폭력, 즉 우리가 항상 자기-동일성을 표명하고manifest 유지해야 만하며 타자들 역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폭력에 맞서는 일인 것 같다. 항상 시간의 지평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에게 그 규범은 만족시키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해도 어려운 규범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은, / 일인칭 관점과 똑같은 시간성을 갖지 않는 규범적 담론에 의해 야기된다. 담론의 이런 시간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시간성은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방향을 상실하고, 탈중심화를 겪고, 자기-동일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하는" 조건에서만 인정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이런 피할 수 없는 윤리적 실패로부터 새로운 의미의 윤리가 출현할 수는 없을까? 나는 출현할 수 있으며, 승인 자체의 한계를 기꺼이 승인할 수 있는 자발성에 의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우리 자신의 불투명성이나 다른 사람의 불투명성을 승인한다고, 불투명성이 투명성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승인의 한계를 아는 것은 심지어 그 사실마저도 제한된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 결과로 다름아닌 앎의 한계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함과 관대함의 성향도 구성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완전히 알 수 없었던 어떤 것 때문에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이들 역시 자신에 대해 부분적/으로 불투명하게 구성된다--을 용서할 그와 비슷한 의무를 짊어질 것이다." (74-77)


; 버틀러의 2장에서의 목표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부분. 주체를 규범에 인도하기 전, 주체(들)의 불투명성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먼저 밟는다.


타자를 알기 위해 질문을 할 때, 아니 타자에게 최종적으로나 명확하게 네(그/그녀)가 누구인지를 말해달라는 부탁을 할 때에는, 만족할만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만족을 구하지 않고 질문을 열어 놓으면서, 심지어 질문을 계속 견디면서, 우리는 타자를 살려두는데, 왜냐하면 삶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모든 설명을 초과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살려두는 것이 모든 윤리적인 인정에 대한 정의의 일환이라면, 이런 판형의 인정은 지식보다는 오히려 인식적 한계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할 것이다..../...


...오류를 통해 인정을 설명하는 것은 그럼에도 욕망의 문제와 연관해서 여전히 작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정을 윤리적 기획으로 개조하려면, 인정을 원리상 만족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헤겔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존재욕망, 즉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욕망...은 오직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정이 욕망을 포획하거나 저지하기 위해 작동한다면, 존재욕망과 자신의 존재 안에서 / 존속하려는 욕망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스피노자는 살려는 욕망, 존속하려는 욕망, 모든 인정 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욕망을 우리를 위해 표식한다. 그리고 인정이 작동할 때 사용되는 용어들은 우리를 고정시키고 포획하려 할 것이기에, 그 용어들은 욕망을 저지하고, 삶을 종식시키려는 위험을 무릅쓴다. 따라서 모든 인정 이론은 인정욕[desire for recognition]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윤리철학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고, 욕망은 인정 자체를 작동시키기 위한 한계와 조건을 설치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77-79)


; 이어지는 단락. "인식적 한계들에 대한 이해"라는 지극히 칸트적 비판의 어휘, 그 한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현할 수 있는 인정--말할 필요도 없는 헤겔--의 윤리, 그리고 그 인정을 끌어올리는 (정신분석적) 욕망. 2장에서 이처럼 다른 계보에 속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론들을 오가면서 주체 인식의 불투명성으로부터 상호 인정에 이르는 가교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어떤 면에서 2장은 가장 복잡하고 현란하게 읽힌다.


...오직 판단을 중지한 상태에서 타자를 경험할 때에만, 우리는 최종적으로 그 타자의 인간성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맞는 말 아닐까. 나는 결코 판단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윤리의 문화적 용어들을 재고할 때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윤리적 관계를 판단 행위로 환원할 수는 없으며, 다름아닌 판단 능력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당하는 자 사이에 선행/하는 관계를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점이다....//...말걸기에 어떤 윤리가 존재하고 사법적 판단을 포함한 판단이 말걸기의 한 형식이라면, 판단의 윤리적 가치는 /그 판단이 취하는 말걸기의 형식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81-83)

