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강의>. 인용 및 코멘트.

Reading 2014. 3. 18. 11:56


*2013년 8월 2일 페이스북.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강의>_Vorlesung uber Negative Dialektik_(나는 u 위에 움라우트를 어떻게 표기하는지 아직 모른다). 이순예 역. 세창출판사, 2012. 일독 후 인용 정리. [/] 는 페이지구분.



2강.



"사회기구institution는 비판하는 추상적 주관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즉 필연적인 것임을 드러내 보여준 헤겔은 옳았습니다.--심지어 주체가 여하튼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사회기구라고 했지요. 순전한 대자존재,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믿는 주체의 직접성은 사실상 그냥 환상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은 실제로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그리고 도입된 사회적 설비들에 의해서만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동물입니다. 인간들은 이 설비들에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주관성으로서 마주 서 있는 것이지요.... 어떤 한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 이른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의식을 근본적이고 제 1의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것이 가상이라는 비판이지요.[아마 여기에서 우리는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권력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테제 중 하나가 헤겔에서 선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헤겔의 통찰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회이론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주체의 즉자라는 가상을 파괴하였으며, 주체가 사회적 객관성의 한 계기임을 입증하였다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추상적인 주관성에 맞서 사회적 계기가 필연적으로 더 강력하게 자신을 관철시켜낼 수밖에 없음도 밝혀내었습니다. 그러나--그리고 여기가 바로 요점이 되겠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에 대해 비판적인 이런저런 생각들, 부[/]정변증법이라는 말을 만들기를 정당화시켜주는 생각들이 풀려나옵니다....정말로 이 객관성이, 필연적인 조건임이 입증되고 그리고 추상적인 주체를 자기 아래로 포섭시킨다는 객관성이 진정 더 상급의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이 객관성이 헤겔이 청년시절에 비판했던 이른바 외재적인 것, 강압성을 띤 집단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처럼 더 상급의 것이라고 갖다 붙임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끝없는 고통과 노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주체의 퇴행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물음들 말입니다. 주관성과 사유를 그 사유가 대면하고 있는 객관성에 몰아다 붙이는 억압의 메커니즘을 통찰한다고 해서,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종속성 그리고...객관성의 승리로 귀결되는 사실들의 논리를 직시하고 있다고 해서 왜 객관성이 필연적으로 정당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는지, 이 점이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35-36); 사회=구조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우위에 우리가 정지할 필요는 없음을 아는 것. 아도르노는 헤겔이 멈춘 그 지점, 혹은 통속적인 프랑스 권력이론이 멈춘 그 지점에서 왜 우리가 멈추어야 하는지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다. 부정변증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자는 요구이기도 하다.



"실증자das positive라는 개념 자체에 이런 이중의 의미가 들어있는데, 참 흥미롭습니다....실증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주어지고, 설정되고 거기 있는 것이지요--데이터를 중요시하는 철학을 실증주의라 일컫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실증적인 것은 긍정할 만한 것, 선한 것, 일견 이상적인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둘러싼 이러한 의미론적 짜임관계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부정변증법을 거론한다면, 여기에는 실증자 일반의 물신화--이 물신화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대단한데, 최소한 그런 꿈을 꾸도록 하는 특정한 철학적 흐름들의 진보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만--그 물신화로부터 확실한 선을 긋겠다는 모티브가 결코 적지 않게 들어있는 것이지요. 무엇이 긍정되는가, 무엇이 긍정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긍정되면 안 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자체로서 벌써 가치로 승격되는 일이 벌어지도록 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39); 아도르노를 진심으로 주의깊게 읽은 사람이 실증적인 것/긍정적인 것이라는 단어 앞에서 불편하지 않은 기분으로 살아가기란 어렵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여기에 비판적 사유의 시작이 있다. <부정변증법>의 타겟은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헤겔적인 변증법, 존재론적인 퇴행, 실증주의의 물신화.




제3강.



"두 입장들이라고 하는 것들을 서로 비교해봅시다. 예를 들어 합리주의자의 원형인 데카르트를 경험론의 시조인 프란시스 [/] 베이컨과 비교한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것들에서 정말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발견할 뿐 아니라, 비록 매우 다른 개념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철학들의 의도가 이른바 세계관적인 입장이나 공리상의 관점들 때문에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보다 서로 훨씬 더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헤겔판 진테제 개념이나 규정된 부정이라는 개념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차이들, 그 차이를 내가 지금 구제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중이지요--바로 이 미세한 차이들에 변별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이런 능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판세를 가르는 차이들을 언제나 이런 미세한 차이들, 최소한의 차이들에서도 체험하는 능력 말입니다." (68-69)




제4강.



