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한편> 기고. <나보코프 문학강의>

Reading 2020. 1. 24. 13:51
1.

며칠 전 발간된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 창간호에 청년 세대의 안티페미니즘을 주제로 짧은 '비판적 시론'critical essay을 기고했다. '비판적 시론'이란 말을 강조한 이유는, 실제로 내게 주어진 목표가 무언가 새로운 현상분석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기존의 해석방식을 비판하고 다른 접근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아주 엄밀하지는 않은 글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창간호 기획에서 볼 때 나는 다른 필자의 대타로 뒤늦게 합류했다. 내 글이 다른 글들과 조금 성격이나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런 연유가 있었음을 감안해주시면 좋겠다(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본 잡지에는 편집인 서문을 제외하고 총 열 편이 수록되었는데, 모두 길지 않고--가장 쪽수가 많은 내 글의 본문 길이이 실제로는 A4 4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전문가가 아닌 독자들이 읽어도 요지를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글이다(반대로 말하면 좀 더 전문적인 독자들은 다소의 아쉬움을 가질 수도 있다). '일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인문학술잡지'라는 컨셉이 이미 제법 성공적인 판매고를 맞닥트리고 있기는 하지만, 다음 기획이 더 지적인 글들로 더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글 목차는 다음과 같다:

박동수 페미니즘 세대 선언
김선기 청년팔이의 시대
이민경 1020 탈코르셋 세대
이우창 “20대 남자” 문제
김영미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하남석 오늘의 중국 청년들
조영태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
고유경 세대, 기억의 공동체
이나라 「벌새」와 성장의 딜레마
정혜선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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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 글의 서지사항은: 이우창, 「"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 『인문잡지 한편 1: 세대』, 민음사, 69-92.

일부 대목을 인용하자면:
"2007년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의 출간 이래 한국의 담론장에서 20대는 언제나 문제적이었다. 무엇이, 왜 문제였는가? 짧게 말해 20대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한국의 진보·민주화세력이 정해놓은 역사적인 역할을 잘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20대는 신자유주의시대에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지 않을까(우석훈, 김홍중); 왜 20대는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는 “개새끼”가 되어버렸나(김용민); 왜 20대는 헬조선에 살면서도 사악한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러 투쟁하지 않는가(박노자)? 그러한 우려는 2008년의 광우병촛불집회나 2016년 말의 탄핵촛불집회, 2017년 대통령선거투표에서처럼 20대가 신의 섭리에 따라 진보·민주화세력 혹은 586세대의 정치적 목표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잠시 사그라들고는 했다. 그러나 2018년 후반부 이래 20대 남성의 정권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하면서 20대 문제는 이제 ‘20대 남자 문제’로 다시금 돌아왔다. 586세대의 일차적인 반응은 왜 20대 남자들이 삐뚤어졌는지를 자신들의 상식 속에서 설명(을 빙자하여 비난)해보려는 것이었다. ‘축구나 게임을 하다가 그 시간에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밀려나니까 역차별당한다고 생각한다’(유시민)는 해석이나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민주주의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렇다’(설훈)는 단언이 대표적이다"(71-72)

"실제로 여러 SNS·온라인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조금이라도 관찰해보면,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평가하고 정의하는 방식이, 비단 페미니즘 옹호자와 비판자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집단 내에서조차도 무척이나 다양함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 만약 ‘20대 남자’ 문제를 정말로 이해하고 또 여기에 (정책적인 측면을 포함해서) 실천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왜, 어떻게 거기에 반대하는가를 이들 자신의 언어와 맥락을 통해 살펴보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세대론이나 (반)페미니즘과 같은 담론적 대상을 분석하고자 할 때,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해석학적 입장 및 케임브리지 지성사학파의 언어맥락주의를 따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역사적인 맥락 속에 놓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언어맥락주의 방법론에 따르면, 구체적인 발화나 담론 등의 언어로 표현된 대상의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언어가 어떠한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 내에 놓여 있는지, 특히 그것이 어떠한 '언어적인 맥락' 속에서 어떤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청년세대의 반페미니즘을 분석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먼저 청년세대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반페미니즘의 어휘들이 정확히 어떠한 뜻과 의도를 담고 사용되고 있는지를, 나아가 그러한 언어의 용법이 어떤 상황 속에서 형성되고 변해 왔는지를 면밀하게 살펴야만 한다. 사람들이 반페미니즘의 언어를 어떤 의미로 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반페미니즘을 분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반페미니즘에 그저 비난과 경멸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언어를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이들의 착각과 달리, 반페미니즘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최소 수십 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75-77).


3.

한동안 커다란 변화들로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쉬기 위해 다음 책을 짬짬이 읽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보코프 문학강의>, 김승욱 역, 문학동네, 2019[나보코프는 1940-50년대 미국의 웰즐리대학 및 코넬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으며, 본 강의록 자체는 1980년에 출간되었다]. 재밌게 읽고 짧은 감상을 남긴다.