탄핵이 탄핵을 받은 주체의 비판적 능력을 마비시키고 탈-비준하기deratify 위해 작동할 때, 탄핵은 다름아닌 윤리적 성찰과 행위에 필요한 능력들을 훼손하거나 심지어 파괴하고 가끔은 자살로 귀겨로딘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생산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미래에는 다르게 행동할 기회를 경험하는 주체의 자기-반성적인 심사국고에 영향을 미치려면, 판단은 삶을 유지하고 증진하는데 봉사하면서 작동해야 한다. (88)


; 판단 이전의 인정에 대한 요구. 윤리의 최소치로서 판단 전의 인정, 상대가 누구든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듣고 동시에 (내가 그에게) 말걸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 <불확실한 삶>에서도 분명하게 주장되지만, 버틀러는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어떤 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보편성이 부정당한 시대 이후에 다시금 어떤 보편성, 보다 유동적인 보편성, 어떤 의미에서 더욱 포괄적이고 강력한 보편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정신분석적인 전이transference의 맥락에서 종종 "너"는 말걸기의 디폴트 구조default structure, 상상의 영역에서의 "너"의 정교화이다. 이 말걸기를 통해 그에 선행하는 더욱 아르카익한 말걸기의 형식들이 전달된다. 전이를 통해 작동하는 발화speech는 정보(나의 삶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서)를 전달하지만, 말은 또한 대화 장면 자체를 바꾸거나 그 장면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수사적 도구이자 동시에 욕망의 도관으로도 기능한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이중의 차원으로 자기-노출적 발화 행위를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소통하고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다른 한편으로 전이는 말걸기의 양태를 구조화하는 소통과 합리성과 견관된 무언의 전제조건들을 다시 창조하고 새로 구성한다. 따라서 전이는 분석적 공간 안에서 일차적 관계성의 재창조, 분석적 작업에 기초하여 새롭거나 변경된 관계(와 관계성을 위한 능력)를 잠재적으로 산출하는 재창조이다. / 서사는 전이의 맥락 내에서 기능한다. 이때 전이는 정보전달의 수단이면서 또한 타자에게 영향을 주려는 언어의 수사적 배치이기도 하다...."나"는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을 함께 고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전이의 맥락에서(전이 없는 들려주기가 있을까?) 너에게 들려준다면, 나는 이러한 들려주기와 함께 뭔가를 하고, 어떤 식으로 너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들려주기는 나에게도 역시 뭔가를 하고 있고, 내가 진행 중에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90-91)


; 정신분석적 전이를 언급하면서 버틀러가 강조하는 주체간의 상호영향은 사실 2장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설명의 원형을 이룬다. 우리는 우리를 성립시키는 데서 타자와 규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또 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곧 우리 자신을 매번 새롭게 성립시키는 수행적 실천이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타자를 대할 때 어떤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버틀러의 주장을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행동으로 (타자를 경유해서라고 하지만) 우리 자신이 바뀌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보존/안녕의 윤리와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까?


삶의 서사적 재구성이 정신분석의 목적일 수 없고, 그렇게 된 이유가 다름아닌 주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항상 타자가 처음부터 거기에, 즉 자아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면 삶은 근본적인 방해를 통해서 구성되고, 심지어 모든 연속성의 가능성보다 먼/저 방해를 받는다. 따라서 자신이 전달하도록 되어 있는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서사적 재구성이라면, 그것은 방해에 종속되기도 해야 한다....지금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면 파편화와 불연속성을 겪었을지 모르는 삶의 재구성에서 서사적 작업이 갖는 중요성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과도한 지배의 조건들은 철저한 파편화의 조건들 못지 않게 해롭다. 심리와 경험--서로에 동화될 수 없는--의 부분들을 연결해줄 서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연결은 편집증적 고립의 극단적인 형태를 낳을 수 있다. 삶이 서사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모든 사건에서 삶 전체가 서사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92-93)


자신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적 노고의 일환이라고 들려주는 정신 건강 규범은, 정신분석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런 규범은 주체 형성의 윤리적 함의의 일부를 거짓되게 말하는 주체의 설명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94)


; 여기서 버틀러는 삶의 여러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단적으로 아메리칸 드림, 자기 계발서 식의 '열심히 하면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다'식의 이야기)로 꿰려는 노력을 '서사적 재구성'이라고 지칭하며, 이를 스스로를 지배하려는 경향과 결부시킨다. 저자의 목적은 그러한 지배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다시 말해 서사적 재구성의 한계지점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이 점에서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근본적으로 칸트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지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제한적인 앎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는 태도라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이 큰 틀에서 <부정변증법>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읽히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보기에, 스스로의 삶을 완결되고 완전한 서사로 봉합하려는 노력은 옳지 않다. 그것은 거짓이자 동시에 무지에 머무르는 태도이다.