"...내게는 체계를 개별 단위들을 서로 묶는 잠재적인 힘으로 세속화시키는 길이 (건축학적 질서를 구축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아직 철학에 남아 있는 유일한 길로...보인답니다....이런 견지에서 여러분에게 간청하고자 하는데요, 부정변증법 개념을 철학적 체계의 이념이 겪어온 이러한 변화에 대한 비판적이고 자기 비판적인 의식으로 이해하라고 말입니다. 체계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짐 속에서 자신의 힘들을 방출시키는데요, 어쩌면 우리가 신학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바와 유사할 것입니다, 완결되고 의미 있는 세계로서의 체계라는 이념으로 사실 신학의 세속화가 그 나름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요....[/]...벤야민은 체계로서가 아닌 철학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선 정작 자기는 이런 통찰로부터 이탈해서 다른 길을 갔는데, 그 길은 참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웠으며 그리고 그 결과 또한 무척이나 파편적으로 남았습니다....[요즘의]사태는 이렇습니다. 마치 뭐 체계 속에서의 통일을 완전히 포기한 관념인 것 같고,...그냥 방기된 상태에서 다 해치우는 식으로 사유하는 것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관념이 우연성과 자의에 넘겨져 버린 것처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재기 넘치는 이의가 아주 오래전부터 내 마음을 파고들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지내고 보니 차츰 여기에 맞서 다른 이의제기가 머리를 들었고--한 마디로 결국은 서로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연관을 엮어내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85-86)



"[포퍼와의 논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뒤] 사유란 진정 체계는 아니지만, 하지만 자기 속으로 체계와 체계적인 충동을 집어삼키는 것이 사유일 것입니다. 개별자를 분석하는 가운데 한때 체계형성의 힘이고자 했[/]던 그런 힘을 견지하는 사유인 거지요. 이 힘은 개별징후들에 대해 자기주장을 하는 사유를 통해 개별징후들이 폭파되면서 방출되며, 이는 한때 체계에 혼을 심었던 바로 그것과 동일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를 통해 개별적인 징후들이, 각자 자신의 개념과 비동일적인 것으로서 그 자신보다 더mehr인 그것으로 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에서 체계에 의해 구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이 있다면 이는 바로 징후들이 객관적으로--인식하는 주체에 의해 그 징후들에게 부과된 징후들의 등급화가 아니라--하나의 연관을 구성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안 자체에서의 이러한 연관은 하지만 실체화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의 절대자로 만들어질 수 없고 그리고 또한 밖에서 가져와 덧붙여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연관은 징후들 자체 속에서 징후들의 내적 규정 속에서 발견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88-89); subjectivity 의 비판, 그리고 그 비판이 맞닥트릴 문제, 그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인 고안. 프랑스 이론으로부터 이론공부를 시작한 내게는 1965년의 아도르노를 읽다보면 그가 20년 정도 앞서서 살고 있었던 것처럼 읽힌다. 아도르노의 짜임관계/성좌Konstellation라는 개념은 바로 그가 최종적으로 고안한 (개별적인 것을 보존하는)보편자의 개념으로서 개별성 추구의 극한에서 이론적인 좌초/퇴행을 겪고 있는 오늘날에 바로 다시 검토될만한 모델이다.



"...내 생각은 한 마디로 철학이 낡아빠졌다고 보이기 시작하는 그 지점 자체가 그 사이 낡아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자체로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즉 도그마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93)




제5강.



"[1848년과 20세기 초반의 세계정세에 대한 이론적인 예측을 말하면서] 왜 그것이 발생하지 않았고 왜 그것이 일어날 수 없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철학은 그러므로 또[/]한 극도로 급진적인 자기비판이 필요한 바, 왜 이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두고 곱씹어 봐야만 합니다." (102-03);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왜 실천이론이 자신이 예정한 사태를 실현시키지 못했는가? 지성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물음은 20세기 중반의 주요한 비판적 사회이론가들 전반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예컨대 알튀세르, 푸코, 레이먼드 윌리엄즈, 그람시 등등).