책 본문에는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사실 Bleak House는 작중에 등장하는 저택(들)의 이름, 즉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옮기자면 그냥 <블리크 하우스>로 쓰는 게 맞다; '황폐한 집'이란 역어는, 한국의 19세기 영문학연구자들도 이런 식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소설 후반부에 명확히 제시되는 내용과 상충한다;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가--물론 <폭풍의 언덕>은 이미 나름의 기억을 획득한 이름이기도 하지만--유사한 케이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네 집 쪽으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한 총 일곱 편의 꼼꼼한 강의가 실려 있다. 본문 앞에는 편집자 및 존 업다이크의 서문 외에 "좋은 독자와 좋은 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나보코프의 문학관이 매우 선명히 드러나는 강연이 도입부로, 뒤에는 그의 예술관이 잘 나타나는 "문학이라는 예술과 상식"와 "마지막 한마디"가 마무리 강연으로 붙어있다. 부록으로 디킨스와 플로베르를 가르칠 때 사용했던 시험문항이 들어가 있다.

비교적 내게 친숙한 영역, 즉 오스틴과 디킨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이 책은 대학원과정 이상의 연구자들이 연구를 위해 직접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분명 매우 해박하고 통찰력 있는 독서가인 나보코프는 영국 18-19세기 문학장에 대해서는 상당히 제한된 지식만을 보유했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 영문학 연구가 축적한 스칼라십을 고려할 때 나보코프의 독서는 '인상적인 아마추어'의 것에 가깝다(반면 상대적으로 동시대라고 할 수 있는 조이스 독해에서 나보코프는 훨씬 풍부한 자료를 이용한다). 아마도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이주망명한 러시아 교양엘리트에게 예상할 수 없는 바는 아니겠지만, 나보코프는 사회구조적 변화에 텍스트해석을 종속시키는 마르크스주의적 독법이나, 리비도를 중심으로 초역사적인 정신구조를 상정하여 여기에 텍스트를 끼워넣는 정신분석적 비평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대신 예술가의 창조성을 강조하며 이를 토대로 예술영역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19세기 이래의 미적 전통을 계승한다.

물론 나보코프의 독서를 읽는 오늘날의 우리가 짚어야 할 점은 그러한 입장 자체가 아닌 그가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있다. 모든 강의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듯 나보코프는 사회적 맥락이나 작가의 성적 욕망의 영향력을 최소화한 후 텍스트에 집중한다. 그러나 텍스트에 집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보코프의 경우에는 이것이 두 가지 축으로 규정된다--구조와 문체가 그것이다. 나보코프에게 구조에 집중한다는 것은, 문학텍스트의 구조라는 말은 보기보다 제대로 규정하기 매우 까다로운 개념인데, 일차적으로 텍스트에 어떤 서사/이야기(들), 인물들이 제시되며 그것들이 서로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주요한 테마들의 차이와 반복을 한층 더 정리해서 풀어내는 일을 뜻한다(비평의 언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러한 서사/인물의 구조를 포착하기 위한 언어로 나보코프가 "대위법"과 "교향곡" 등의 음악적 비유를 차용한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포착할 것이다).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문체의 경우 특히 문장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미적인 장치들의 차원을 다룬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보다 더 알려져있는 소설가로서의 나보코프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나보코프의 독서가 단순히 독자이기만 한 이의 독서가 아니라 직접 문학을 쓰는 사람, 어떤 내용을 어떤 구조에 따라 어떤 문장으로 그려낼지를 고민하는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편집자 또한 지적했듯) 1950년대 미국 영문학의 신비평적 흐름에 매우 쉽사리 조응할 수 있었던 '문학주의자' 나보코프의 문학강의는, 20세기 중반 당대에 유행했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적 문학독법이 과거의 설득력을 상실한 지금 역설적인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태반이 '도저히 읽어줄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적 비평들과 달리, 소설의 줄거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소설가가 배치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언어에 집중하는 나보코프의 시선은, 비록 그것이 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전문적인 수준의 역사적인 이해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 강의가 본래 대상으로 삼았던 학부생 혹은 덜 전문적인 독자들과 같은 청중에게는 여전히 힘과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물론 전문가들도 얼마든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을 단순히 숭배하는 비굴한 노예가 아니라 속속들이 맛보고 이해하는 진정한 감식안의 보유자로, 자신이 즐기는 것을 독자들도 즐길 수 있도록, 정확히 말해 좀 더 섬세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탁월한 유혹자다. 그러한 능동적인 독서가의 독서를 따라읽는 경험은, 자신과 정치적/도덕적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의 글을 읽지도 않고 조롱하는 태도가 '베스트댓글'로 공공연히 추인되는 시대, 읽을 거리는 많지만 읽기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자랑스럽게 내세워도 되는 시대, 인간의 정신이 이미-자신이-알고-있다고-생각하는-것들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시대의 질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독자들이 그동안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신선한 정신력을 보충할 수 있는 휴식지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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