내가 설명을 하고 그 설명을 너에게 준다면 나의 서사는 말걸기의 구조에 의존한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나는 우선 메시지를 전달받았어야 하고, 언어를 사용해서 나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기 전에 언어의 가능성으로서의 말걸기의 구조로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는 우선 언어가 타자에게 속하고, 나는 복잡한 미메시스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획득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언어적 행위성의 가능성이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언어에 의해 자신이 메시지를 전달받고 있게 되는 상황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고 이런 말걸기가 나의 개체화에 앞서 나에게 온다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형식을 통해서 나에게 오는 것일까? 심지어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경우에도, 틈과 상해가 특수한 방식으로 우리를 맞이하기에, 이루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항상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 같다. (95)

; 언어를 통한, 우리가 언어 형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언어 형식을 만들어낸 사회의 규범이 우리를 형성한다.


[정신분석가 크리스토퍼 볼라스가 한 여성 환자를 치료했던 사례를 인용하면서] 그녀가 제공한 것은 서사라기보다는 갑자기 방치된 소통과 방향을 상실한 접촉이 재창조된 장면이었다..../ 핵심은...전이 안에서 또 다른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볼라스가 분석자가 자신의 상실과 부재의 경험을 재-경험할 입장을 볼라스 자신에게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전까지는 없던 방식으로 그녀와 소통한 것이고 그 뒤를 이어 나온 대화, 명시적으로 이런 깨진 소통의 형식을 주제화한 대화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은 소통의 양태를 구성하면서, 말걸기의 티폴트 장면을 변경하는 쪽으로 작동한 것이다. (100-01)


...전이는 역-전이와 공조하며 작동하고, 그 와중에 가끔 서사 형식이 구서아는 그 의심스러운 일관성, 즉 말걸기 장면의 수사적 특질들을 고려사항에서 제거시킬지 모르는 일관성을 차단시킨다. ...// 서사적 수단을 통해서는 기술될 수 없는 "보듬어 안음"의 표현적 차원들이 있다. 삶의 부분성 혹은 편파성과 임시성 때문에 삶을 서술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문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전혀 서술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살거나 전혀 서술이 불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심적 제재의 "접합"과 "표현"의 자격을 갖는 것은 내레이션을 초과한다는 것, 그리고 집요하리만치 해명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것이 구조화의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 유념한다면 모든 접합은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105-06)


; 전이를 통해 서사화되지 않는 내용의 공유. 서사의 한계를 알기. 서사의 한계, 서사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 있는 것들 또한, 그것이 하나의 서사로 접합되지는 않을지언정, 전달될 수 있다.


나는 말걸기의 구조는 서사의 한 특질, 즉 서사의 수많은 변화무쌍한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서사의 방해 내지 차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 누군가에게 들려지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서사적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사적 차원을 떠맡는다. 이야기는 그 누군가를 떠맡고, 그 누군가를 보충하고 그 누군가에 근거하여 행위하려 한다. 나의 설명이 시작될 때, 무언가가 언어와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항상 대화적이고, 유령처럼 출몰하고, 무언가를 적재하고, 설득적이고, 전술적이다. 그것은 당연히 진리를 전달하려고 할 것이지만, 오직 관계적 차원으로서의 언어를 실행함으로써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111-12)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최후의 설명이나 적합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는데, "나"는 자신을 취임시킬 말걸기의 장면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설명 자체가 일어나는 말걸기/메시지 전달 구조의 모든 수사적 차원들을 서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걸기 장면의 수사적 차원들은 서사로 환원될 수 없다.(118)


