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 죄와 벌.

Critique 2017. 12. 25. 04:05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이하 <죄와 벌>)을 극장에서 보았다. 영화에 대한 반응으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한국형 좀비영화로 대흥행에 성공한 <부산행>에서 마지막 신파적인 '아버지의 자식 회상' 장면--이른바 "분유PPL"이라 불리는--에 깊게 공감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혹은 <클레멘타인>"아빠! 일어나!"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객들에겐 <죄와 벌>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관객, 예컨대 나와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시청자에게 이 영화의 관람경험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그러니까 상영 중에는 탄식을, 상영 후에는 저주를 외칠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부산행> 전체로 볼 때 "분유PPL"이 잠깐 나오는 건 견딜만 하지 않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앞서 빠트린 사실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죄와 벌>은 그 분유광고를 상품을 누룽지 전기밥솥으로 바꾸어 2시간 20분 정도 본다고 생각하면 적절하겠다.

 

[이하 영화 및 웹툰 줄거리를 언급할 수 있다. 이하 판단은 개인적인 것이며 다른 이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텍스트 해석이 아닌 영화 자체의 호오를 둘러싼 논쟁은 정중히 사양한다.]

 

영화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선 주호민의 원작 웹툰 <신과 함께> 저승편의 서사 구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원작은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재연재 중이다;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97685 참조). 원작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매우 평범한 소시민 김자홍이 탁월한 변호사 진기한의 조력을 받아 저승의 재판들을 통과하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저승차사들이 부대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병사의 원귀를 추적하고 원한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소하는 이야기다. 사실 둘 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흥미롭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작품의 실질적인 매력은 원저자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저승 및 지옥의 다양한 풍광에 대한 재해석 및 핀트를 하나씩 뒤틀어놓은 인물들의 개성에 있다. 물론 이것뿐이었다면 작품이 설정놀음 및 '캐릭터 만화'로 전락하는 걸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전자에 일부 포함된, 그리고 후자를 이끌고 나가는 다소 신파적인 줄거리가 전체 작품에 동적인 계기를 부여한다.

 

바꿔 말하면, 원작 웹툰 <신과 함께>는 사실 2시간 정도의 시간적 길이만을 확보할 수 있는 영화화에 그 자체로 잘 녹아들만한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사실상 작품 전체가 영화 한 편 정도에 그럭저럭 끼워맞출 수 있도록 설계된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과 비교해보라). 따라서 우리는 영화가 원작을 기준으로 상당한 생략 및 재해석을 시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재창조 작업에서 제작자들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있다. 영화의 전략은 한편으로는 원작의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압축해서 우겨넣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선택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균열--가령 원작에서는 생면부지의 인물들이 갑자기 가족관계로 묶인다든가 하는--을 봉합하기 위해 한국 관객들의 정서에 즉효를 발휘함이 이미 수차례 검증된 무기, 즉 가족주의적 신파 코드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략은 가족주의적 신파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하며 이것이 좋은 흥행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영화 전체의 만듦새를 본다면, 이 전략은 치명적으로 망했다.

 

