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TERF, 안티페미니즘: 비판적 개입 셋

Critique 2017. 12. 14. 00:09

나는 두 편의 글 모두 TERF, 나아가 TERF를 묵인하는 일부 여성주의 연구자·활동가를 향해 썼다. 좀 더 간단한 단상에 가까웠던 첫 번째 글은 내 기대보다 많이 읽혔고 그만큼 직간접적으로 여러 형태의 반론을 맞이했다. 따라서 나는 내 입장 및 내 입장이 어떤 논리에 근거하는지를 좀 더 명확히 밝힐 필요를 느꼈고, 두 번째 글은 좀 더 논증적인 형태에 가까워졌다. 이후에 내 글을 보시는 독자들은, 내 입장에 대해 논평을 하신다면, 번거롭더라도 두 편의 글을 함께 읽어주시길 바란다. [이후 논쟁과정에서 세 번째 글이 추가되었고 이 게시물에 첨가한다-2018년 1월 2일]


1. *2017년 11월 23일 페이스북에 작성


활동가·연구자들을 포함한 여성주의자들 중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젠더 배제 래디컬 페미니스트) 같은 '자칭' 래디펨이나 워마드가 잠시 혈기왕성한 언행을 보여주긴 하지만 남성중심적 질서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연대의 대상이며,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비판하거나 질책하는 대신 적당히 묵인하면서 같이 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있다. 감기로 골골거리면서 '자칭' 래디펨들이나 워마드 이용자들이 일으키는 사건사고를 보다보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먼저 얼마 전에 있었던 사례 하나를 참고하자. 2010년대 초중반 보수주의자들은 일베를 처음 맞닥트렸을 때 새로운 청년보수들이 온라인에 자생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했으며, (비록 문제적인 언행을 종종 보여주긴 하지만) 이들이 장기적으로 보수의 헤게모니를 위해 동원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달콤한 밀월기간도 잠시, 기존 우파들과 일베 이용자들은 예컨대 박근혜가 여성혐오적 언어표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포함한 매우 중요한 이슈들에서 각자 서로가 상상하던 바와 매우 다른 사람들인 걸 곧 깨달았다. 젊은 일베 이용자들은 '선배님들'에게 "틀딱(충)"이란 별명을 선사했고, 이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면서 혐오의 언어를 진탕 퍼마시고 널부러졌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보수의 일베 끌어안기는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기존 보수의 일베 동원 시도는 성공적이긴커녕 젊은 일베 이용자들이 선배들에 대한 다소의 환상마저 깨부수고 오히려 "틀딱"과 같은 노인 혐오를 갖도록 만들었다. 둘째, 이러한 흐름은 박근혜 정권기와 맞물리면서 사실상 합리적·상식적 보수 세력의 절멸을 가져왔다. 박근혜 탄핵 이후 보수에게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해보라. 그 공허한 폐허는 부분적으로 일베에 이끌려들어간 보수의 오판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TERF나 워마드 끌어안기 혹은 묵인도 마찬가지다. 후자의 그룹 내에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에 의지하는 개념이든 간에) '생물학적 여성'에 근본주의적 가치를 부여할 뿐만아니라, "똥꼬충"·"트랜스젠더는 정신병"·"젠신병자" 같은 혐오 표현을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피해자라는 논리 하에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으며, 나아가 그 정당화의 논리로 인권을 포함한 모든 도덕·윤리적 가치를 폐기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젠더퀴어를 비롯해 다른 약자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입장에 "쓰까페미"·"쓰까충"이라는 경멸의 호칭을 붙여주었으며, 자신들보다 윗세대 여성주의 활동가들을 "꿘줌"이라고 부르면서 조소한다. "자기들이 인정하는 페미니즘만 페미니즘"이라는 지금까지의 문구는 조만간 "자기들이 인정하는 여성만이 여성"이라는 말로 바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들이 결국에는 같은 편이라고 믿는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일베가 보수의 새 희망이라고 믿었던 나이든 보수들만큼이나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조금 독특한 친구들'을 규합할 수 있다고 믿고 사소한 잘못--물론 퀴어·다른 젠더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가 '사소한' 잘못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을 묵인해도 된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TERF와 워마드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성향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대상이라면 페미니스트고 뭐고 가리지 않고 그 얼굴에 웃으며 침을 뱉고도 남으리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사실 이미 계속 침을 뱉어 왔다는 건 일부 여성주의자들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들은 당신들의 판타지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볼 때,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TERF와 워마드에 대한 현재의 어정쩡한 태도를 고수하는 건 일베 끌어안기가 보수 세력 자체가 혐오·반윤리 집단으로 폄하되는 결과를 초래한 바와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즉 그 끝에는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혐오의 기표로--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혐오행위가 정당화되며, 동시에 페미니즘이란 말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전락하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워마드 이용자의 호주 아동 성착취 사건 뉴스가 퍼지면서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자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이 혐오의 동조자가 아님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혐오동조자로 간주될 것이며, 이는 심할 경우 지난 2-3년 간 급속도로 확장되었던 페미니즘의 빠른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지금과 같은 묵인·암묵적인 동조가 이어질 경우 이는 페미니즘 진영 자체를 돌이킬 수 없이 분열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복수의 페미니즘들이 수많은 이슈에 대해 입장을 달리해왔음은 분명하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다른 그룹을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으며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하는 기괴한 페미니즘이 대두한 적은 없었다. 요컨대 TERF와 워마드를 얻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잃어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어온 덕에 여성주의자들은 서로 간의 차이를 적당히 존중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관행이 지금 새로운 혐오언어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우리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리가 좀 더 사태를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주어진 선택지의 본질은 어떤 페미니즘을 고를 것이냐가 아니라 페미니즘이냐 혐오냐의 양자택일이다.