내가 나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설사 내가 어떤 방식인지 항상 알지 못하거나 또 알 수 없다고 해도 항상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나의 말을 받는다고 가정한 사람에게 행해진다.(119)


수신하는 이는 어떤 면에서 수신 자체의 알레고리, 즉 타자에게 접합되거나 적어도 타자가 있는 중에 접합될 수신과의 환영적 관계의 알레고리가 된다. 설사 그것이 알레고리이고 그렇기에 특수한 삶을 이해시킬 일반적 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잘 적용될 수 있는 수신 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120)


; 그 자체로 단일하게 완결된 서사 <-> 항상 '너'라는 존재를 요구하기에, '너'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형식적 문제가 수사적 차원을 불러일으키는(여기에서 폴 드 만Paul de Man을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이야기의 완결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말걸기의 구조; 바로 이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는 항상 완결되지 못하는 기획이 된다.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말했던 내용을 상기할 것. 말걸기라는 형식/구조로 행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말걸기이기 때문에, 곧 수신인을 항상 포괄하기 때문에, 그 수신인이 타자라는 불확정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언제나 완결될 수 없다("나"는 타자의 현존 속에서 자신이 붕괴되고 있음을 안다, 121-22)


장 라플랑슈는 완전한 접합의 한계는, 일차적인 주이상스로의 귀환을 폐제하는 라캉식 "빗금" 때문이 아니라, 성인 세계의 특수성이 아이에게 남기는 압도적이고 수수께끼적인 자국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라플랑슈에게는 오직 아이의 세계에서 보살핌을 제공하는 어른을 구성하는 다양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다. 라플랑슈가 보기에, 이들 양육자가 반드시 오이디푸스적 "아버지"와 "어머니"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전이 내부에서 수수께끼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무의식과 욕동들drives의 형성에 선행하는 일차적 상황인 바, 압도당함being overwhelmed의 잔여이다. (124)


유아는 환경 용어들에 적응하고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의 만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환경에 개방되어야 한다....이러한 개방성은 무의식적인 섹슈얼리티라는 성인의 세계에 대한 조숙한 노출을 구성하기도 한다....그것은 사회적 세계, 메시지, 혹은 이런 환경에서 아이에게 부과되고 어떤 기민한 적응도 불가능한 지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일차적인 자국들을 생산하는 기표들의 결과로서 출현한다. 이런 일차적인 자국은 지탱할 수 없는 일차적인 외상인 라플랑슈가 "절대적인 일차적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차적인 억압은 (어떤 행위성도 이런 억압을 초래하지 못한다. 오직 억압 자체의 행위성만이 존재한다) 무의식을 제정하고 "첫번째 대상-기원들, 즉 욕동의 기원들"을 확립시킨다. 억압되는 것은 이런 일차적인 자국들의 "사물-표상"이다. 외상의 결과로서, 외부에 기원을 두고 있는 대상은 성 욕동의 기원이나 원인으로 취임하게 된다. 욕동들(삶 욕동과 죽음 욕동)은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욕동들은 타자들의 수수께끼적인 욕망의 내면화에서 유래하고 그런 외부/에 기원을 둔 욕망들의 잔여를 전달한다. 그 결과 모든 욕동은 이질성foreignness에 포위당하고 "나"는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자극들impulses에서도 자신이 자신에게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26-27)


라플랑슈는...자신과 위니콧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성적인 인간 존재에게 문제는 우선 나는-아닌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나인 소유first-me possesion를 갖는 것이다. 즉 자아를 너무 많은 타자성에서 출발해서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 세계를 재구성해야하는 자아에서 자리를 이동해 다른 쪽으로 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의 정교화를 집요하리만치 성취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수수께끼적인 이타성[alterity]에 처음부터 포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라플랑슈는 따라서 이질적인 욕망이 "나 자신"의 욕망의 전제조건이라고 단언한다. "나"가 욕망할 때 누가 욕망하는가? 나의 욕망 속에서 다른 사람이 움직이도 있는 것 같고, 이런 이질성이 나 자신을 경계가 정해진 분리된 존재로 의미화하려는 모든 노력을 분쇄한다. (130-31)