먼저 영화 <죄와 벌>은 두 시간 동안 일곱 지옥을 다 다루기 위해, 그리고 원작의 두 번째 이야기를 포함하기 위해 두 가지 조정을 했다. 첫째로 앞서 말했듯 원작에서 별개로 진행되었던 두 이야기를 묶기 위해 인물구도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녀에게 매우 헌신적인 홀어머니와 역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제일 중요한 두 형제의 신파적 가족극으로--즉 형이 저승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동생은 이승에서 원귀가 된다--재구성했다. 다른 하나는 저승에서의 재판을 매우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김자홍(차태현 분)을 아이를 살리고 죽은 소방관, 즉 정의롭고 이타적인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귀인'은 재판에서 특혜를 받아 매우 빨리 지나갈 수 있는 걸로 설명된다). 한 줄로 설명하면 영화의 줄거리 전체는 가진 것 없고 고생만 죽어라 하지만 늘 선행을 베풀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끔찍한 가족애로 뭉친 한국 신파 전통에서 매우 익숙한 인물들의 이야기로 점거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자체로도 나와 같은 취향의 관람자에겐 무척이나 진부한 설정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설정을 채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들을 봉합하려는 시도들이 더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선행과 노력으로 따지면 사회 최최최상류층에 속하는 김자홍이 저승에서 재판을 받을 때의 장점은--물론 원작의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은 여기에서 실망하겠지만--지옥 묘사에 할애되는 시간을 매우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렇게 쉽게 재판을 받고 지나가버리면 서사가 무척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영화의 선택은 인물설정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즉 김자홍과 저승차사들 모두 거의 민폐에 가까운 불필요한 실수를 지나치게 많이 저지르며, 이는 종종 인물을 플롯을 끼워맞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까지 설득력과 일관성을 무너트리는 결과로 이어진다(김자홍과 강림도령이 특히 심하다). 덕춘의 경우 원작에서는 외관상 불확실한 성별에 기초한 유사-로맨스 코드를 가지고 놀듯이 애초에 매우 뻔한 설정으로 갈 수 있는 인물들을 조금씩 뒤트는 데 원작의 강점이 있었다면, <죄와 벌>은 그러한 요소들이 소거되면서 인물 또한 평면화되고, 결과적으로 덕춘을 비롯한 영화의 여성인물들은 눈물을 빼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대체로 서사의 구성물은 상호유기적이기 때문에, 인물의 설득력 상실은 필연적으로 플롯의 도식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역시나 한국 신파에서 즐겨 사용되는 '오해의 반복' 플롯을 채택했다. 즉 원래 선한 인물이 - 어떤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는데 - 이는 알고 보면 무척이나 기구한 운명에서 비롯되었으며 알고 보면 다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며(울먹)...라는 패턴 말이다. <죄와 벌>은 전체 서사만이 아니라 각 재판에 할애된 미시적 서사에서조차도 이 패턴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파적 클리셰를 충분히 많이 접한 관객이라면 곧바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나는 중반쯤 보면서 '설마 결말이 이렇게 나진 않겠지'라고 떠올린 그대로 결말이 진행되어 무척 당황스러웠다).

 

인물과 플롯 모두 망가진 시점에서 영화는 적어도 <국제시장> 이래 가장 확실한 흥행보증수표에 기대기로 한다. 가족적 신파와 스펙타클을 마치 요리에 설탕과 MSG를 아낌없이 넣듯이 퍼붓는 선택이 그것이다(또다른 의지처인 액션의 경우, 영화의 액션신은 원작만큼이나 흥미롭지 않다). 사실상 영화는 둘의 반복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비평적 거리를 두지 않고 감정을 이입해서 같이 눈물 흘리는 경험에--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효용을 준다--거부감이 없는 관객에게 <죄와 벌>의 가족적 신파 폭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관객이 아니었고, 김자홍 일가가 겪는 일생의 비극보다 2시간 20분 동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스스로의 비극에 주어진 무게를 좀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천륜지옥의 재판장면은 "부모의 자식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한국대중영화의 절대명제를 노골적으로 천명한다. <마더><곡성>만으로는 한국영화계가 이 지상최강의 가족로맨스에 덜 의존하도록 만들기에 역부족이었던 듯싶다.

 

영화는 동시에 제작된 후속작을 예고하면서 끝나는데, 원작 <신과 함께> 이승편이 신파적 서사에 더 강력하게 의존했음을 기억한다면, 영화화된 후속작이 얼마나 신파에 의존할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아서 호기심이 든다. 물론 <죄와 벌>의 진정한 효능은 다른 데 있다. 관객들은 누룽지 전기밥솥의 매력적인 외관을 잊지 못할 뿐더러, 더불어 소방공무원들을 우리 시대의 성인들로 좀 더 기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2017년 한국대중상업영화의 '사회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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