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익명의 서평 한 편

Comment 2022. 12. 31. 08:55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읽은 지인이 아래와 같은 긴 익명 서평을 써서 보내주었다. 책의 직접적인 대상독자에 해당하는 친구가, 그것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 이렇게 재미있게 읽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의미가 있다. 필자의 동의 하에 원문 그대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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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박사하기

그렇다고 망가지는 대학원과 학계를 바라만 볼 수 없다. 더 나은 곡선을 그리는 미래의 대학원을 위해 신진 연구자 여덟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에는 경험, 문제, 필요와 대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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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소감문

 

책은 인문사회과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위 과정의, 또는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이 들려주는 오늘날 한국의 고등교육제도(대학원) 관한 흥미로우면서도 읽기 쉬운 좌담록이다. 책의 문제의식과 목표는 뚜렷하다. 위기론을 넘어서야 위기를 똑바로 있다는 , 그리고 그러한 작업의 물꼬를 트기. 결과적으로, 책은 목표를 달성했다. 위기를 직시하기 위한 논의의 장을 열었고,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 책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위기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환경에 대한 탐구" 일견 익숙해 보이는 사회과학적 연구 주제이지만,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담록은 다양하고 생산적인 대화의 훌륭한 선례를 마련했고, 미래의 유관 논의는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책을 참조하게 것이다.

여러 흥미로운 관찰과 생각 가운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대학원 거버넌스( 안에서 '원생' 가진 극도의 취약성), 미국 유학이 정석이 버린 학계, 학계의 가속화에 관한 논의이다. 해당 주제들은 이전부터 익숙하다고 생각했고, 대강 어떤 논의가 나올지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읽으면서 많은 공감이 들었다. 책의 백미는 좌담회의 필진 대표 이우창이 제시하는 '거시적인 관찰(167-74)' '학계의 지향(177-9)'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 인문사회계는 1990년대 이후 과거의 기능(엘리트 시민 교육이나 사회적 의제 창출 설명) 상실하고 정부 지원에서도 이공계와 비교했을 터무니없이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적은 재원(공무원의 )으로 인문사회 연구를 관리하는 데서 오는 관료화, 그리고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단계를 넘어 수용하게 이공계 기준의 보편화 등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대안을 만들 있을까? 그는 한국 사회에서 인문사회 연구만이 가질 있는 기능과 효용을 적극적으로 가다듬고 확장해야 필요성을 든다.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역량인 '질문할 능력' 좋은 소재가 것이다. 이를 통해 고등교육 담론을 다시 수립할 있겠다. 그는 "특히 정부가 더는 학계를 위한 장기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219) 인문사회계가 주도적으로 그러한 전망을 수립할 있고 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지적에 깊이 동의한다.

독자로서 편견 가지를 고백해야 하겠다. 나는 이우창과 2010년대 중반부터 알고 지낸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그대로 언제나좋은 친구이자 우군이자 멘토이다. 내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 '미국 인문사회계는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지근에서 관찰해 보라' 그의 주문은 사뭇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학을 준비하는 자체가 한국 학계에 대한 '배반', 또는 시샘의 대상이 되던 환경 속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그의 실용적인 조언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와 지도교수, 지도교수와 학과, 학과와 학교, 학교와 학계, 미국 학계와 한국 학계 고등교육 여러 단위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탈중심적으로 있게 도와주었다. (탈중심적이란 말은 어떠한 것을 중심적인 자리에서 제거한다는 의미로, 해당 소재를 여러 차원의 맥락과 층위에서 있게 해준다. 이우창이 소개해준 방법론으로,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책은 인문사회계 원생 있는 여러 작은 실천들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하나가 바로 운동 아닌 제도 개혁으로서의 접근법이다. "제도를 바꾸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근거가 생기려면 데이터가 쌓여야"(55) 한다는 이우창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다양한, 생산적인 대화" 많아져야 하겠고, 그러한 대화들이 데이터로 축적돼야 것이다. 인문사회 데이터를 수집하고, 만들고, 분석하는 일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누구보다 있다.

책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기에, 책이 추구하는 지향을 현실화하는 작업에 도움이 만한 가지를 서슴없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책의 필진이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국내 인문사회계는 굉장히 수직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인문사회계도 특정한 분야에서는 굉장히 수직적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인종과 젠더 요소가 개입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공계와는 달리 랩이 없기 때문에 출퇴근이 자유롭고,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있다는 정도가 장점이다. (물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교수들의 메시지에 정해진 시간안에 응답을 해야 하는 상황은 그러한 시간적 자유 무색하게 만든다.)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를 막론하고 교수가 갖는 자원 배분권은 막강하며, 인문사회계가 가진 파이가 무척 작다는 점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곤란이 가미된 강고한 수직적 매트릭스 속에서 '원생', 적어도 내가 공부하던 때를 떠올려 보면, 쉽게 발언하기 어렵다. 때론 그러한 발언 자체가 내부고발(whistle-blowing) 인식된다. 그리고 우리는 학계, 아니, 어떠한 사회든, 내부고발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알고 있다. 논리를 조금 밀어붙이자면, 인문사회계의 위기론을 넘어서려는 지향에서 나온 소신 있는 발언이 해당 연구자의 연구자로서의 사회적 위기(학계에서의 낙인과 종국에는 퇴출) 초래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국학 연구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있을 텐데, 그러한 연구자들의 참여를 독려할 있는 전략의 수립은 의미가 크다고 있겠다.


테뉴어 트랙에 진입한 교수들이 이러한 좌담회에 선뜻 응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교수들의 의견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인문사회계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할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여러 차례 지적된 것처럼, 이공계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논문(특히 품이 많이 들어가는 영어 논문) 대량 생산하고, 여러 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고, 과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느라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건강을 해친다는 이야기는 비단 원생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학령 인구가 급감하는 추세 속에서 새내기 교수들이 처한 현실도 학교마다, 지역마다, 성별마다 꽤나 다를 것이다. 힘들게 입사했으나, 종신 교수를 향한 노력은 이제 시작되었다. 안에서 인문사회계의 위기 극복을 위해 대화는 사치일 것이다. 종신 교수직을 꿰차면 자연스럽게 보상심리가 들지 않을까? 죽어라 고생해서 교수가 됐는데, 교수로서의 '특권'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 않을까? (이상한(?) 비유이나, 보상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중국의 사례만 것이 없다. 인류가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후발국 중국은, ‘선진국 이미 100여년 넘는 세월 동안 열심히 화석연료를 썼으면서 중국은 못하게 하느냐고 따진다. 중국은 선진국에게 역사적 책임 지라고 한다. 물론 선진국 책임질 생각이 없다. 중국의 화석연료 쓰임도 당장에 줄어들 같지 않다. 기후위기의 모든책임을 중국에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지구의 온도가 올라간다면, 인류는 22세기의 여명을 보지 못하고 공멸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진 지금, 한국 인문사회 대학원을 매력적인 ,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싶은 곳으로 바꾸는 일은 추가적인 논의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인문사회계의 주도권을 갖는 방편으로 이러한 지점을 파고들 없을까? 영어권 학계에서 나온 한국 관련 저작들 가운데 영향력을 가진 것은 거의 없다. 영어권 학계의 규모가 한국 학계와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크고, 안에서 주변화된 한국학이라지만, 이는 달리 생각해 보면 한국 학자들의 해외 노출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인들이 궁금해하는 한국, 알고 싶어 하는 한국에 관한 수요를 조사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작업(지식 공급) 한국 인문사회 대학원이 세계와 소통하는 유용한 창구이자 역량 강화의 좋은 방안이 되진 않을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진정한 한국發 인문사회 스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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