; 특히 장 라플랑슈의 정신분석을 경유해 주체의 일차적인 형성과 그 형성과정에서 타자의 압도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버틀러의 서술은 쉽지는 않지만 이해 못할 수준은 아니며, 꼼꼼히 읽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 먼저의 인용에서 주체의 자기 설명이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존립할 수밖에 없음을(이 부분은 라플랑슈에 뒤이은 레비나스의 독해에서 좀 더 분명히 설명된다) 보여주었다면, 지금의 인용에서는 주체 자체의 기원에서부터 타자 및 규범의 개입이 존재함을, 정확히 타자 및 규범들로부터 '나'가 출현했음이 논증된다. 버틀러의 설명이 얼마나 다면적이고 정교하든, 요점은 같다. 타자 혹은 규범으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개인'으로서 우리가 존재하기란, 존재의 차원과 삶-행위의 차원 모두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의무를 강조하면서 말하듯, 우리가 삶을 완결되고 독립된 서사로 만들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말하기가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생존양식mode of living 자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조차도 타자에게 우리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설명을 포기없이 시도해야만 한다.


만약 주체로서의 나의 위상을 취임, 유지시키는 규범들을 내가 재구성할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태도를 취한다면, 나는 그 규범들의 사회적 차원이 함축하는 나의 서사의 중지와 방향상실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말을 할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한계, 모든 그런 행동하기를 조건짓는 한계를 신중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145)



3장 책임감


우리는 줄곧 서술될 수 없는non-narrativizable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어떤 한계를 두려고 했던 것 아닐까? 나는 다름아닌 책임감의 의미가 이런 한계에 근거해서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에게 완전히 투명한 자아의 자만심에 책임감을 동여맬 수는 없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자기-이해의 모든 한계를 시인하고, 이 한계를 주체의 조건으로서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곤궁으로서도 확립한다는 것이다..../...나는 다름 아닌 나의 형성이 내 안에 타자를 함축한다는 것,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이질성이 역설적이게도 나와 타자들의 윤리적 관계의 출처라는 것을 안다. 사회적 관계에서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데 나 자신을 아는 게 필요할까? 분명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나의 무지에 어떤 윤리적 원자가가 있지 않을까? 상처를 입은 뒤,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사실, 내가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양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상처가 입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책임감의 문제를 타자에서 분리해 따로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책임감의 문제가 맨 처음 출현하는 말걸기의 양태(타자에게 말을 걸뿐 아니라 타자의 메시지를 전달받기도 하는)로부터 나를 떼어버린 것이다. (146-47)


; 3장의 시작. 2장에서 서술한 주체의 조건들 위에서 윤리적 책임감을 정초하는 작업이 이 텍스트에서 버틀러의 최종적인 목적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버틀러의 언어가 불필요하게 어렵지는 않지만, 버틀러는 결코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있지 않기에 그 좁지만 섬세한 보폭들을 헤아리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버틀러가 아직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보가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꽤나 정신적인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우리는 무의지적인,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타자들에의 민감성, 즉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성의 조건, 심지어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런 민감성은 비자유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어떤 선택권도 없는 이런 민감성을 토대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타자들을 책임지게 된다. (154)


우리는 오직 우리가 했던 것, 추적해서 우리의 의도와 우리의 행위였던 것으로 밝혀질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명시적으로 이런 관점을 거부하는 레비나스는 책임감을 자유에 묶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내가 당한 것 때문에 책임을 느끼게 되/지만, "책임감"이 뜻하는 것이 내가 당한 폭행outrage 때문에 나를 책망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당한 것 때문에 책임을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의 행동 때문에 우선적으로 책임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차적이고 뒤집을 수 없는 민감성의 층위에서, 즉 행동이나 선택의 모든 가능성에 선행하는 나의 수동성의 층위에서 확립된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책임감을 갖는다. // 레비나스는 이 심급에서의 책임은 자책도, 혹은 타자들에게 인과론적으로 유일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는 개념인 내 행동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나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관계로서의 책임에 연루된다. (154-55)