2. *2017년 11월 26일 페이스북에 작성


[길고 논쟁적이다]

나는 직전에 일부 페미니스트 활동가·연구자들이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Feminist, 트랜스젠더 배제 래디컬 페미니즘/페미니스트) 및 워마드의 언행에 대해 묵인 또는 방조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https://www.facebook.com/leewcman/posts/927786214043460). 그중 일부는 나의 주장에 대한 비판 혹은 반론으로, (그저 생물학적 남성이 말하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다는 TERF계열 지지자들의 무가치한 반응을 제외하면) 가장 흔한 요지는 내가 페미니즘적 실천에 내포된 복잡성을 “페미니즘 대 혐오”로 단순화하여 후자를 지워버리고 전자만 남길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론자들의 선의와 미덕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내 생각에 그들의 반응은 내 이전 글이 어떤 논증을 통해 TERF 비판으로 들어가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한 반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번 글에서 나는 여러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일일이 시도하는 대신 ‘한국형’ TERF가 어떤 점에서 문제적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페미니즘들의 한 분파라기보다는 사이비(pseudo-)페미니즘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TERF를 ‘우리 페미니스트 동지들’로 간주하여 그들의 명백히 문제적인 언행을 묵인·용납하는 태도가 어떤 점에서 잘못된 선택지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나는 가능한 간략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기 때문에, 때때로 이론적인 쟁점들을 건드리는 부분이 그러한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다소 낯설 수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나는 “생물학적·물질적 여성성”이 젠더 정체성에 고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그것이 MtF(남성->여성)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보유한 젠더 정체성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이론적인 입장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비판대상은 그러한 이론적 함의를 악용하여 오직 “여성으로 태어나 그 신체를 유지하는” 이들만이 여성성·페미니즘에 대한 특권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모든 입장은 언제든 혐오의 대상이 되어도 무관하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이를 실천하는 일부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며, 나는 이들을 “(한국형) TERF”라고 부를 것이다.

나의 한국형 TERF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진술로 구성된다.

① TERF는 페미니즘의 일부라기보다는 그 수사를 악용하여 페미니즘 담론을 질식시키는 사이비 페미니즘이다.
② TERF는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들·페미니스트들 내부에 넘을 수 없는 분열의 선을 그어놓으며, 현대 페미니스트 운동 전략의 핵심코드인 “연대”를 부정하면서 페미니즘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킨다.
③ TERF는 페미니즘을 안티페미니즘이 원하는 페미니즘, 즉 모든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여성우월주의·분파이기주의로 전락시키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담론장에서 페미니즘을 고립시키고 안티페미니즘의 먹잇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

