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로뱅스키, <투명성과 장애물> 일부 인용: 로크, 루소, 칸트와 계몽의 갈래들. [140224]

Reading 2014. 3. 18. 12:19

*2014년 2월 24일 페이스북.


장 스타로뱅스키Jean Starobinski.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_Jean-Jacques Rousseau, La Transparence et L'obstacle_. 이충훈 역. 아카넷, 2012. 3장에서 루소의 <피그말리온>을 해설하는 부분에서 인용.

"루소는 로크의 경험론과 말브랑슈를 읽고 배운 교훈으로부터 "사물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으려드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우리의 관념이나, 우리의 감각,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감정 속에 있다. 즉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150)

"...자연인은 곧장 루소의 '자아'가 된다. 루소가 자연인을 보여주고 싶다면 '자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 모습을 가리켜 보여주는 일(demonstration)은 더 이상 외부 대상을 지시하는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일(monstration)"이다. 의식이 우리게게 나타나 의식의 특이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스스로 보편적 진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151)

"...악은 여론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상적 미가 환상으로 정의된다. 악은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외관이었으며, 선과 미 역시 공히 주관적이다.
실재 외부 세상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고 해도 이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리는 이제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텍스트를 읽어보면) 루소는 외부의 물질적 실재가 베일에 싸여 있기를 분명히 바라는 것 같다. "사물 그 자체"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내적으로 분명해지지 않는 연구는 전부 헛된 것이거나 불길한 것이다. 헛된 호기심(Vana curiositas)이다." (152)

"여기서 육체의 불투명성에서 해방된 정신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전통적 플라톤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루소는 지상의 존재가 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전적으로 대면하면 그 존재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영혼의 개념과 신의 개념이 여기 포함된다)을 감추어버릴 수도 있을 베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와 베일 아래 감추어진 "무한한 존재"를 결부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을 듣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 속에서이다. 우리가 기대야 할 곳은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내적 확실성이다. 의식의 법은 보편 이성이자 내밀한 감정이기도 하므로 그 법에 단단히 기댈 수 있다. 칸트는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할 때 루소의 사상을 완벽하게 철학적으로 공식화할 것이다." (154)

"그러므로 '계시'가 있다. 신학에서 제시된 계시가 아니다. 중요한 단 한 가지 계시가 있다면 그것은 교리가 주장하는 계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그 자체로 즉각 알게 되는 계시이다. 계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우리의 존재 감정만큼 직접적으로, 또 부인할 수 없도록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dictamen)'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을 수는 없다." (155)

"절대자(l'Etre)를 "신비롭게" 경험할 때 자연의 물질적 베일벗기기가 필요가 없어진다. 베일을 벗기는 일도 여전히 행동을 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 역시 '매개적' 행동이다. 그런데 루소는 능동적 지식을 완전히 초월한 존재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의 감미로운 경험은 절대자가 스스로 베일을 벗고 '즉각'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경험이다. 이제 그는 애를 써서 찾아내고 경험할 필요가 없이, 그저 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절대자를 맞기만 하면 된다. 이제 내가 베일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그렇게 한다." (156)

"절대자에게 느끼는 희열로 세상에 대한 불가능한 지식이 완전히 대체된다. 주관적으로 총체성을 느낄 때 자연과 자연의 법칙에 대한 객관적인 베일벗기기가 이것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이제 베일을 벗겨야 할 외부의 스펙터클이 아니다. 자연은 "내적 감각"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 팽창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의 보편 체계"가 희열로 충족된 단일한 자아 속으로 흡수된다.
...
베일을 잡아당길 때 오류의 주관성은 사라지지만, 마지막 순간 우리는 그 자체로 진리의 확실성을 갖는 새로운 주관성과 마주하게 된다. 유해한 주관성이 유익한 주관성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과 마주했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의식을 벗어난 적이 없다." (157)

"우리는 갈라테이아에게서 감각의 생명이 깨어나는 모습을본다. 존재한다는 의식이 꽃피어, 잠들어 있던 돌의 무를 깨고 나타난다. 존재 감정은 더욱 본원적인 것, 깨어나는 '자아' 속에서 이해된다. 깨어난다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최초의 일이다. 다시 말하면 태어나는 의식은 아직 과거가 없고, 시간을 전혀 모른다....
여기서 루소가 깨어남의 순간에 부여한 특별한 가치에 주목해보자. 특히 의식이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역사나 과거에 관련지어 볼 수도 없으면서 깨어난 극히 드문 상황에 얼마나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지 보자. 그때 의식이 갖는 현재의 완전한 투명성은 그 무엇으로도 혼탁해질 수 없다." (158)

