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onel Trilling. "In Mansfield Park". [130611]

Reading 2014.03.18 11:53



* 2013년 6월 11일 페이스북.


Lionel Trilling. "In Mansfield Park". 읽고 요약 정리함.

 

 

이 논문에서 트릴링은 오스틴의 전체적인 특징을 설명한 뒤 _Mansfield Park_의 이질적인 성격을 지적하고 다시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을 통해 근대문명의 변화를 포착한 소설가로서 오스틴의 중요성을 재강조하는 순서를 밟는다. 이 고전 변증법적 전개가 실제로 오스틴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지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당대의 역사-문화적 측면과 (오스틴이 남긴) 사료를 포괄하는 트릴링의 설명은 조금은 이언 와트Ian Watt를 떠올리게 한다. 텍스트의 이질적인, 혹은 비판받기 쉬운 면모를 재해석하면서 작가의 전체 성취의 일부로 끌어오는 과정은 그 자체가 트릴링을 고전적인 스타일의 비평가로 간주하게 하나, 이후의 적잖은 19세기 영소설 연구들이 섣부른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섣불리 넘나들려 하다가 양자 모두를 붕괴시키는 걸 감안한다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 면모도 있다.

 

 

- 트릴링은 오스틴의 가장 일반적인 성격으로 인식적 장치로서 irony를 사용하는 방식을 꼽는다("a method of comprehension" / "It perceives the world through an awareness of its contradiction, paradoxes, anomalies"). 오늘날의 시점에 19세기 작가에게 너무나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오스틴에게 새로운 인식은 곧 윤리/도덕적인 성장과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환경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때로 오스틴은 놀라울 정도로 경제결정론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바로 그 제약된다는 사실 때문에 미덕과 의미가 가능해진다는 트릴링은 설명은 타당하다("the recognition of the facte that spirit is not free, that it is conditioned, that it is limited by circumstance" "only by reason of this anomaly does spirit have virtue and meaning"). 어떻게 세계의 불합리한 질서가 우리의 삶을 강제하는지를 독자들이 깨닫도록 인도한다("it is we who must be disabused of our belief that life is sane and orderly")는 점에서 오스틴 소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계몽적"일지 모른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미 서술했지만, 세계의 논리가 그 자체로 타당하고 건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스틴의 시선=아이러니는 때로 냉소처럼 보일 정도로 차갑다.

 

 

- (이하 MP)가 문제적인 까닭은 이 소설의 입장이 위와 같은 흐름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Fanny Price 및 Edmund Bertram (덧붙이면 Sir Thomas Bertram)이 대변하는 가치는, 후자의 성직수임ordination을 제외한다고 해도, 매우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 독자들의 입장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평가될 가치들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MP의 오스틴은 "사회의 강요"("social coercion")을 그대로 따르는 반동反動적인 작가처럼 보인다("the need to find security" / "preference for rest over motion").

 

 

- 트릴링은 이것을 단순히 오스틴의 보수성으로 볼 게 아니라, 즉 어떠한 가치를 지키려는 데 작가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며 소설이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볼 때, 곧 소설의 목적을 특정한 가치를 공격offend하는 것으로 볼 때 비판적인 작가로서 오스틴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내게는 _Hard Times_ 같은 "성공한 작가의 이상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트릴링이 MP와 대척점에 놓는 소설은 1년 전에 출간 된 _Pride and Prejudice_ (이하 PP)이다. 실제로 PP의 주인공 Elizabeth Bennet은 MP의 (Fanny와 대결구도에 있는 악역인) Mary Crawford와 매우 유사하다. 두 인물이 함께 어떤 활기넘치고 밝은 면모("spiritedness, vivacity, celerity, and lightness")를 공유한다고 할 때, MP의 주인공 Fanny Price는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병약하고 소극적이며 어두운 인물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트릴링이 제기하는 문제, 곧 PP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특질들이 왜 MP에서는 비판받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의 중요성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Fanny와 함께 Edmund도 단순히 보수반동적인 성공회 성직자(PP의 독자들은 당연히 그 소설의 바보같은 성공회 목사를 떠올릴텐데)가 아님이 강조된다. Fanny의 병약한 면모를 그리스도적 여주인공("Christian heroine")의 맥락으로 받아들인다면 Edmund 또한 단순한 목사가 아닌 자신의 천직life-work에 헌신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문화적 코드 안에서 읽힐 수 있다("In 19th century England the ideal of professional commitment inherit a large part of the moral prestige of the ideal of the gentleman"). 여기에는 후대의 보다 자유주의적인 독자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덕목, 곧 의무duty와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 혹은 [칸트의 용어를 빌리면]경향성들을 스스로 통제하고 타인 혹은 규범에의 충실성sincerity을 갖춘 인물들을 표현하며, MP의 남녀 주인공은 정확히 여기에 부합한다. 곧 오늘날 스스로의 경향성 및 욕망을 긍정하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독자들과 대립하는 가치관 하에서 Fanny 와 Edmund를 이해해야 한다고 트릴링은 설명한다. [아마도 트릴링이 상정하는 후대의 독자들에겐 sincerity 와 insincerity 가 지칭하는 인물 자체가 정 반대일수도 있겠지만] [의무/소명은 명백히 베버Max Weber를 떠올리게 하는데, 베버의 그림자는 글의 뒤로 갈수록 더 선명해진다]

 

 

- 이러한 문화적 코드는 (특히 연극문제에서 드러나는) 자아의 유동성과 안정이라는 보다 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낭만주의적 사고에서는 실제로 극적 인격화dramatic impersonation가 자아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입장 위에서 당대에 인기 있던 개념들인 sensibility 나 volatility 는 자아의 유동성을 극대화하며 실제로 자아를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위험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이처럼 유동적인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이 [여기서 Freud를 연상하는 게 당연한가?] 자아를 안정시키고 보존하기 위한 중요성을 갖는다("That the self may destroy the self by the very energies that define its being, that the self may be preserved by the negation of its own energies"). 바꿔말하면 Fanny 와 Edmund 는 자아의 유동성의 극대화와 이로 인한 (Mary 와 Henry 남매에게서 드러나는) 윤리적 태도의 탈각과 같은 것을 비판하는 입장인 것이다. 수행performance을 통한 자아형성이 가능하다면[나는 여기서 Judith Butler를 의식한다], 이들은 성직수임과 같은 노력을 통해 자아를 안정적으로 형성하며 윤리적인/도덕적인 책임을 유지하고자 한다.

