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세속화, 종교, 그리고 현대 미국의 혼란에 대한 혼란스러운 단상

Comment 2022. 5. 6. 19:29

논문 쓰다가 잠시 쉴 겸(?) 페친 분의 포스팅을 읽고 짧게 정리되지 않은 코멘트를 쓴다. 원래 페이스북에 짧게 쓰려고 했던 거라 비문과 음슴체가 작렬하겠지만 알아서 적절히 걸러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I.
 


이른바 "서구 문명"과 기독교 전통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워낙 역사가 길고 축적된 논의가 많아서 정리하기도 힘들고 한국은 물론 영어권 학술장에서도, 종교학 전공자들은 이런저런 시도들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완벽하게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안 나온듯. 종교학 바깥에서 이 주제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건 영어권 학계에서는 1990년대 정도부터인 것 같음(나도 안 파보고 종교 쪽 전공자들 이야기할 때 가끔 귀동냥한 수준이라 잘 모름; 틀린 부분은 알아서 댓글이나 별도 포스팅으로 풀어주시면 감사 ㅎㅎ). 대충 큰 쟁점 몇 가지를 뽑아보면 이런 것들임.
 
1) 먼저 자유주의 VS. 좌우파 라는 20세기 후반 이래 영미 학술장의 정치적 지형을 고려해야 함. 지금도 그럭저럭 통용되는 구도라고 생각하는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자유주의=근대화=세속화 라는 입장이 가운데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좌우파들이 여기에 도전하는 구도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고, 아래의 연구 모두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음. 정치철학/사회철학 전공자들에게 좀 더 익숙할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은 이 케이스의 일부. 간단히 말하면 근대 자유주의가 공동체와 종교, 사회, 계급연대, 가정 등등을 다 박살내버리고 인간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좌파버전은 그러니까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와 계급, 소수자 연대 등을 강화하자!는 결론으로 가고, 우파버전은 전통과 가족, 종교, 사회 등등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게 클리셰
*유사버전: "이게 다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이다"

 

 (내가 19세기를 안 파서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구도는 19세기 팸플릿들에서부터 지겹도록 나오는 이야기인것 같음. 자연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 경도된 파리의 혁명광신도들이 기독교&기사도에 기초해 겨우 쌓아올린 우리 문명을 다 박살낸다!고 성토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의 성찰>을, 버크 본인은 대체로 계몽주의의 영향 하에서 살아간 사람이었지만, 후대의 보수주의자들이 경전화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20-21세기가 19세기를 어떻게 반복하는가의 한 예시일지도 모름)
 
(그래서 이 흐름에서 보면 나는 조던 피터슨이 대단한 지식인 취급을 받는 게--그것도 지금은 한물 갔지만--솔직히 farce처럼 보임. 세속화와 자유주의 논쟁의 큰 맥락에서 보면 피터슨은 그 논쟁의 거물급들이 치고 받은 뒤 이슈 몇 개 주워먹고 오리지널한 건 거의 없는 잔챙이가 아닌가 함. 우파 사상가 좋아할 수 있지, 근데 좋아하고 칭송할 거면 급이 좀 더 되는 사람을 파는 게 맞지 않음??이 내 의견).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세속화는 해롭다'는 공격을 넘어 본격적으로 계몽주의 이래, 특히 68과 성혁명 이후 종교가 쇠퇴했다(교회 출석률 폭망 등등)...는 '세속화' 내러티브가 비판받기 시작.
 
2) 1990년대부터 종교사회학자들이 '실제로 그런가'를 연구해보니 현실은 좀 다르다는 분석이 나옴. 글로벌하게 보면 종교의 '공적' 영향력은 딱히 줄어들었다고 볼 수 없고, 1980년대부터는 오히려 "탈사적영역화"(deprivatization, Jose Casanova, _Public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_, 1994)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
 
3) 우리가 "세속화"와 동일시하는 '근대적' 요소들이 실제로 그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보편적'인 것인지, 즉 그것들이 실제로는 특정한 종교적 맥락/계보에 기대고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들이 나옴. 특히 '근대민족국가'든 '자유주의'든 그것들의 기원과 전제를 따져보면 그 배경에 기독교적 원천이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렇게만 정리될 순 없겠지만, Talal Asad의 세속화 연구 같은 작업이 한국어로 전혀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건 아쉬운 지점).
 