각 진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TERF는 페미니즘의 일부라기보다는 그 수사를 악용하여 페미니즘 담론을 질식시키는 사이비 페미니즘이다. TERF 신봉자들과 한번이라도 직접 충돌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이들은 (생물학적) 여성들이 “여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였으며 따라서 페미니즘·여성성 등 제반사항에 대한 발언권을 도덕적으로 독점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권력관계에 따라 여성에게 추가적인 발언권을 주는 게 보다 평등하다는 식의 논의는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지만, TERF는 이를 극단적으로 왜곡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정체성이 발화내용 혹은 메시지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유일한 자격요건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남성페미니스트·퀴어·다른 성소수자들과 충돌할 때 TERF들은 전자의 발화는 그 논리적 타당성과 무관하게 자격 없는 자들의 발화이므로 무가치하며, 역으로 자신들 혹은 동조자의 발화는 자격 있는 자들의 발화이므로 가치가 있다고 강변한다. 결과적으로 TERF들과의 논쟁에서 어떤 진술·주장이 그 자체로 타당성을 지녔는지, 어떤 TERF의 주장이 타당성을 지녔는지의 문제는 거의 검토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은 어떤 발화의 타당성을 고려할 때 발화내용만이 아니라 맥락 또한 고려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는 페미니즘의 가르침을 꺼내들며 반론하겠지만, TERF식 논증의 진짜 문제는 겉으로는 맥락을 고려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맥락과 발화내용 모두 지워버리고 그걸 발화자의 정체성=자격에 대한 가치평가로 대체한다는 데 있다. 요컨대 이들의 태도는 여성이 무엇을 말하든 발화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고려할 필요 없다는 지난 세기의 여성혐오자들에서 성별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토론장의 논쟁을 자격의 우열로 환원해버리는 TERF들의 태도에 강한 반지성주의가 깃들어 있으며, 이러한 태도가 확산될 때 페미니즘 담론장을 포함한 한국의 담론장이 그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할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TERF의 확산 혹은 이를 묵인하는 태도는 이질적인 입장들 간의 논쟁을 통해 발전해온 페미니즘 담론(장)을 사실상 마비시키며, 그런 점에서 TERF는 페미니즘의 수사를 차용하지만 실제로는 페미니즘을 질식시키는 사이비 페미니즘이다.

② TERF는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들·페미니스트들 내부에 넘을 수 없는 분열의 선을 그어놓으며, 현대 페미니스트 운동 전략의 핵심코드인 “연대”를 부정하면서 페미니즘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킨다. 게이를 “똥꼬충”으로 부르고, 트랜스젠더를 “젠신병자”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TERF는 자신과 입장·정체성을 달리하는 모든 집단에 대해 혐오표현을 투척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나아가 여성 중에서도 자신들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혐오대상으로 간주한다. 다른 페미니스트들, 예컨대 서로 다른 소수자 정체성들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이들은 “쓰까페미”라고 이름으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며, 이전 세대의 운동논리를 염두에 둔 여성들은 “꿘줌”이라는 비하표현으로 호칭된다. 이들은 우리 편 아니면 혐오대상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고수하는데, 이러한 이분법은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 내부에 치유불가능한 분열을 초래하며 동시에 현대 페미니즘 운동 전략의 핵을 이루는 개념인 “연대”를 토대에서부터 파괴시킨다.

가령 11월 25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여성철학회 공동주최 학술대회에 (자신들과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았던) 퀴어 연구자가 발표한다는 이유로 투서를 넣어 한국여성철학회가 행사 자체를 보이콧하게 만든 바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자격 없는 자”가 공적인 발언권을 갖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관련 포스팅 및 공지는 https://www.facebook.com/sjkim1223/posts/10156081919694645 ; https://www.facebook.com/sjkim1223/posts/10156081974524645 ; http://ephilosophy.kr/han/51655/ 등을 보라). 나는 넓은 범위의 페미니즘들·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심각한 입장 차이가 존재할 수 있으며 때로 그러한 입장 차이가 그다지 사려 깊지 못한 언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과, 상대방으로부터 발언권 자체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는 애초에 상대를 대화 가능한 동등한 인간·시민으로 보지 않겠다는 태도의 산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컨대 TERF들이 한국 페미니즘들 중 일부로 수용 혹은 묵인된다면, 이들이 다른 입장을 애초에 동등한 발언권자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수의 페미니즘들·페미니스트들 사이의 공존 및 다른 운동들과의 연대전략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우리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지만, 특정한 소수만이 발언권을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담론장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퀴어적 정체성·다양한 젠더 정체성의 평등함과 공존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TERF는 양립 불가능한 입장이며, 지금처럼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TERF를 옹호하거나 묵인할 때 이는 실질적으로 전자를 후자의 먹잇감으로 내주는 비겁한 중립일 뿐이다. 더불어 TERF가 연대 개념을 뿌리 뽑아 내던져 버린다고 할 때,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당장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고수해온 전략의 핵까지 포기한다는 건 사실상 운동의 자멸로 들어서는 것이다.

