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II"에 대한 비판적 논평

Critique 2017. 11. 5. 01:03

일전의 논쟁적인 글 이후 최성호 선생의 후속 칼럼이 올라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089).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우리 문빠는 안 바뀔 거야. 그리고 우리 문빠는 다 옳아" 정도로 옮겨질 수 있는--나는 이런 논리가 정권과 지지자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중간층과 우파들의 조롱과 경계심만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사고라고 생각한다--이 글에 합리적인 독자들이 굳이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없다(교수신문이 필터링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좋은 업적을 낸 연구자가 어떤 주제에서는 엄밀한 사고의 스위치를 꺼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순 있겠다). 그럼에도 내가 천금 같은 휴식 중에 책 읽을 시간을 줄여가면서 포스팅을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내 블로그 및 페이스북 계정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최성호 선생이 내게 자신의 글에 관한 지적인 대화를 요청한 이후(http://begray.tistory.com/435 참조) 우리는 메일을 통해 몇 차례 의견을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그중에서는 이번 칼럼과 골자를 공유하는 논의들이 있었고 나는 약 A4 3쪽 정도 분량으로 해당 내용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지적했다. 현 칼럼을 볼 때 내 비판의 요점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간단하게 짚고자 한다.

이 글의 처음부터 중후반부까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참여적인 인간은 열정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지대상을 객관적·합리적으로 보는 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뒤에 글의 하이라이트인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굳이 해당 기사의 트래픽을 늘릴 필요가 없도록 마지막 두 문단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정치인에 대하여 무심하고 불편부당한 제삼자적 방관자의 관점을 취하기 힘들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이 대개 훌리건인 이유이다.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80년 광주에서 87년 항쟁으로, 그리고 지난해의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민주주의나 정의와 같은 가치들에 대하여 무심하고 냉정한 삼인칭적 관찰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아낙사고라스가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그런 관점을 취하는 것만큼이나 비상식적이다. 나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지지의 근저에는 문재인 정부가 장래에 우리 사회를 더 민주적이게, 더 공정하게, 더 정의롭게 만들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포퍼식의 비판적 지지가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삼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 관점을 요구하는 한,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비판적 지지란 헛된 신화에 불과하다. 그들이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를 돌보고 보살피며 그에게 비판적 지지가 아닌 전략적 지지를 보내는 문빠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성숙한 민주 시민(democratic citizen)을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에서 흔들림 없는 열의, 관심, 애착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들 돌보고 보살피는 정치참여형 시민이라 정의한다. 내가 지난 글에서 문빠들이 ‘한층 성숙한 민주적 시민상’을 실현한다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 정의에 따른 바이다. 그들은 훌리건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이고, 그런 한에서 성숙한 민주 시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인용대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민주주의·정의와 같은 가치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성숙한 민주시민"; 물론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필자의 규정은 문제적이다)이 어떠한 논리적 정당화 없이 문재인 정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문빠"와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많은 "문빠"들이 민주주의·정의와 같은 가치들에 깊고 진정성 어린 애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에서 곧 "성숙한 민주시민"이 곧 "문빠"라거나 모든 "문빠"가 "성숙한 민주시민"이라는 결론이(그렇다면 진보정당 지지자들이나 온건한 합리적 중도보수 지지자들은 민주시민이 아닌가?), 좀 더 구체적으로,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가 곧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참여행위라는 식의 논리가 도출될 수는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정의와 같은 가치에 정치인·정권·정치적 결정이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뿐, 어떤 인격·세력 및 그에 대한 지지여부가 곧 해당 가치를 완전히 실현한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런 점에서 만약 "비판적 지지"가 그러한 가치를 평가기준으로 두고 정권이 그러한 기준으로부터 멀어질 때 비판하거나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라면, 내 생각에는 그쪽이 그냥 정권을 맹목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박정희 지지자들이나 했을 법한--태도보다는 훨씬 넓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빠"들의 목적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정권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애정에 입각한 행위가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슬프게도.

나는 (과학)철학 연구자들이 어떤 식의 철학적·논리적 규범을 신봉하는지 모르며 그들의 고유한 논리체계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다만 철학적 훈련을 받은 지인 한 명은 이 글을 읽고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선긋기^^와 함께 '과학철학에 대한 철학전공자들의 오랜 편견만을 강화시킬 글'이란 촌평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전개는 명백히 오류이며 철학적 논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속한 분과에서 보다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사학적 비약의 한 사례에 가깝다. 즉 유감스럽게도 최성호 선생의 글은 본인의 열광적 문재인 지지자로서의 신념이 완전무결한 것임을 외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다소 열악한 프로파간다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문재인 지지자들의 열정적인 태도가 사실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목적 하에 따라 합리적인 계산을 거쳐 의도적으로 취해진 제스쳐라는 주장을 했다면, 필자는 현실을 왜곡한다는 식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는 있을지언정 논리적 파산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전에 나는 최성호 선생이 "문빠"들을 토마스 쿤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정치적 목적에 맞추어 학문을 구부리는 행위라는 평을 한 적이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 평은 다음과 같이 정정될 수 있다: 필자는 정치적 열정에 따라 자신의 지성을 구부러트리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가 열정에 휩싸여 스스로의 지성을 영구적으로 훼손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 S. 내가 최성호 선생의 접근법이 정치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결함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재인 정권은 단순한 개인이나 인기인이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정치세력이자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현대사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항이 곧 국가권력임을 보여주었고 이는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권력 및 제도적 행위자들이 잘/못 기능할 때 그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즉각적인, 때로는 영구적인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그 작동에 엄격한 책임감과 냉정한 검토가 요구됨은 명백하다. 최성호 선생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권력에 대한 규범적 논의를 개개인들의 심리와 성향로 환원시키는 접근법은 정치를 역사적으로 살펴온 이들에게 냉소적인 기각 이상의 것을 받기 어렵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설득력 있는지는 넘어간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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