4) 2번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인데, 이전까지 기독교/종교의 지배에 대한 반발·비판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왔던 17-18세기 (서)유럽, 특히 계몽주의/계몽사상을 역사적으로 더 제대로 파다보니 종교랑 계몽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연구들이 나옴.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한다고 해서 곧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와 그 인접학문은 여전히 당대의 지적 활동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고 등등.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존 로크=근대 자유주의 시조라는 틀린 공식을 외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1960-90년대 로크 연구의 코어에서는 칼뱅주의냐 소치니파냐 유니태리언이냐 그냥 복잡한 입장의 잉글랜드국교회 신도냐 뭐냐...의 문제지 로크 정치사상의 중핵에는 개신교 정치사상이 뚜렷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 자체는 거의 합의가 됨.
 
그리고 2000년에 9.11이 터지고 이슬람문화권(?)의 '자유주의화'가 대대적으로 실패하면서 21세기 초부터 "세속화 연구"secularization studies는 호황기를 맞이함. 다만 한국은 흥미롭게도 학계가 이미 너무나 세속화된(?) 공간이고 종교 연구는 종교인들 혹은 독실하신 분들이나 하는 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서인지 이런 연구가 거의 소개 안 됨(아감벤이나 벤야민 등 철학/이론 한두 개 들고 와서 세속화 어쩌구~ -> 세속화 연구의 핵심쟁점을 모르는 거라고 보면 됨).
 
II.
 
2010-20년대 미국은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나처럼 가끔 들여다 보는 정도로는 뭐가 정리가 안 될 정도임. 그냥 몇 가지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만 꼽아봄.
 
a) 매체적으로는 트위터와 뉴미디어, 각종 평론지들에서 전개되는 논의의 역동성이 매우 커짐. 한국의 경우 트위터는 서브컬쳐나 상업문화, 문화연구 계열의 비중이 높고 전체적인 '학술-공론'의 장소로는 페이스북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데, 영어권은 학자들이나 논평가들이 트위터를 이용하는 비중이 더 높음. 공식적인 언론의 경우도 일간지들의 Opinion 코너의 힘은 대단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수많은 정치적 평론지들이 논쟁의 지면을 제공하고 있으며 뉴미디어의 개화와 함께 이것들의 상호작용도 훨씬 커진 느낌(그런 점에서 나는 NYT나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 등 몇 개 주요 일간지로 미국의 정치적/문화적 논쟁을 따라가는 건 너무 좁은 통로라고 생각함). 어쨌든 과거에 비해 연구자/전문가들이 일종의 '공적 지식인'으로서 논쟁에 말을 얹는 게 훨씬 쉽고 빈번해지고, 역으로 '비판적 셀럽'들이 학자들의 견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도도 높아졌다고 생각.
 
최근에 미국의 '공적 지식인'의 몰락을 한탄하는 좌파 러셀 저코비의 <마지막 지식인>이 번역되면서 여기저기서 언급이 종종 되는데, 이 책은 1980년대--그러니까 레이건 후반기--'어이구 우리 진보 지식인들 망한다'는 감성이 한창 고조될 때 나왔다는 걸 고려해야 함. 한국에서 북미 먹물들 책 수입해서 읽을 때 그 책이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 따져보는 사람들이 드문데(심지어 연구자들조차도!) 걔들도 다 자기들 맥락 안에서 쓰는 거임. 적어도 2010년 이후 북미의 공적 지식인(?)들은 과도하게 늘어서 문제일 수 있어도 전혀 감소세가 아니라고 생각(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 책 그닥 진지하게 추천하고 싶지 않...). 그리고 이는 미디어의 변화랑 연결되어 있다고 (멋대로) 봄.
 
b) a의 맥락 하에서... 젠더정치, 인종정치, 소수자 정치 등 과거 '문화전쟁'을 구성하던 요소들의 위력이 폭발적으로 증대함,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미국 동시대의 여론을 볼 때 PC가 됐든 젠더정치가 됐든(요즘은 "wokeism"으로 많이 부르지만),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 현재 그것들이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문제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시작하는 게 맞음. 당신이 안티페미니스트라고 해서 그 주제들이 안 중요해지는 건 아님. 뉴미디어/SNS를 기반으로 PC운동과 소비자운동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면서, MZ소비자들의 감각에 발맞추려는 대기업들이 대대적으로 리버럴-진보의 젠더/인종 정치의 코드를 받아들이는(!) 흐름이 생긴 건 주목할 변화. 간단히 말해 문화정치의 영역에서 북미 대기업들이 한국 기준으로는 좌경화(?)됨. 물론 CRT 등의 의제를 기계적으로(?) 과도하게 적용하다보니 그냥 공교육에서 수학교육을 박살내는 방향으로 간다거나, 일단 문제 생기면 캔슬부터 하고 보는 기괴한 일들도 벌어짐.
 
