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윤리, 상업사회와 언어적 실천의 문제

Comment 2017. 8. 26. 13:53
"환대 혹은 대접이란 것이 상품화된 지는 제법 오래다. 상업적인 여행이 등장하면서 낯선 이들을 대하는 호텔이나 항공 서비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친절함의 표준화는 이제 더없이 확장되었다. 물론 생면부지의 낯선 곳을 가도 불안을 덜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동일한 친절함의 코드 덕일 것이다.

지구화의 또 다른 일면은 이처럼 힐튼이니 하얏트니 노보텔이니 하는 호텔 체인과 세계적인 항공사들이 만들어놓은 접대의 언어들일 것이다. [...] 어디를 가든 친절함을 요구하고 또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일상적 교유가 일어나는 모든 곳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정복하여 왔다.

[...] 윤리적 문제가 또한 사회적 문제라는 것은 명민한 철학자들이 항상 유념했던 주제이다. 그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으로서의 도덕과 사회생활의 규칙 안에 스며 있는 객관적인 윤리가 다른 것임을 일깨운다.

헤겔 같은 철학자는 후자를 윤리적 실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말 그대로 개인의 마음 씀씀이가 관건인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동하기만 해도 사회생활의 규칙 자체가 서로를 선하게 대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윤리적인 옳음이다. 윤리는 누군가의 양심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활동의 규칙 속에 객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 없이 환대도 없을 것이다."

: 우연히 서동진 선생의 칼럼(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28&aid=0002377354)을 읽다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 글의 요점을 거칠게 정리하면 지구화·전세계적 자본주의화와 함께 친절·환대가 진정성을 잃고 인위적인 상품으로서 존속하게 되었으며, 이는 윤리가 "사회활동의 규칙 속에 객관화"된 "다른 세계"의 도래를 통해서만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현세의 부정과 빛나는 내세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필자의 기독교 구원사 혹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내러티브에 굳이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지만--물론 나는 왕년의 (신)좌파이론 연구자들이 음울한 종말론적 내러티브나 신나는 동아시아 판타지로 빠지는 상황에 파산 이상으로 적합한 표현을 찾을 자신은 없다--하필이면 19세기 초의 헤겔이 인용되는 바람에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헤겔의 충실한 독자도 아니고, 필자가 정확히 어디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게 걸리는 점은 "말 그대로 개인의 마음 씀씀이가 관건인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동하기만 해도 사회생활의 규칙 자체가 서로를 선하게 대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 17세기의 그로티우스·푸펜도르프의 자연법적 전통으로부터 이어진, 그리고 헤겔 당대에도 폭넓게 퍼져있던 유럽의 교역·상업사회론에서 공유되는 논리라는 사실이다. 즉 모두가 교역과 상업으로 엮이는 상업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더 선량한, 한 마디로 '문명화된' 존재가 된다. 그로티우스와 홉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문제, 곧 자신의 이익추구를 본성으로 갖는 인간이 어떻게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자신들이 이제 각자의 농업적 생산에 근본적인 토대를 두는 대신 교역을 통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얽혀 부(富)를 창출하는 상업사회에 접어들었다는 인식과 접합한다. 그것이 근대문명론의 한 기원, 즉 "상업이 인간을 교화시키고 문명사회를 만든다"는 믿음의 기둥이다. 교역·상업과 문명화·평화의 결합은 각각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들 간의 평화라는 문제를 해명하는 과제에도 활용되었다. 저 유명한 "반사회적 사회성"(Ungesellige Geselligkeit / unsocial sociability)이란 말로 압축되는 칸트의 세계시민주의적 논의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헤겔이 이전의 전통을 흡수하여 자신의 체계를 위한 벽돌로 활용하는데 매우 능숙한 인물임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는 또한 (역시나 상업사회론의 대표적 사상가이기도 한) 아담 스미스의 애독자이자 당대의 자연법·문명론에 깊은 관심을 가진 매우 실천적인 사상가이기도 했다. 이스트반 혼트(Istvan Hont)의 마지막 강의에 언급된 짧은 토막을 인용한다면, 인륜성이 작동하는 토대가 되는 헤겔의 "시민사회"(bürgerliche Gesellschaft / civil society) 개념 또한 근대적 키위타스(civitas), 즉 "노예를 소유하지 않는 시장 사회"(non-slave-owning market society)의 개념에 닿아있다(_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_ 5-6). 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함축은, 객관성과 주관성이 마주치는 헤겔의 인륜성이 한겨레 칼럼의 의도와 정 반대로 상업화·전지구적 교역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상업과 교역을 통해 작동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존재가 되기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객관적으로' 이끌린다. 그는 한편으로 과거의 인습이나 권력의 강제적인 압박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체적이고 자유로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객관적 요구사항인 친절하고 유덕한 품행양식(mode of conduct), 인륜을 제2의 본성으로 삼게 된다. 여기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객관적인 조화가 공존하는 '근대의 섭리'(modern providence)에 대한 믿음이 깃들어 있다. 오늘날의 비판적인 관찰자들과 헤겔이 공유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면, 후자가 "상업의 부드러움"(doux commerce)이 촉진한 결과로 바라보는 현상을 전자는 자본의 논리가 강요하는 위선과 굴종으로 이해한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헤겔은 '문명화과정'에 기만과 잔혹함, 강제가 사라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군가의 잘못된 인용을 지적하는 걸로 끝맺음하는 걸 피해보자. 한국에서 사상사는 아직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통용되는 분야이며, 기고자의 논지는 굳이 헤겔을 인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을만큼 단순명백하다. 내가 오늘날 한국의 동학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공부의 충실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고의 방식에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도덕·윤리와 같은 인간학적 면모들을 다룰 때 특정한 사회모델, 특정한 시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고 없이는 그 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서동진의 글을 읽으면서 진짜로 질문해야 하는 지점은 그가 헤겔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용했냐가 아닌 그가 자명하게 깔고 가는 몇 가지 전제들, 그리고 그것의 유용성에 있다. 예컨대 인위적이고 상품화된 친절·환대와 진정한 윤리적 태도가 그토록 쉽게 나뉠 수 있는가? 후자가 "다른 세계"에서 가능하다면, 그 세계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과연 그 수사적 표현이 모든 바람직한 것의 응축에 수반하는 개념적 질량을 감당할만큼 튼튼한가? 이러한 발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가? 이 질문 모두에 나는 회의적이다.

우리의 언어·사유가 의미있고 실천적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단계부터 필요하다. 언어는 오로지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언어들과의 대면을 통해서만 세계 속에 유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다. 헤겔의 말이 위력적이었다면 그것은 그가 당시의 현실을 기술하고 규정하는 다른 언어들과의 치열한 접촉과 투쟁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세계"를 그토록 쉽게 가져다 쓰는 레토릭은, 그것이 제 아무리 급진성, 진정한 해방적 실천, 유토피아적 지향 등의 수사로 장식된다 할지라도 그만한 개념적 질량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단지 그것이 누군가의 오래된 꿈을 매만지는 데 만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데 적합한 보다 정교한 모델을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안의 지점에서 만사의 타락을 개탄하는 도덕적 드높음이나 역으로 자신이 다루는 언어와 문화, 사유의 무력함을 조소하는 자기파괴적 전락 둘 중 어느 쪽이든 그러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우리의 작업은 우리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를 직접 대면하고 추적하고 분석하는 고된 노동으로부터만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