"...나는 이 수업에서 본질적으로 해설 자체는 비판Kritik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이것이 결정적인 계기입니다--여러분에게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비판적 해설과 다른 해설이란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그리고 추인하는affirmative 해설도 아닙니다. ...그와 같은 [비판적인] 해설이 없다면, 집행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관념이 없이는, 난 이렇게 믿는 바입니다, 참된 실천이 없다고요." (111); 30년대의 아도르노--철학의 시의성"The Actuality of Philosophy"--가 사용하는 "해석interpretation으로서의 철학"과 60년대의 아도르노--왜 철학인가"Why Philosophy?"--가 사용하는 비판critique으로서의 철학은 이렇게 만난다.



"...헤겔이든 혹은 칸트이든,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에게서 사안[sache]이 이율배반적으로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럴 때마다 그 이율배반을 짐짓 아는 체하며 해소해버린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태도일 것입니다. 그 대신 이런 이율배반의 필연성을 확인하려 드는 태도가 훨씬 낫습니다." (112); 아도르노가 근본적으로 칸트적인 태도 위에서 작업함을 보여주는 실례.




제6강.



"...진지한 의미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사회를 떠올리려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항상 포함시켜야 하는데, 자연지배가 사회 안의 지배형식[/]들에서 재생산되면 절대 안 되기 때문에 자연지배와 맺는 관계가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31-32); 사회적 관계 내에서의 지배와 인간의 자연지배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어느 한쪽만의 해방은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




"철학이 오직 개념들만을 다루는 이런 과정을 스스로 개념적으로 반성하고, 그리고 철학이 이 과정 자체를 개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이 과정을 점검하고 그리고 바로 개념이라는 수단들로 이 과정을 공략함으로써 다시 그 과정을 무효화시키는 프로그램이 되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중 어느 멋진 구절에서 정신분석이란 현상계의 쓰레기와 관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철학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은 자신의 대상을 바로 그 지점, 고유한 발생근거에 따라 철학이 일반적으로 자신에게서 제거시켜 버리는 것에서 취한다고 말입니다. 개념의 찌꺼기, 그 자체로서는 개념이 아닌 것에서지요. 그리고 부정변증법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바로 이렇게 엮인 밧줄을 다시 도로 풀어놓는 과정이 성공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요. 이것이 개념의 자기반성에[/]서 가능한가, 바로 그 자기반성으로 개념이 자기 자신의 개념적 본질을 통해 자기 자신 둘레에 그리고 자신이 지시하는 것 둘레에 쳐놓은 울타리를 폭파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 물음이 되겠지요." (138-39); 비판적 철학이, 즉 개념을 비판하는 철학조차도 개념을 갖고 작업해야만 함. 개념이 놓아버린 잔재들을 파헤치는 것. 통상적으로, 에리히 프롬에게서 아주 선명히 드러나지만, 실천철학과 정신분석의 접목으로 비판적 사회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를 규정한다면, 아도르노에게 프로이트는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일뿐만 아니라 잔여를 다루는 태도에서부터 중요한 인물이다. 잔여는 앞서의 질문,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바꾸어말한다면 잔여적인 것에 순전히 긍정적인 가치부여를 할 수는 없다(이 점에서 아도르노의 충실한 학생은 부정신학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없다).



"아도르노는 비동일자에 대해, 이른바 사변적 개념과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는 오히려 칸트가 이념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한 바에 더 가깝다고 추정하였다." (143); 편집자 롤프 티데만Rolf Tiedemann의 주석. 아도르노의 번역이 결코 적지 않게 진행된 한국에서 정작 티데만의 논문은 단 한편도 읽기 어려운 상황이 꽤나 의아스럽다. 티데만은 단순히 강의록의 편집자가 아니라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아도르노 전집을 만들고 연구한 매우 중요한 학자이기도 하다. <강의>에 달린 주석은 모두 티데만의 것인데, 주석달기의 어려움을 아는 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중요성을 직감할 것이다.




제7강.



"그래서 나는 철학이--그리고 대체로 모든 재료적인 분과핟문들이--프로이트를 추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프로이트의 철학은 사회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포된 사유와 학문의 범주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미리 정돈되지 않은 것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진정으로 천재적인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지배하면서 순응하게 만드는 의식이 이미 손도장을 찍어놓지 않은 대상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도록 한다는 사실 역시 그 천재성을 증거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개념자 자체는, 만일 누군가가 이 무개념자에 다가간다면, 여하튼 그쪽으로 처음 방향을 돌리면, 그런 한에서 이미 부정적인 의미에서 개념에 의해 매개된 상태라고요--이른가 소홀히 된 것으로서, 배제된 것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개념이 이런 무개념자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바로 그런 정황에서 편파성, 편견 그리고 개념의 차단과 같은 것에 의해 무엇인가가 인식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실제로 프로이트가 주의를 기울였던 징후들의 집단들은 그 징후들이...배제의 메커니즘에 아주 특별한 정도로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사회적 배제와 같은 것도 있겠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대상들에서 보편적인 의식에 의해 배제되어진 그 무엇을 감지하고 그리고 허가받은 의식이 간과하거나 혹은 기꺼이 고찰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런 것에 매료되는 일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의 기관organ에...속한다는 사실입니다....개념은 대상들에서 충분히 큰 것만을 포착합니다. 다른 대상들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그물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은 그 속에 철학적 해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포함되기 마련인 극도로 작은 것입니다." (154-55); 단순히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부분.