 

 

- 오스틴의 MP가 갖는 중요성은, 그를 근대성을 최초로 인식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면, 헤겔이 영성의 세속화("secularisation of spirituality")라고 부른 흐름에서 수반되는 "불충실함"insincerity을 인식하고 그 위험을 비판한 최초의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데서 더욱 드러난다고 트릴링은 말한다("it is the peculiarly modern bad quality which Jane Austen was the first to represent--insincerity"). 이것은 곧 외적인 행위를 틀짓는 양식style 개념과도 연결된다: 곧 내면 혹은 내적인 덕목들은 이제 외적인 행위양식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 따라서 기만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the style of sensitivity, virtue and intelligence" / "Style, which expresses the innermost truth of any creation or action, can also hides the truth"). Mary Crawford는 위선자가 아니다; 그녀의 문제는 단지 이와 같은 내적 덕목과 외적 행위의 괴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했던 데 있다("Mary Crawford's intention is not to deceive the world but to comfort herself"). 매 순간의 행동/수행을 통해 자아의 재구성이 가능할 때, 혹은 자아의 유동성이 증대된다면, 이것을 깨닫고 활용하는 인간에게 양식을 경유하지 않고는 직접적으로 스스로의 실재를 입증할 수 없는 내적인 덕목들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Henry Crawford를 비판하는 Edmund 에게 Mary 가 무심하게 답변하는 상황은, 그래서 전자의 애정이 환멸로 바뀌는 순간은 이러한 위험성을 보여준다[진실로 극단적인 입장에서 사고한다면, 이러한 사태를 위험성을 보기 때문에 Austen 은 여전히 humanistic 하고 보수적인 작가일지도 모른다--19세기의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 이렇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되겠냐마는]. 트릴링은 이러한 사태들을 통해 "자아의 단순한 통일성의 상실"("the loss of the simple integrity of the spirit")을 경계하는 것이 MP에서 오스틴이 취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한다[이 주장은 Henry Crawford에게 부분적으로 설득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유동성과 통일성/안정성에 관한 트릴링의 주장은 좀 더 보충되거나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 London, Mansfield Park, Portsmouth 의 세 지방의 대비되는 면모도 이러한 구도에서 설명이 된다. 런던이 유동성의 도시로서 인간의 세속화=발전이 지나치게 가속화된 곳이며, 포츠머스가 천박함"vulgarity", 곧 타자를 망각하는, 인간이 동물화되는 장소라면, 맨스필드 파크는 과도한 것과 퇴행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고전적인 장소"가 된다[이 부분이 <신음악의 철학>에서 아도르노가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를 설명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리고 그 중간에 모범적인 한 사례로서 고전주의자 베토벤을 얘기하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우연일까? 트릴링에게선 분명히 헤겔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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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릴링의 설명에 기초해서 설명한다면, Fanny가 (Mary 및 Henry의 양식에 대립하여) 계속해서 꺼내는 원칙"principle"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가변적인 자아 아래에 놓인 보다 근본적인/고정적인 요소다. 앞서 말했듯 양식과 내적 덕목의 분화가 일단 일어난 순간 내적 덕목의 실재 자체가 불투명해진다면, 원칙은 양식의 유동성을 다시금 고정시키는 최종적인 심급이다. Henry 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아를 재규정하려고 하는 시도는--Fanny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그의 개심을 보자--다시금 보다 깊은 심급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원칙에 의해 제지당한다; 원칙 자체를 바꾸지 못한 Henry는 결국 원래의 '여자 사냥꾼'으로 추락한다. 냉정히 말해 철저히 외적인 증거들로 볼 때 Fanny가 Henry를 거부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다른 가족들이 그랬듯). 그러나 그녀는 그 외적인 행위들 아래로부터 어떠한 원칙principle을, 직관에 의지해서든 다른 무엇에 의지해서든,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판단은 최종적으로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곧 principle 은 Freud에게 있어서 무의식, Marx 에게 있어 생산양식과 같은 (Althusser의 표현을 차용한다면) 최종심급이다. 의도적 선택들의 누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자아됨"("selfhood")과 같은 표현으로밖에 지칭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도 MP는 충분히 흥미로운 텍스트지만, 몇 가지 문제가 남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외적인 행위만으로 파악될 수 없는 최종심급=원칙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할 때 (이는 Austen을 곧바로 Frued 및 Lacan과 연결시킬 수 있게 만들어주는 흥미로운 구조화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인식이 가능한가? Fanny가 겪는 최대 난점은 그녀가 자신의 결정을 타인에게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사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무의식이 그러하듯, 그녀는 오로지 사후적으로밖에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없다. 두 번째로, 만약 우리가 MP를 진실로 윤리적인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Principle 은 그 자체가 또 다시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곧 우리는 행위와 내면의 괴리를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가?

 

- 추가적인 질문 : 자본주의적 정신, 곧 그 자체로 과거에 무의식이었던 경제적 요소를 의식의 차원에서 전개시키는 정신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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