③ TERF는 페미니즘을 안티페미니즘이 원하는 페미니즘, 즉 모든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여성우월주의·분파이기주의로 전락시키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담론장에서 페미니즘을 고립시키고 안티페미니즘의 먹잇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정체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보편인권·모두의 평등·소수자 간 연대와 같은 보편적 가치의 슬로건을 받아들인 것은 그 특수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보편적 가치의 수용·추구가 사라질 때 페미니즘 또한 언제든 일부 이익집단의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안티페미니즘 담론생산자들은 정확히 이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난 “나무위키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과 성평등 추구가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즘이 보편주의적 운동이 아닌 비합리적이고 탐욕적인 여성우월주의·분파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왔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서 보편인권을 포함한 모든 보편적 가치가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TERF가 정확히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페미니즘임은 명확하다. TERF들은 보편적 가치와 합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고 조소하지만, 실제로는 TERF야말로 “안티페미니스트들이 허락하고 원하는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그 TERF가 한국 페미니즘의 일부로 자리를 굳건히 하는 순간, 안티페미니즘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페미니즘 전체를 고립시키고 “페미니즘=이기주의=정신병”이라는 그들의 도식을 전파할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사회에 성차별·불평등이 남아있는 한 페미니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서 말했듯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성평등의 가치와 페미니즘을 분리시키려고 줄기차게 노력하고 있으며, TERF가 페미니즘 전체를 그러한 구도로 몰고가는 상황에서 (더불어 무엇보다 한국의 안티페미니즘의 잠재성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이런 낙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그것이 외부의 담론·가치를 수용하고 또 그와 투쟁해오며 성장해왔음을 보여준다. 페미니즘 외부의 담론지형을 고려하지 않는 페미니즘은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는 것이며, 안티페미니즘의 위협을 고려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은 전략적일 수 없다. TERF의 확산에 대한 묵인·동조는 따라서 페미니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자멸적인 전략적 행동에 속한다.

위의 세 가지 진술에 근거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먼저 TERF는 페미니즘들이 만들고 공유해온 여러 가지 수사적 요소들을 도용하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것들을 악용하여 내적 논리의 차원, 안티페미니즘과의 논쟁이라는 차원 모두에서 페미니즘을 붕괴시키는 사이비페미니즘이다. 포퓰리스트들이 민주주의자·체제비판자에 침투하여 후자를 약탈하듯, 기생물이 생명체에 깃들어 후자를 먹이로 삼듯, TERF가 한국 페미니즘을 잠식하며 그 이름을 찬탈한다. 적지 않은 연구자·활동가들이 한국의 남성중심적 질서에 대한 거부감과 여성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TERF를 페미니즘의 일부로 간주할 때, 이는 결과적으로 페미니즘 내부에서 차례차례 TERF의 반대자들을 추방하고 최종적으로는 속을 파먹혀 빈 껍데기만 남은 페미니즘을 안티페미니즘에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페미니즘의 정당성이 무엇에 기초하는지 분명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 활동가·연구자들이 “올바른”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데 부담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TERF를 거론하며 페미니즘=정신병=생물학적 여성우월주의라는 비난을 퍼붓는 안티페미니스트들과의 논쟁과정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작업을 피할 수 없다. 현재 TERF에의 묵인이 안티페미니스트들과의 논쟁 최전선에서 페미니즘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을 곤경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연구자·활동가들이 규범적인 차원, 즉 페미니즘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구별 요청을 회피하는 건 무책임하다.