"루소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갈라테이아의 자아와 "사람의 아들"이 말한 보편적 진리였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우리가 이미 강조한 바 있듯이, 루소는 자기 쇄신의 시대에 근본적 진리와 망각된 순수를 투명한 원천에서 증명하겠다는 의무를 떠맡았다. 그는 한 명뿐인 장 자크 루소가 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자연인이라는 보편적 모델이 되고자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아'의 감각적 충만을 느끼는 동시에 진리를 소유하고자 한다. 특이한 존재로서의 유일성과 보편 이성의 단일성을 동시에 갖고자 하는 것이다." (160)

=================================

: 매 페이지마다 숙고할 표현들이 있는 이 탁월한 저술에서(피터 게이가 이 책을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했던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타로뱅스키는 인식론과 진리에 관한 문제틀이, 그 문제틀에 내재한 '인간학'이 로크-루소-칸트(카시러의 루소-괴테-칸트가 떠오른다)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생각해볼 단서들을 제공한다. 이들은 '계몽사상'의 서로 다른 갈래들, 그들의 국적만큼이나 다른 방향들을 대표한다; 경험주의, 낭만주의, 비판철학;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루소의 경우 자신의 후계자들이라고 지칭되는 이들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풍성하다. 이들의 미묘한, 언젠가는 같이 붙들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될 차이들은 그러나 특정한 개념과 그 개념을 둘러싼 구축물들을 공유한다. 그 개념을 지칭할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으로서의 '감각'sense이다.

물론 감각은 대부분의 개념들이 그러하듯 홀로 설 수 없다. 감각은 감각을 존재할 수 있게하는 장field으로서의 '내면'을 요구한다(그리고 감수성sensibility, 문자 그대로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수용성--은 감각과 내면을 이어주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후에 심리학-신경과학으로 이어지게 될 감각기관의 생리학적 연구는 아직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감각-내면의 개념쌍을 고안하고 받아들인 이들은 존재론적 탐구를 진행한다. 자신의 작업을 한계선을 긋는 것으로 규정한 칸트가 내면의 존재론적 탐구를 가능한한 멀리까지 밀어붙였다면, 그리하여 건축물로서의 인간내면을 만드는 기념비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면--바로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과 프로이트는 칸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인용문에서 언급되는 루소의 경우 한계선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감각-내면의 쌍개념이 맞이하는 최고의 난관은 전자를 도대체 어떤 지점까지 신뢰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느냐이다. 내면=주체에게 감각 자체를 쓰다듬고 확인하는 작업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감각이 진리를, 실재를 '투명하게' 드러내는가? 로크보다 한 세대 앞선 데카르트에게서 이미 제기되었듯 ("전능한 악마") 감각은 참된 인식으로 이끌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항상 불완전한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 가능성이 잠재해있다. 아주 엄밀한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 문제는 문제가 제기된 그 자체의 방향에서는 해결되지 못했다. 대신 조금씩 다른 형태의 해결들이 나타난다. 편의상 마치 국경과 입장이 일치하듯이 적었지만, 실제로 이들은 매우 복잡한 상호영향관계에 있다(다만 영국인들이 독일인들의 사고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협소한 경로로만 한정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적어도 사고체계의 근본원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만큼은 뚜렷하게 폐쇄적인 인상을 종종 주곤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거쳐 경험주의의 직접적인 후신 중 하나로, 대신 논리적으로 훨씬 비타협적인 후계자로 등장하는 효용주의(공리주의)의 경우, 오로지 감각만이 참되다는 것으로 인식의 한계를 규정한다--그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던 벤담의 텍스트가 이것을 원형적으로, 순수하고 순진한 형태로 주장낸다. 이들은 계몽의 여러 갈래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다수를 점한다. 철학으로는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논리-실증주의를 거쳐 오늘날의 영미철학으로, 정치경제적인 지배담론/사회이론으로서는 한계효용혁명 이후의 주류경제학으로, 과학으로서는 심리학-신경과학으로 뻗어간다. 사회학을 심리학의 덜 순수하고 열등한 파생물로 묘사하는 종류의 인식은 이러한 역사를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드러내는 것--그리하여 그 자체로도 열등한 인식--이다. 물론 그들이, 계몽의 가장 강력한 후예들이 내면의 감각으로 참된 인식을 한정했다고 해서 외적인 실체에 무관심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가장 적극적으로, 뒤집어 말해 반성과 가책없이 "주체가 아닌 것"을 조작하고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그들이다. 정확히 말해 내면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자연--非주체--이 존재하며 내면의 유지를 위해 자연에는 어떠한 일을 해도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이 진전되면서 나타나는 퇴행의 상태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데, 객체에 갖는 증오 및 자연신화로의 복귀라는 양가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타난 게 나치-독일이라면, 객체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단지 좀 더 효율적인 착취를 원하는 쪽은 대영제국의 지배자들을 포함한 다른 서구인들이다.

