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의 <가족이라는 환상>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4. 4. 15. 01:3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2445.html?_fr=mr1


사실 '가족'이라는 단위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구성단위라는 믿음은 꽤나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예컨대 19세기 중반 영국의 작가 디킨즈의 중기 소설들은 전부 가족이라는 단위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서사로 읽힐 수 있다(우리에게 친숙한 몇 안 되는 작품인 _Great Expectations_는 사실 디킨즈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구성단위였던 가족이 완전히 파탄난, 디킨즈의 전형이 무너진 후기작으로 보는 편이 맞다). 결혼 및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끝을 맺는 통상적인 로맨스 또한 기본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고... 근대문학과 가족은 꽤나 흥미로운 주제인데, 나는 무엇보다도 근대소설에서 '가족의 바깥'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한없이 정신없고 불안한 세계와 만나는, 아니 애초에 세계의 질서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을 떠올린다. 마치 배를 타고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한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옛 시대의 지도들처럼, 가족이라는 단위를 벗어나는 사유 자체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이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김사과가 말하는, 온통 우리의 인식 주변에 가족이 편재되어 있다는 진술은 당연한 사실을 다시 발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진술의 당연함을 이야기하기보다 그 진술의 새로움을 이야기하고 싶다. 두 가지 포인트.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가족으로 이루어진 (나는 세포들로 이루어진 생명체, 단자들로 이루어진 세계 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세계에 살고 있었다면, 사실 그 단위는 우리가 그것들을 유별난 것으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들어왔다. "한국은 끔찍할 정도로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그러지 않았던 적이 우리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자명한 것을, 인식의 기초가 되는 것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없다. 마치 안구와 망막세포가 형성하는 시각적 상의 뒤틀림을 인식할 수 없듯이. 그런 점에서 김사과의 질문은, '가족'이라는 "당연했던" 단위를 인식하는 질문은, 그러한 질문 자체를 떠오르게 한 현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추가적으로 유발한다...가족은 아직 당연한 체하고 남아있지만 이제 예전처럼 당연하지는 않다. 두 번째 포인트, 김사과는 어떠한 현상을 근거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가? 그는 두 가지 상황을 지목한다. 대중서사물의 '환상적인' 가족(마찬가지로 대중서사물에서 가족이 없던 적이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LA 아리랑> <순풍 산부인과> 이후에는 적어도 주류에서는 가족이 없었던 적이 떠오르지 않는다...때때로 두 사람의 로맨스가 가족을 덮어버리거나 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겠지만)의 범람, 현실의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문제들. 만약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오래된 도식을 다시금 사용하도록 허락받는다면, 전자는 정확히 후자를 덮고, 망각하고, 대체-인식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설명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사과가 목도하고 있는 현상은 사실 두 분리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원인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닥트리고 있다.


김사과가 맑스주의적 논리를 얼마나 선호하는지는 모르겠지만--오늘날 한국에서 경제적 차원의 설명을 배제하고 말하기가 더 어렵다--, 가족이라는 생활단위의 붕괴는 그 자신이 설명하듯 확실히 정치경제적인 변동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가족을 유지하기 전에 애초에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의 증가값이 예상소득의 증가값을 점차적으로 넘어서면서 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도식, 즉 3-4인 핵가족조차도 구성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단적으로 나 또한 특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행운 혹은 원조가 없는 한 자식을 낳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교육격차의 극단화는 '평균적인' 교육수준을,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학력자본을 소유하기 위한 기대비용을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있으며, 이는 아들/딸을 낳으면서 언젠가 자녀가 직업을 얻고 자본을 지속적으로 획득할 것을 기대해야만 하는 현재의 조건 하에서 더더욱 가족재생산을 포기하게 되는 요인으로 나타난다. 경제적 기초단위로서 가족의 붕괴는 문화-생활단위로서 가족의 붕괴를 함께 촉진한다. 어떤 면에서 가족을 더 이상적인 장소로 그리고, 가족이 대표하는 가치들을 다시금 추어올리는 경향은 이러한 붕괴의 반작용이다.


나는 김사과가 제시하는 결론, 그러니까 가족 바깥에 새로운 형태의 삶의 공간--한국에서 현재 '사회'란 정확히 가정의 여백에 불과한, 아슬아슬한 생존 이외의 '삶'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공간이다, 특히나 일정 이상의 소득을 확보할 수 없는 사람에겐--을 창출할 가능성의 요구에 동감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단위=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구체적으로 경제적인 삶, 혹은 '살림살이'를 보장하지 않는 공간은 사회의 최소단위로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이 시장화된 사회 안에서 자본의 분배를 의미하든, 혹은 (때로 가족이 그렇다고 믿어지듯) 시장의 영역이 침투하지 못하는 영역의 창출이든, 물질적인 삶이 존속할 수 있고 또 단순히 존속하기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케하는 단위=공간만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존재할 수 있다. 애초에 현재의 3-4인가족 형태가 자본의 압박 안에서 섹슈얼리티, 양육, 경제적 삶의 필요를 최소한으로 보존하는 것이었다면, 즉 이전의 보다 큰 형태의 가족을 압축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압축의 요구 자체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또한 반드시 함께 질문되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새로이 요구되는 경제적인 공간은 동시에 정치적이기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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