물론 이것이 페미니스트들이 반드시 잘못된 판단을 내려 TERF를 지지한 사람들 모두를 매도하고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신봉하는 입장 및 언행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의 감정적 원한을 이해하고 다시 설득하여 TERF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은 분명 어렵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이때 요점은 TERF의 주요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TERF가 실제로는 페미니즘을 더 약화시키고 안티페미니즘의 포로로 만드는 함정이며, 정말로 여성의 인권을 증진시키고 성적인 평등을 가져오고 싶다면 TERF를 폐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양자택일’의 위험함을 경계하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냐, TERF냐의 본질은 결국 페미니즘이냐 안티페미니즘이냐에 있다.



3. *2017년 12월 22일 페이스북에 작성


이 게시물의 댓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존엄성을 인정받는 인간의 대상을 확장해가는 과정으로 보느냐, 지배에 저항하는 권력 싸움으로 보느냐에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향점은 같을지라도, 전자의 태도에서는 실천에 도덕이라는 제약이 따르게 되고, 후자의 태도에서는 성별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우선되는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 TERF의 페미니즘은 권력 싸움이기에 페미니즘의 목적 외부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요컨대 도덕적 정당성의 추구와 권력투쟁은 완전히 별개이며, TERF의 혐오/반사회적 발화는 권력투쟁을 추구하는 실천이기 때문에 어떠한 도덕적 정당화의 제약도 필요없다는 진술이다. 담론투쟁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물론 이런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나이브함을 알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함축되어 있듯, 담론을 통한 권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발화는 적어도 그 청중 중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하며 그를 통해 더 많은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게 합리적이다.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는 담론투쟁은 결코 더 큰 권력을 획득할 수 없으니까.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메갈리아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던 당시에 나왔던 여러 논쟁적인 국면을 검토해본다면, 애초에 "미러링"이라는 논쟁적인 개념이 도입된 과정 자체가 정확히 이러한 예에 부합한다. 메갈리아 사용자들의 발화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그것들이 단순한 혐오발언이며 따라서 비판·축출되어야 한다는 비판을 제기했고, 따라서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이들은 여기에 대항해 해당 발화·표현에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는 "미러링"이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여 메갈리아 사용자들의 그 자체로는 혐오발언에 해당할 수 있는 발화·표현들이 실제로는 메타레벨에서 기존의 잘못된 성차별적·폭력적·남성중심적 언어 및 사고체계를 고발하고, 문제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교정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규정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즉 혐오발언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실제로는 혐오발언이 아니라 기존의 잘못된 사태를 비판하고 문제삼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 어휘가 당시에 무척 활발하게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메갈리아를 옹호하고자 했던 많은 논평자들 및 메갈리아 사용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정당화할 필요성을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강하게 느겼음을 보여준다. 만약 정말로 언어를 통한 권력투쟁이 도덕적 정당화와 무관한 것이었다면, 그리고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그 도덕적 정당성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면 이 행위자들은 애초에 "미러링"이라는 개념 자체를 들여올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맨 처음 인용한 문단이 TERF를 정당화하는 주요 논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면,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발화자들의 결정적인 착오는 심지어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에서조차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담론과 언어를 통한 권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도덕적 언어가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간과하며, 도덕적 정당화 없는--물론 해당 문구의 작성자는 "지배권력에 대항해"라는 표현 자체가 도덕적 정당화의 시도임을 망각하고 있다--순수한 권력획득방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건 잘못된 판단이며, 여기에 기초한 전략수립은 성공할 수 없다. 실제로 워마드와 TERF가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저건 아니다"라는 판단을 끌어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공격적인 말을 여과없이 하는 것"이 그 자체로 권력투쟁의 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틀렸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공격적인 말을 여과없이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언제나 유효한 권력투쟁의 방식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권력을 확인하고 획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하나의 유효한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진술들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그 진술들이 소수의 사람들 내에서 설득력을 갖는 순간들이 있었다(여성주의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광경을 살펴본 적이 있다면 사실 이런 진술이 종종 나오는 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워마드와 TERF를 이런 식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통용되었던 논리가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언제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모두 자신들의 권력증진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그것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례를 그들이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의 다양한 구성물을 왜곡하여 활용하는 방식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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