"[후설과 베르그송이 행한 개념의 영역에서 뚫고 나오는 돌파시도를 비판하면서] 그런 식으로 주관적 자의...로 수행된, 그저 주체에 의해 도입된 돌파시도는 하나같이 덧없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그 시도가 주관적 자의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그 영역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지요....만일 돌파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그 돌파는 주체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을 이처럼 설정함을 통해 성사될 수 없습니다. 비아nicht-ich의 설정을 통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정말이지 우리는 철학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비아의 주관적 설정이 바로 관념론의 절정이었다는 사실을요....만일 그런 돌파의 가능성이 도대체가 있다면,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주[/]관적 영역의 비판적 자기반성의 길 뿐입니다. 이 영역에서의 자기반성이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찰을 자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순전히 주관성인 것이 아니라 주관성이 관념적으로 이제 비로소 성사시켜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관련을 필연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그런 무엇으로...인식하는 것입니다....주체에게 주체 자체가 하나의 설정이라거나 아니면 어쨌든 역시 설정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지, 비아가 하나의 설정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통해서는 아닙니다." (160-61); "세계의 바깥"은 없다는 가라타니의 진술()을 상기할 것.




제8강.



"...통상적인 경험주의 전반의 오류, 통용되는 체험개념 전반의 오류는 내가 보기에는 인식론으로서의 경험주의적 철학이 바로 타자의 체험가능성, 원칙적으로 새로운 것의 체험 가능성을 철학의 행동규범을 통해 단절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182)




"[미적인 것과 예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철학이란 무한자가 아니라는 사실, 철학은 자신의 대상들에서 그 어떤 것도 완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러나 진리는 그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런 측면을 예술현상들에서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예술작품은 실증적인 무한성과 같은 무엇을 묘사한다고요....예술작품은 한편으로 자기 내적으로 유한한 것, 윤곽이 잡힌 것, 시간 혹은 공간에서 주어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함축이 무한해서 그냥은 결코 해명되지 않고 끝내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예술작품들을 분석한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작품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구조연관들에서, 이런 구조연관들을 끌어안고 있는 의미함축들에서 모든 것, 작품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다루어지고 그리고 예술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내재적으로 분석함.... [/] 어떻게 보면 예술작품들은 앞으로 치고 나가는 분석이 작품 속 정신적인 것에 객관적으로 함유되어 있는 것을 점점 더 많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생기를 부여받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진리내용을 확인하는 정도가 갈수록 진척되는 그런 분석을 통해서이지요....예술작품들이 의미연관들이기 때문이라고요....[예술과 세상의 차이를 말한 뒤]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접근방식, 예술작품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런 고찰방식이 인식에 대해서도, 현실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전형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184-85); . 예술분석과 비판적 사유.




제9강.



"이른바 직관들은 일종의 강물 혹은 시냇물과 같은 것....훨씬 더 많은 구역을 땅 아래에서 흐르다가 갑작스레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고 이 갑작스러움은 사람들이 땅 아래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지요...이른바 직관들은 의식되지 않은 지식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207) ; 자연스럽게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철학개념은 무개념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에 영혼을 불어넣고 그리고 개념없이 맹목인 채로 그저 채워지기만을 바라는 열망을, 그리고 맹목이기 때문에 다시 어떻게 해도 결코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는 없고 그저 가상으로만 실현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07)




제10강.