폭력을 겪는다는 것, 너무 일찍 폭력으로 선회해서 슬픔을 해소하지 않고, 취약성을 저지하지 않으려 하는 것, 단호하게 비상호적인 반응으로서 비폭력을--다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실험으로서--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폭력에 직면해서 폭력을 되돌려주길 거절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레비나스를 따라, 자기보/존은 최고의 목적이 아니고, 나르시스트적인 관점을 지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심적 필요가 아니라고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일차적으로 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충돌을 당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없앨 수 없는 취약성과 도덕적 구속의 신호이다. 우리는 그런 취약성에 맞서기 위해 주체의 비사회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고 또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가끔은 참을 수 없는 관계성에 맞설 수 있다. 무의지적인 것the unwilled의 지대를 통해 윤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이런 타자에의 일차적인 노출을 폐제하지 않는다는 것, 무의지적인 것을 의지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대신에 이러한 참을 수 없는 노출을 공통의 취약성, 공통의 물질성physicality과 위험...의 신호로, 상기자reminder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폭력은 우리가 감내하는 정당한 처벌도, 우리가 겪는 것에 대한 정당한 보복도 아니다. 폭력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취약성, 우리가 확고한 경계를 통해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피부 속의, 양도된, 서로의 손 안의, 서로의 자비를 바라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방법을 제공할 취약성을 묘사한다. 이 상황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선택의 지평을 형성하고 우리의 책임감을 정초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 상황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우리가 책임감을 떠맡는 조건들을 창조한다. (173-75)


; 라플랑슈와 레비나스를 다루는 3장의 초반부에서 초점은 주체의 수동성, 취약성과 책임감을 연계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주체의 수동성을 다루는 논의들에 익숙해진 독자들이라 할지라도(이미 레비나스를 충분히 읽은 독자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어로 번역된 레비나스의 텍스트는 많지 않다) 이 부분에서 버틀러의 논지를 충분히 이해하며 따라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인용을 해놓고도, 내가 충분히 의미있는 인용을 했는지 잘 확신이 가지 않는다. 각 부분들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부분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하나로서 어떠한 내용을 이루는지는 곧바로 납득되지는 않는다. 이 내용을 앞서 버틀러가 주장한 바처럼 주체의 취약성을 보편적인 상호인정의 표지로 삼을 수 있다는 내용을 (레비나스의 존재론과 라플랑슈의 정신분석을 거쳐) 변주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만약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가 보편적인 특질로부터 서로에 대한 인정 혹은 책임감을 갖는다는 게 (설령 가능할지언정) 그 자체로 별도의 논증없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즉 보편적으로 주어진 성격으로부터 당위를 추출할 수 있는가? 또 하나는, 우리가 함께 서로에게 취약하기 때문에 상호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논증이 그 자체로 성립가능한가? 취약함이 어째서 배려를 불러일으키는가? 근본적인 질문, 왜 우리는 서로의 취약함을 상호파괴, 생존경쟁의 기회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가?


그들[아도르노와 레비나스]은 오히려 상해를 입은 뒤 그 결과로 출현하는 도덕적 궁지와 나란히, 상해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 윤리는 강자의 특권이라고 주장할 이들에 맞서, 그리고 그들을 넘어서서 우리는 오직 상해를 입은 자의 관점에서만 책임감이란 개념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177)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투명성, 우리 자신의 무지의 장소들, 우리 자신의 상해에 굴복하고 그것들을 따르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앞서 인용문[<미니마 모랄리아>의 한 대목]의 지적처럼 아도르노는 거절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하지만, 동시에 그 주장에 저항하는 우리들의 움직임을 추적한다....윤리적으로 대단히 큰 / 포용력을 갖는 그 모델은 그 주장의 견인력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 견인력에 저항하는, 어떤 양가의 제스처를 윤리 자체의 행동으로 제공한다. 우리는 타자가 입히는 상해에서 자신을 구해내려고 하지만, 만약 상해를 막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비인간적이게 될 것이다. "자기-보존"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하고, 따라서 "비인간적인 것inhuman"이 인간적인 것the human을 구성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실수한 것이다. 자기-보존을 윤리의 토대로 주장할 때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이 도덕적 나르시시즘의 형태는 아니라 해도 순수한 자아 윤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해에 맞설 권리를 주장하길 원하는 것과 그 주장에 저항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할 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 ...인간되기는 스스로 해소할 수 없는 곤궁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아도르노 자신은 우리를 위해 인간적인 것을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인간적인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중의 움직임, 즉 도덕적 규범을 단언하면서 동시에 그런 단언을 가능케 할 권위를 의시마는 그런 움직임일 것 같다.(178-79)