칸트의 뒤를 이어 '비판'의 모티프들을 가져간 독일인들은 내면-감각과 바깥-실재의 대립/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는다. 칸트는 사물 자체라는 카테고리의 선긋기를 통해 한편으로 분리를 인정하면서도 선 안쪽에 있는 내적 구조를 구축해가면서 분리를 넘어설 계기들을 우회적으로 마련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감각만이 참되다는 일차원적인 조악함에 동의하는 대신 칸트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감각기관들 및 감각자료를 정리해 활용하는 '인간의 보편된 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에 나아갔다(칸트의 마지막 주저가 <인간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비치지 않는다). 우리가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들이 사물 자체의 현상들이 나타나는 예지계(우리가 지각 및 인식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근본구조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의 참됨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나 우리의 내적 구조가 실천적인 영역과 미적인 영역에서의 판단에까지 개입한다면 말이다. 칸트는 실천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말고는 직접적으로 참된 무언가의 가능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논지 아래에는 참된 무언가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하게 만드는 전제들이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헤겔의 경우, 부정적인 것을 마주치면서 나타나는 반성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사유도구다. 칸트가 감각들을 종합하여 인식과 판단, 실천으로 이어지는 틀을 마련하려 했다면, 헤겔은 감각들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감각들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족분은 어떤 식으로든 곧 드러난다. 감각이란 단어를 고집하여 풀어본다면, 우리는 감각이 부족함을 지각한다; 그리하여 사실과 감각의 불일치에 대한 인식을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식은 보다 종합적인 것이 되고 전진한다. 보통 이 과정을 '지양'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을 인간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로 바꾼다면 '반성'reflection이 된다. 끊임없이 부정성과 마주하고 반성을 통해 고차적인 인식으로 전진/상승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 헤겔의 기본적인 패턴이며, 여기에서 헤겔은 내면과 실재의 갈등을 극복할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해결책들과 차원이 다른 '축'을 보여준다. 
칸트든, 벤담과 그 후계자들이든, 이전까지 인식의 한계짓기와 전진은 오로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이라는 축 안에서만 진행되었다. 벤담의 감각과 쾌는 오로지 그 지각단위를 인간의 내적 인식에만 두고 있으며, 칸트가 묘사한 인지구조는 마찬가지로 한 명의 인간을 표본으로 한 것이었다; 다수의 인간이 느끼는 쾌/불쾌의 값을 합산한다는 벤담의 지극히 간편한 방법을 제외한다면(J. S. 밀은 이것에 조금 복잡한 변수를 제공한 것 뿐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논리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이 개인과 등치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느새 자명한 논리처럼 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보수적인 사회이론들에도 전혀 반성되지 않고 남아있는 최초의 전제다. 헤겔이 갖는 두드러진 면은 반성과정이 단순히 인식 대상으로의 무한한 접근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인식주체 자체마저도 바꾸고 확장한다는 데 있다. 특정한 개인의 의식은 반성/지양을 거치면서 어느새 시간, 공간, 인식의 참됨 모두에서 발전하고 확장되어, 역사철학의 기본단위인 민족국가로, 나아가 절대정신 그 자체가 '된다.'

루소는 양자 모두와 부분적으로 겹칠 듯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길을 따라간다(아마 스타로뱅스키를 계속 읽어나다면 여기에 추가할 내용들이 나올 것이다). 인용된 내용에 국한하여 볼 경우, 루소는 분명 내면에 진리가 위치한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인들처럼 단순히 감각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베일'과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 그리고 그의 유년기의 '빗 사건'에 대한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안과 바깥의 괴리야말로 루소가 평생에 걸쳐 붙들려있던 모티프였다(<투명성과 장애물> 23-31). 한편으로 그러한 괴리(장애물)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면, 다른 한 편으로 괴리를 극복할 진실(투명함)이 루소에게서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실의 현전,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투명함은 일상에 평범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순간적으로나마 모든 것이 다 드러나 투명해보이는 내면의 상태가 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총체성"은 "베일 벗기기"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157). 내면이 가장 순수한 상태에 들어섰을 때엔 베일을 포함한 자연을, 실재를 한번에 모두 인식하는 지각의 투명함('깨달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스타로뱅스키가 소개하는 루소의 초기 미발표 우화 중 하나에서, 소크라테스를 닮은 이가 조각상을 둘러싼 베일을 벗긴 뒤에도 아무런 소득없이 죽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반영물이다(136). 진리를 벗길 필요없이,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수용하지 않아도 주체는 객체에의 참된 인식,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주체=객체가 되는 것이며,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투명성은 곧 만물이 분리되지 않는 총체성과 개념적으로 근접해 있다. 그리고 나는 루소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퇴행하는 하이데거 사이의 어떤 인접성을 의심한다(물론 스타로뱅스키가 보여주는 루소는 다면적이며, 이 독서가 끝날 때까지 루소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소 성급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