"내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본질과 현상의 차이가 단순히 그저 형이상학적 사변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현실적real이라는 사실이 본질적인 계기 중 하나입니다....현 사회에서 인간의 주관적인 행동방식은 그 자신은 결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객관적인 구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우리가 무엇보다도 항상 관련을 맺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직접성의 영역으로서 주관적 행동방식들은 실제로 매개된 것, 도출된 것 그리고 가상적인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불확실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또한 이 가상은 필연적입니다. 즉 주체가 갖게 되는 의식내용을 사회가 생산하는 것은 그 사회의 본질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알튀세; 이데올로기의 초역사적, 편재적 성격],... [/]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가상으로서의 인간의 직접적인 의식이 아주 상당한 정도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사람들이 사변적 요인을, 비판적 요인으로, 표면적인 외양에 자족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반이데올로기적인 것과 대당흔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사실...." (222-23); 가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반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서의 사변. 알튀세의 '과학'과 비교할 것.



"이 사변개념은 원래 본질적으로 의미를 일궈내는 범주였지만, 내가 여러분과 갑론을박한 바에 따르면 그냥 현존하는 것이 찬탈해서는 의미라고 내세우는 가상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철학은 저항의 힘입니다. 나는 저항하는 정신적인 힘 이외의 어떤 다른 철학에 관한 규정은 없다고 믿는 바입니다. 철학의 본질적 이해가 철학에서 온통 다 끌어내 쏟아내려는 것, 거기서 그냥 끝을 보고 말지 않도록 하는 것, 경험자료들로 끝장나지 않는 것 등을 통한 저항의 힘인 것이지요." (224)



"...본질과 현상의 차이는 오늘날 논박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의 징후들을, 그들 배우에 어떤 다른 것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징후들이 일단 무엇인 것 그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몰아가는 일면이 있는데, 이런 견지에서 본질과 현상의 차이를 논박하는 시도 자체를 저는 골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더 이상 그 징후들을 넘어서게 될 수 없는 순간...근본적으로는 이론 자체 속에서 그 징후들을 넘어설 가능성 역시 더 이상 없게 되는 것입니다." (225)



"깊이가 없는 태도는, 이를테면 그냥 옆에 있는 경험자료에 만족하고 마는 태도는, 계속 천착하는 일 없이,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고 늘어지는 법 없이, 왜 이것이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고집함이 없이,--이런 태도는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철학적 태도는 결코 아닙니다. 철학에서 깊이라는 기준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명시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실제로는 거듭하여 철학에서 제기되는 기준이죠. 그리고 파고드는 것, 고수하는 것, 자족하지 않는 것과 같은 자질을 주관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철학에서 멀다고 하기보다는 아예 철학이 거부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226-27)



"만일 라이프니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러면 깊이라는 개념은 신정론의 관념과 고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통을 정당화하는 관념이지요. 깊이라는 것이 무언가 고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고통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하는 사유라는 사실,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독일 정신사에 눈을 돌린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이 깊이에, 모든 철학적 깊이에 들어 있는 고통의 계기가 독특하게 정당화되고 그래서 매우 문제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얄팍한 계몽' 혹은 '얄팍한 낙관주의' 같은 표현에 연결되는 이 독일적 전통이 그런데 실제로는 비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속에 전통적으로 요약되어 들어앉아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들춰내고 싶은 사실은, 그 안에는 심히 미심쩍은 것이 이미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비극적인 것이라는 범주 같은 미학적 범주가 그냥 곧바로 실재에 그리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데에 또 사람들이 서로서로 마주하고 있는 윤리적 관계에 끌어들여지고 있는데요, 이에 따르자면, 행복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유는 도대체가 모두 피상적인 것으로 되며, 그리고 거부, 부정성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서 실증자로 파악하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사유는 깊은 것이 된답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 유한성 때문에 몰락을 자초하고 그리고 이 몰락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의 무한성의 보증이 된다는 것입니다.[벤야민과 바로크의 독일 비애극]--내 말은요,...한 마디로 깊이라는 개념, 고통의 신정론으로 귀결되는 이 개념이 자체로서 정말 피상적이라는 것입니다....이 개념이 피상적이면서 무언가 진부하게 감각적인 행복에의 요청을 짐짓 거스르는 듯 거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그냥 세태의 흐름인 것을 제 것으로 취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려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이 거부, 죽음, 억압을 사물의 피할 수 없는 본질로 여기면서 거기에 힘을 실어 주기 때문이지요....하지만 피할 수 있는 것이고 비판될 수 있는 것이며, 어쨌든 관념이 동일화해야만 하는 그 무엇과는 정반대되는 것들입니다." (228-29)



"저항이란 말입니다, 자신의 법칙을 명목상의 그리고 주어진 사실들에 의해 처방되도록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한에서 저항은 대상들과의 가장 밀접한 접촉 속에서 대상들을 초월하는 것입니다."(235)