아도르노는...비인간적인 형상인 /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오드라덱이 생존과 희망의 개념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최종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을 구성하고 탈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는 비판적인 출발점이 된다. 아도르노가 보여준 것은 카프카에게서 비인간적인 것은 오늘날 "인간" 사회 조직에서 살아남을 방법, 대대적인 황폐화를 딛고 계속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방법이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활성화하고, 인간적인 것이 계속 살아갈fortleben 수 있을 흔적 혹은 폐허를 이룬다. 우리 내부에서 사회적 힘들이 거주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방식이기도 한 "비인간적인 것"은 자유 의지의 견지에서 우리를 정의할 수 없게 한다. 마지막으로 "비인간적인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항상 무지하게 되는 방식으로 세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을 가리킨다. 도덕적 삶을 통해 삶을 개척하려고 할 때 "비인간적인 것"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도르노에게 "비인간적인 것"이 새로운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달리 아도르노는 "비인간적인 것"을 경축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의 궁극적인 탄핵을 요청한다..../// 그러면서도 아도르노는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적이 되는데 필요한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182-83)


여기서 아도르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적인 것을 의지를 통해 정의하거나 아니면 인간적인 것에서 모든 의지를 제거하는 식으로 인간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일은 지지할 수 없는 방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비인간적인 것"은 순수 의지(취약성이 제거된)의 형상이자 의지no will(결핍destitution으로 환원된)의 형상으로 출현한다. 인간의 의지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을 종속시키는 탈인간화에 반대한 아도르노는 그렇다고 인간을 의지로 정의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와 정의적defining 규범으로서의 인간다움을 동일시하는 개인주의적 해결책은, 세계에서 개인을 잘라낼 뿐 아니라 그 세계에 도덕적으로 참여할 토대를 파괴한다. (185)


탄핵은 전적으로 나르시스트적인 윤리는 아닐지라도 개인주의적인 윤리, 확신conviction 윤리의 특징인 바, 의지적 행위인 것 같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탄핵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 위치를 점유하면서, 요컨대 이 입장을 어떤 식으로건 불가피하게 점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도덕에 대한 아도르노의 성찰에서 탄핵이 도덕적 판단의 유일한 모델은 아니다. 사실 탄핵은 책임윤리라기보다는 확신 윤리에 속하는 것이며, 책임 윤리는 그가 도덕에 대한 여러 강연에서 추구한 기획의 특성을 이룬다. // 확신은 자아를 도덕적 판단의 토대이자 척도로 간주하는 윤리에 속하는 것 같다. 막스 베버를 따르는 아도르노가 보기에, 책임은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세계의 맥락에서 행위를 떠맡는 것과 관련이 있다. 칸트주의의 특징을 도덕적 나르시시즘의 형식으로 간주한 아도르노는 그런 확신에 근거해서, 결과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탈존재론적인 입장은 나르시시즘에 양도되고 이런 의미에서 개인주의의 사회적 조직화를 비준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86-87)


; 최종적으로 아도르노를 푸코에게 인도하기 전에, 혹은 후기 푸코의 독해에 아도르노를 하나의 기준점이자 토대로 삼기 전에 버틀러는 아도르노의 도덕비판에 함의된 사회적 요소를 가능한한 강조한다. 특히 첫째 인용부분에서 버틀러가 설명하는 아도르노의 입장은 비록 아도르노 특유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아도르노 특유의 논리구조를 잘 보여준다. 곧 비인간적인 것, 사물화된 것, 주체에 의해 훼손된 객체적인 것, "제2의 자연" 자체를 우리가 무시하거나 건너뛸 수 없으며 바로 그것으로부터 비판적인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우리를 위해 설계한 몇몇 명제는 흥미롭고 또 중요한 방식에서 후기 푸코가 제시한 윤리학의 문제틀과 수렴한다. 아도르노처럼 푸코도 윤리는 오직 비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즉 비판이 무엇보다 존재론, 특히 주체의 존재론을 질서지우는 이해가능성의 체제에 유의하는 것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존재의 체제에 유념한다면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를 묻는 푸코는, 주체 형성의 가능성의 위치를 강제적인 결과들을 통해 유지되는 역사적으로 취임된 존재론의 질서에 둔다. 나 자신이 나의 의지--주어진 역사적 존재론 안에 있는 나의 자아의 구성과 또한 나의 자아의 자기-보존의 양/태와 별도로 떨어져 있으며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구상된--와 순수하고 무매개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아도르노와 논지는 약간 다르지만, 나는 두 사람의 입장이 서로 공명한다고 본다. 아도르노�


