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와 아카데미

Critique 2018. 3. 26. 02:58

최근 지인과 뉴미디어와 아카데미 관련 짧지만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린다.

 

1. 주지하다시피 영미에서는 대학에서 훈련받은 연구자·전문가가 주요 언론 혹은 고급독자대상 언론 등을 통해 일종의 고급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경로를 쉽게 볼 수 있다. 언론은 특별한 사안에 관련된 임시기고를 받을 뿐 아니라 박사학위를 취득하거나 이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필자에게 준 정기적인그리고 비교적 긴지면을 부여하여 높은 수준의 기고문을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전문성을 보유한 필자들은 자신이 훈련받고 또 습득한 사유를 학술장 바깥의 보다 넓은 범위의 청중과 공유할 기회를 얻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전업 기고자가 되어 대학 바깥에서 직업과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대학·연구소 등에 교수자 혹은 연구자로서 자리를 얻기도 한다. 이는 특정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권위 있는 언론은 물론, 전국적인 신문·방송매체의 경우에도 학적 전문성을 훈련받은 필자를 거의 보유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무척 생경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이 학술장과 언론장이 인적 자원을 공유하며 서로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환경이 최근 미국의 뉴미디어와 대학원 과정의 관계에서도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허핑턴포스트 같은 언론-블로그 결합형 서비스의 흥행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트레이닝 받은 석박사급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 자격으로 각종 언론에 기고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가는 경로가 거의 공식화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대학원생들은 처음에는 허핑턴포스트나 보다 마이너한 뉴스 블로그에서 출발, 점차적으로 좀 더 영향력 있는 뉴미디어에, 나아가서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고급언론에 필자로 글을 싣는 단계를 밟아나가고자 한다. 이중 일부는 자신의 지면을 확보한 고급 저널리스트가 되거나 언론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연구직·정책전문가로 자리 잡는 것도 염두에 둘 수 있다(물론 운과 능력이 따라주면 처음부터 바로 고급 언론에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언론은 다수의 ()전문가 필자를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많은 경우는 무료로활용해 정보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대학원생들은 이력·인지도를 쌓아 고급언론·싱크탱크·대학·연구소 등과 연결될 직업적 기회를 얻는 교환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포착한 미국의 (좋은) 대학원, 특히 전문가의 언론 기고 전통이 자리 잡힌 정치, , 국제정치 등등 분야의 경우 아예 대학원생들에게 뉴스 블로그 기고부터 시작해 언론활동 경력을 만들어두기를 권장하거나 이를 직접 교육시키기도 한다. 특히 최근처럼 대학의 일자리는 적고 인문사회 대학원생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졸업 후 이력까지 관리하는 미국의 대학원은 아예 원생들이 이후 학계와 언론 양자 어느 쪽으로든 진입할 수 있도록 활동경로를 디자인해주는 셈이다. 그중 뛰어난 학생들을 주요 언론에 필자 혹은 에디터로 보내는 데 성공한 교수·학과는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물론 석사급이 성급하게 '전문가'로 활동할 경우 그가 생산하는 지식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거나 최근의 연구가 업데이트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학술장과 언론장의 인적 공유가 이미 자연스러운 영미권에서 뉴미디어와 대학원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자체는 전문성을 갖춘 고급인력이 더 많이 배출됨에 따라 인적자원과 전문성을 보다 생산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합리적인 전개라고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2. 한국의 경우 주요 언론은 학술장 및 그곳에서 배출되는 인력의 활용에 아직까지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학술장 또한 구성원의 언론기고를 대중적 관심에 사로잡힌것 정도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다(물론 지금까지 그러한 인식을 조장한 사례들이 적지 않았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뉴미디어의 경우 정식 기자가 아닌 필자들을 활용하거나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춘 필자들이 개인 블로그·SNS 등을 통해 활동하는 경우는 조금씩 나타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 미국처럼 석사졸업 이상의 대학원생·학위취득자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단계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 기자 공채시스템에 의존하는 한국의 주요 언론은 전문인력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경로 자체를 거의 형성하지 않고 있으며, 뉴미디어 또한 단지 인지도가 높거나 재미있는 글을 쓰는 필자를 발굴하는 걸 넘어 연구자로서 훈련받은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한국의 대중매체·언론이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지식·논평의 수준 자체를 일정 이상 끌어올리지 못함에 따라 영어가 가능한 고급독자들이 한국 언론을 우회하여 곧바로 영문 기사·논평을 읽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 인문사회 대학원·학술장이 대학원생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론장·사회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문성·고등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사람들이 언론의 방향을 결정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가끔 기자들이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하는 경우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언론인이 대학원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 철저한 지적 훈련이라기보다는 '힐링'·'재충전' 정도라는 인식이 크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경우는 애초에 전문가로서 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언론에 들어가는 것에 비할 때 효율이 높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 한국의 언론이 일상의 층위에서 다양한 사건을 빠르게 취재·보도하는 정도에 만족한다면 별다른 고민이 필요 없겠지만, 보다 높은 수준의 기획·논평을 제공하고 여론보다 한 발자국 앞서고자 한다면 훈련받은 연구자를 필자로 확보하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3. 한국의 대학원생 수는 2000년도에 이미 23만 명에 육박했으며, 2010년대엔 30만 명을 넘어섰다(http://www.gradmap.co.kr/grad/html/data01.htm). 지금까지 인가된 석박사 학위취득자 중 실제로 학위에 값한 역량을 가진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받은 경우가 몇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제반 영역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그동안 양적으로 눈에 띄게 불어난 학위취득자에 비해 정작 그렇게 축적된 전문인력을 흡수하여 유의미하게 활용하는 메커니즘이 한국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가에 있다. 대학·연구소가 해당 인력을 전부 흡수하기엔 과포화 상태가 된지 오래임에도 특히 인문사회 분야의 경우 그러한 소수의 일자리를 제외하고 학위취득자를 활용하는 경로는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언론 및 정책결정과정에서 충분한 전문성이 투입되지 않고 있음은 계속해서 지적되고 있지만, 정작 인력을 생산하는 쪽에서는 공급과잉의 위기감이 지배한다. 이 역설은 수요와 공급을 연결시키는 생태계가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좋든 싫든 한국이 영미처럼 대학원과정에서 대량생산된 고급인력을 학술-정치·정책-언론에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연구자 혹은 연구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독자에게 제공하는 지식의 질을 올리고, 연구자들은 언론 혹은 다른 경로를 통해 정치·정책결정과정에 전문성을 공급한다. 물론 이 과정이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쉽게 될 리는 없다(어쨌든 대학원생들조차도 한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원과정의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분간 '학력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거라 예측하는 입장에서, 한국 언론이 기존의 기자채용 시스템이 소화할 수 없는 고급인력, 즉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필자들을 흡수하여 고급화를 추구하는 단계를 고려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 요즘처럼 "기레기"란 말이 일상적으로 댓글란을 뒤덮고 갖가지 대안언론이 기존 언론의 발언권을 위협하는 시절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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