c) 트럼프 재임기간 동안 진보-리버럴만 아니라 우파들의 기존 담론이 다 뒤죽박죽(?)이 되어 재편성됨. 한국에서 미국 이야기할 때는 우파=복음주의+신자유주의(or 네오콘) 식으로 도식을 많이 짜는데, 트럼프 통치기에 양자가 결별했다는 점은 중요함. 네오콘이나 전통적인 기업자본 (물론 여기서도 산업섹터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지지자들, 곧 좀 더 전통적인 보수 엘리트들은 트럼프주의자들을 견딜 수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리버럴과 동맹하는 일도 생기는 듯. 오바마-힐러리 스탠스에서 글로벌하게 기업하기 좋았던 것 같기도...(?)
 
d) 다시 종교 문제로 돌아오면, 그렇게 우파의 재편성 과정에서... 기독교 우파 진영에서도 복음주의 외에 카톨릭 우파 스피커들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음. 이번에 Roe v. Wade 판결문 원고 유출로 시끄러운데, 지금까지 복음주의 강경파들에 주목하는 사이 연방대법원에서 카톨릭 우파들의 비중이 현격히 높아졌다는 사실을 체크해야 함. 특히 카톨릭 자연법이 공적인 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의 등장은 매우 흥미로움. 통상적으로 낙태와 '프라이버시권' 논쟁에서 원전주의originalism에 입각해서 헌법을 18세기(?) 기준으로 해석하는 게 우파 법학자들의 전략이었다면, 카톨릭 자연법의 추종자들 중에서는 아예 자연법적 토대에서 낙태를 부인하는 논지를 구축하는 이들도 나오는 듯.
 
(이쪽을 보려면, 결국 나도 이쪽 파는 지인들이 추천하는 것들이나 가끔 보는 정도지만, First Things 같은 평론지들도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 주류 리버럴 언론이나, 반대로 트럼프지지자들/음모론자들의 유사(?)언론 같은 것만 봐선 새로운 흐름을 볼 수가 없음)
 
e) 아프간 철군 및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등등 타국과의 이슈가 끼치는 영향도 큰데 이건 내가 거칠게라도 정리를 못 하겠음.
 
=> 요약하면 2010년대 후반, 특히 트럼프 집권기를 거치면서 미국 리버럴과 우파 진영의 논지들이 전부 뒤죽박죽이 되어 재편성되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는 중(한국에서 박근혜정권-탄핵정국 동안 정당정치의 언어들에 대혼란이 발생했던 걸 훨씬 큰 규모로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려나?). 나는 평가도 전망도 할 능력이 안 되니 걍 개인적인 생각만 덧붙이겠음.
 
III.
 
i) 늘 말하지만 미국의 정치적/문화적 언어를 가져올 때 결국 그 안에서의 맥락을 보고 가져와야 함. 한국보다 논쟁이 훨씬 치열하고 학계랑 공론장의 거리도 가까운 곳이다보니 탑스쿨 교수들도 무슨 이야기할 때 당대 맥락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음. 저자들이 본토(?)에서 무슨 포지션이고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한 건지 모르면 그게 맞는 말인지 이상한 말인지도 판단이 안 됨.
 
지금 미국도 대혼란기라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입장의 스피커든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더더욱 삽질하기 좋은 선택이라고 봄. 2016년 초에 2022년이 이렇게 될지 몰랐는데, 2027년에 어떻게 될지 지금 누가 앎?
 
ii) 이런 대혼란은 당연히 리버럴만의 문제가 아님. 국가-제도에 대한 불신감이 폭발하게 된 트럼프집권기 전후로 리버럴과 우파들 모두 급진화된 입장들이 출현하면서 지금 따라가는 사람들이 정리하기 너무 힘들어진 상황. 미국에서 기업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강성 우파들이 하고 있는 괴랄한 현실을 보라. 개인적으로는 세속화-자유주의-근대화로 인한 공동체적 가치관의 붕괴라는 건 단순히 오래된 메들리일 뿐만 아니라 진짜로 설명력이 있긴 한 건지가 의심스럽다고 봄.
 
늘 그렇듯이, 문명사를 가로지르는 거대서사는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덜 틀림. 인간의 무슨 본성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현실을 설명하려는 유사심리환원론적 썰을--사실 18세기에도 이런 종류의 시도들은 넘쳐나는데--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또 한 명의 독학자구나'라고 넘기기를 추천.
 
iii) '서구 기독교 기원설'은... 나는 박사논문의 테제도 그렇고 종교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곧바로 떡밥을 물기가 저어되는 게, 기독교사를 좀 파보면 시대랑 공간, 입장에 따라 너무 다양성이 큼. 특히 영미권은 17세기부터 종파랑 교회들이 다 쪼개지고 자기들끼리 합종연횡(?)하는 게 많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아주 많은 걸 찾을 수 있지만, 어느 기독교인에게는 해당되는 특성이 다른 기독교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음. 기독교가 문명화의 원천이라는 주장만 해도 내가 본 문헌 중에서는 적어도 17세기 후반부터는 계속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가 정말 다 같은 기독교였을까?도 따져봐야 함.
 