+


"가장 중요하게는, 어쩌면 바로 무지의 순간에 우리를 형성한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것에서 분기할 때, 타자와의 관계에서 기꺼이 훼손당하려는 자발성이 인간이 될 기회를 구성할 때, 바로 그 때 윤리는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길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훼손된다는 것은 일차적 필연성, 고뇌일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기회, 즉 메시지를 전달받고, 요청을 받고, 나 아닌 것에 속박되고, 또 옮겨지고, 신속히 행동하게 되고, 어딘가에 말을 걸고, 따라서 일종의 소유물로서의 자족적인 "나"를 비울 기회이기도 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2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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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설솔술 2015.12.16 22:57 Modify/Delete Reply

    이번 방학동안 읽어보려 합니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 참 많네요.. 항상 큰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BeGray 2015.12.17 00:58 신고 Modify/Delete

      도움이 된다면 다행입니다 :) 원래 이 리뷰는 이것보다 길게 썼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뒤의 1/3이 사라져서...지금은 다 잊었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누구시죠!ㅋㅋ)

    • 살설솔술 2015.12.17 19:48 Modify/Delete

      ㅎㅎㅎ 누구냐구요?? 그냥 우창님 패이스북이랑 블로그 눈팅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좋은 글 읽으면서 경외의 감정도 느끼기도 하구요. 제 전공이랑은 많이 다른 종류의 "똑똑함"이거든요 ㅎㅎㅎㅎㅎ 학교있을때 같이 세미나도 해보고 싶기도한데... 민폐될까봐 쉽지않습니다

    • BeGray 2015.12.18 00:27 신고 Modify/Delete

      ㅎㅎㅎ 음 그럼 꼭 세미나를 하고 말고와 무관하니, 편하실 때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주시죠!ㅋㅋ 어느 전공을 공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도 다른 전공자와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

  2. 살설 2016.02.25 07:20 Modify/Delete Reply

    여행 다니면서도 손에 놓지 않고 읽었는데도 한 달이 걸렸네요. 처음 읽을땐 쉽지 않았는데 두 세번 읽다보니 이상한 '감동'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제 나름 정리해보려고요

    • BeGray 2016.02.25 23:27 신고 Modify/Delete

      네, 사실 이 글은 정리한 내용에서 페북에 올릴 때 뒷부분 1/3 정도가 날아가서 아쉬운 게 있는데, 따로 훌륭하게 정리해주셔도 좋을 듯 합니다 :)

  3. toddlerrr 2019.06.02 16:20 Modify/Delete Reply

    잘 읽었습니다.
    발췌독만 해 놓고 이제야 읽게 되네요. 읽으면서 우창님의 명쾌한 독법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도 버틀러가 ‘타자’ 와 ‘규범’이라는 두 개념을 바라보는 태도는 아리까리하네요. 우창님이 올려주신 1장의 인용문을 보면 분명한 선후관계 내지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막상 2장에서는 거의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145pg) 의도적으로 두 개념을 접합시키는 것 같기도 했고요. 여튼 수사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정말 매력적인 텍스트네요.

    그나저나 날아간 1/3 어디갔나요... ㅎㅎ...

    • BeGray 2019.06.03 10:32 신고 Modify/Delete

      6년 전의 제가 그것도 군대에서 쓴 노트다보니 지금 다시 보면 저 스스로도 낯설 듯 합니다 ㅎㅎㅎ 날아간 1/3은 영원히 찾지 못했...ㅠ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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