"분명히 깊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내가 지난 시간에 사변적인 것이라고 지칭한 그런 계기와 모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사변없이는 깊이와 같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철학은 정말로 단순한 기재deskription로 변질되겠지요....순전한 존재자애 대한 사유의 이러한 사[/]변적 과잉은, 이 과잉은 사유에서의 자유의 계기이며 그리고 단지 자유를 위하여 편을 들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동시에 또한 사유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변적 과잉은 자유의 계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계기로 인해 주체의 표현욕구가 관습적이고 흐름이 정해진 표상들을, 그런데 주체는 바로 이런 표상들 가운에데서 움직이지요, 그런 표상들을 무너트리고 스스로를 유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표현에 설정된 한계를 안으로부터 무너트리는 것, 또 자신이 지금 발 딛고 있는 삶의 외관을 무너트리는 것, 이 두 계기들은 정말이지 그냥 똑같은 것이라고 해도 됩니다. 방금 내가 여러분 앞에서 죽 늘어놓은 것, 이것이야말로 참말로 철학적 깊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말해 그렇다는 것이지요--다시 말하자면 정당화로서 아니면 고통의 온건주의로서가 아니라 고통의 표현으로서 그렇다는 것인데요, 이런 고통의 표현은 표현으로 되는 가운데, 그 표현이 고통 자체를 더욱 그 자체의 필연성 속에서 파악해낸다고 하겠습니다. 철학은 특정한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계의 고뇌, 세계의 고통을 언어로 가져가는 것, 고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타소Tasso의 문장이 있는데요, 인간이 고통 속에서 말을 잃게 되면, 신이 그에게 그가 고통받 것을 말하게 해준다 입니다--문학과 철학이 맺는 어떤 연관, 하나의 직접적인 연관을 아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235-36)




제 11강. (11강부터는 강의록이 없고 핵심용어 노트 및 거기에 대응하는 내용을 티데만이 "정신적 체험이론을 위하여"에서 수록한 부분만 있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주체에 하중이 걸리는 객관성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서 주체가 체험하는 것, 그것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이 점은 철학에서 서술darstellung이 사소하거나 외적이지 않고 그 철학의 이념에 내내적이라는 사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244)



제12강.



"그 어떤 주관성의 형태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규정된 객관성을 늘 거듭하여 전제하고 있기 때문" (250)




제15강.



"체계들의 붕괴는 사회적 발전과 대칭의 관계를 이룬다. 시민적 이성은 교환원칙으로서 현실realitat을 점점 더 체계에 접근시키면서 체계 밖의 여지는 줄인다. 이런 상황에서 받게 되는 고통은 정신적 폐소공포증. 그래서 반체계적인 것이 보완 이데올로기로 되는 것이다....한때  체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체계들에 대한 도덕적 단죄는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으로 된다. 체계에 반대하는 것이 이미 특별하지 않은 일로 되었다." (265)




제16강.



"경험론이 철학인 곳에서는 경험론이 주관적인 체계로 되는 경향이 있다. 여하튼 고전적인 경험론은 겉보기에만 반체계적이다. 실제로는 칸트의 범주론에 극도로 근접해 있다." (271)



제25강.



"[사르트르 및 실존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절대적 주체가 부숴버리고 싶어하는 사슬들은 절대적 주체성 자체의 원칙과 하나이다. 절대적 주체의 추상적 자유=지배." (317); 우리는 자유의 형식 또한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지배 아닌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지배라는 형태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철학은 하나의 부정자에서 자신의 실증자를 만들어낸다. 그 앞에서 철학이 투항하고 그래서 관념론이 시작된 해소되지 않은 것das unauflosliche이 '달리 될 수 없는 그런 존재So-und-nicht-anders-Sein'로서 다시금 하나의 물신으로, 존재자의 비가역성이라는 물신으로 된다. [/] 그것은 단순히 '바로 그러하며 달리 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조건들 하에서 그렇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아래서는 해소된다." (319/321); 숙명론, 숙명론을 포함한 하이데거식 존재론 비판.




"그 밖의 핵심용어들" 장.



"변증법은 언어적 계기를 비판적으로, 즉 표현의 정확성을 통해 구출해야 한다. 언어는 관념과 사안을 서로 갈라놓는 어떤 것 그리고 이러한 분리에 맞서 활성화될 수 있는 것 둘 다이다....수사적 질 속에 문화, 사회 그리고 수사가 매개하는 관념의 전통 전체가 침전되어 있다." (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