iv) 현재 젠더와 인종문제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논란들은 세속화나 자유주의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냥 미국 또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현대세계가 공유하는 윤리-정치적 언어가 아직 제대로 커버하기 힘든 이슈들이 실시간으로 계속 생겨나고 있는 현황 때문이 아닌가 함. 부분적으로는 의학의 발달에 의해 (20년, 10년 전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보다 트랜스젠더의 '일상화'는 훨씬 빨라지고 있는 느낌), 부분적으로는 불평등과 같은 주제들이 우리의 언어에 훨씬 깊이 침투하면서, 또 뉴미디어에서 여론전파의 속도가 엄청나게 증대하면서, 난민과 이민을 포함해 서로 다른 배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화 되면서 ... 등등에 의해 인간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지금까지의 제도와 문화, 가치관이 대처하기 어려울 만큼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간단하게 말해, 우리는 자유주의(그러나 언제 누구의 어떤 자유주의인가?)의 여러 가지 약점을 손쉽게 열거할 수 있지만, 그 도전자들이 지금 자유주의의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했을 때 과연 더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가 역사의 최종승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님(역사에 최종 승자가 어디에 있나?). 다만 현재까지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열거되는 여러 입장들 중,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여러 국가들이 겪고 있는 강렬한 문화전쟁, 그리고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등장하는 새로운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만큼 효율적인 대안이 아직까지 등장한 것 같지는 않음. 특히나 과거에서, 혹은 더 먼 과거에서 대안을 끌어오려는 좌우파의 급진주의는 그러한 변화에 더욱 부적합해 보임.
 
v) 이러한 가속화된 변화가 일시적인 상황인지, 아니면 항구적인 조건인지는 모름. 하지만 많은 것들은 단지 어떤 이념을 지향하느냐를 넘어 제도와 논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의 차원에서 변화를 겪을 거라고 생각(좋은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인간 자체가 강하면 뭔 운동종목을 고르든 웬만큼은 하지 않겠음?).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적 차원에서의 자유주의와 고도화된, 효율적인 행정국가를 함께 지지하는 입장이--사실 많은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입장일 거라 생각하는데--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것인지에 흥미가 있음. 코로나 기간 동안 서구 일부 지식인들이 유행시킨 전제적인 통제국가 대 개인의 자유/인권이라는 구도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아무 쓸모도 없는 후진 도식임.
 
vi) 페미니즘/젠더전쟁/PC정치의 확장이 문화적 혼란을 가져왔다는 식의 (주로 안티페미니스트들이 크게 외치는) 주장도, 물론 그것들이 오늘날의 혼란을 유발한 데 일조하는 면이 없진 않겠지만, 너무 단순하고 대체로 해롭다고 생각. 예컨대 PC운동이 초래한 황당한 사건이나 실패들이 물론 있겠지만, 좌파든 우파든 "PC충"을 외치는 사람들 중 애초에 그게 생기고 설득력을 얻은 이유를 따져보는 경우는 없음. 그게 수십 년 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까지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적/언어적 체계에서 상정한 다양성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인접한 사회구성원으로 살게 됐기 때문임.
 
간단히 말해 PC운동은, 적어도 그 기본적인 기능은, 높아지는 다양성에 대응하여 사회의 문화/언어적 규범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패치라고 할 수 있음. 패치 적용과정에서 기존의 관습/규범과 충돌하는 일은 당연히 생길 거고, 하다보면 업그레이드 초기 버전과 신버전이 상충해서 진통을 겪는 일도 역시 생길 것이며, 개별 행위자들 중에서는 그 패치를 무기삼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타인을 과도하게 공격하는 인간들도 나올 거임(이게 그 어떤 이념적 지향도 완벽하게 선만을 수행한다고 믿으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 근데 그렇다고 시스템에 트러블이 생기는데 패치를 안 할 수는 없음(당신이 사는 동네에 "한국인과 짐승은 출입금지"라고 써붙인 식당이 있으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 거임?). 늘 그렇듯이 '어떻게' 고칠지, 부작용을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진짜 중요한 과제일 뿐임.
 
vii)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문제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음.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시시비비를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의 문제도 존재하고, 더불어 특정한 도덕적 판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되었을 때 과연 그것이 의도한 바 대로의 효과를 낼 것이냐는 문제도 존재함. 뒤의 두 문제는 처음보다 덜 중요하지 않으나, 지금까지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만 초점을 맞춰온 면이 있음. 어차피 앞으로 한동안 지지고 볶는 일은 계속될테니, 뒤의 두 문제도 고민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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