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흔한 오류목록

Comment 2017. 9. 9. 21:06
자주 접하고 앞으로도 자주 접할 다양한 오류들.

1. 아시아가 하나가 아니듯 서구도 하나가 아니다. 특히 서구 어느 대학에서 박사학위 하나 받은 뒤에 서구의 한계를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대신 초월적이고 신성한 동양고전의 길로 빠지시는--분들은 종종 이 가장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2. 서구 근대철학/사상은 이성중심주의로 정리하지 않는 게 낫다. 맨날 "데카르트 이래의~"로 욕먹는 데카르트나 홉스도 기본적으로는 감각에 기초한 인간학 위에서 사고했고, 18세기 영국·프랑스 모두 감성(sensibility)에 기초한 문화·사조가 유행했다. 어느 시대나 그렇겠지만, 솔직히 18-19세기쯤 와서 점차 학문별·영역별 분화가 가속화되는 시점부터는 모든 영역을 싸잡아서 특색을 부여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유명론nominalism은 비관주의자의 덫이라기보다는 복잡성이 증대한, 적어도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도구다.

3. 당연하지만 기독교도 언제 어느 지방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초시간적 범주가 아니다. 피터 브라운의 <기독교 세계의 형성>을 한번만 읽어보면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교회도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갈등·동맹·무시하면서 계속 변화해 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고, 교리와 그 해석도 계속 바뀌어간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덧붙이자면 이제 "중세 암흑기"란 말은 치워버리자. 로마 멸망 이후 서구에서 기독교 혹은 그 카테고리에 묶이는 다양한 행위들은 매우 생산적이었고 중세는 이 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시대를 논하는 학술서에도 종종 나오는 비슷한 실수로는 유교경전의 몇몇 교리가 국경과 시대에 무관하게 그대로 적용 및 이해되었으리라는, 다시 말해 초시간적인 유교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다. 조선이 변화하는 사회였다면 그 사회에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 또한 시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4. 서구 근대 기준에 끼워맞춰 조선사회를 이해해봐야 별 소득이 없듯 이를 반대방향으로 적용해도 의미는 없다. 요즘 나무위키의 영향인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골처녀 차림을 했으니 농본국가의 현명한 국모(?)였으리라는 식의 믿음이 갑자기 확 퍼지고 있는데, 루소 이후 "진정성"과 "덕"을 갖춘 시골처녀 패션이 인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아니 그전에 적어도 루이 14세와 콜베르의 시기 이후 왕과 국가가 어떤 관계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상한 낭만화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조선쯤 되는 나라에서도 왕이 농사를 짓고 왕비가 길쌈하는 식의 행위가 진지하게 왕실 재정 안정화를 목표로 한 노력이었을리가 없지 않나. 조금 낯선 과거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국가를 운영했다는 편견은 버리는 게 낫다.

5. 서구 근대 이성중심주의가 있었고 이를 비판한 포스트이론들이 서구 현대학술/사상의 유일한 핵심이었다는 매우 단순한 틀은 그만 좀 갖다버려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저런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만들긴 했고, 실제로 포스트이론들이 여기저기 중요한 족적을 남긴 건 맞지만, 현대 서구 학술장은 대부분의 한국인 연구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화 되어있다(물론 그렇다고 거기에서 항상 생산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건 아니다). 포스트모던이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은 곳은 특히 문학/문화 분과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제한된 분야 및 대중예술담론이었지 절대 학술장 전체가 아니었고, 미국이 압도적이었던 "현대 프랑스 이론"의 수용도 독일, 프랑스, 영국, 거기에 각 학문분과마다 제각각이었다. 제발 80-90년대 쯤 나온 미국 책 번역서 한 권만 읽고 서구 현대 철학이 어쩌고, 서구의 지적 조류가 어쩌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그만하자. 당연하지만 동시대 프랑스 급진좌파철학은 그 영향력만으로 평가할 때 몇몇 학계와 좌파이론네트워크 밖에서는 그다지 잘 관심을 갖지 않는 게토에 가깝다. 생산적인 연구자가 되고 싶다면 다른 것들도 좀 찾아 읽자.

6. 국제정치에서 분석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된 형태라면 모를까, 국가는 절대로 하나의 단순한 행위자가 아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국가도 그 안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경쟁·협력·방해를 수행한다. 우리는 편의상 그 행위자들을 개인 단위까지 쪼갤 수 있는데, 실제로 개인도 단 하나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개인의 복수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한 가닥씩 따지려면 그때부터는 맥락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나무에 묶여 숲을 보지 못하는 건 당연히 문제지만, 숲을 한 그루의 나무로 간주하는 건 더한 오류다.

7. "연속성"과 "구조"는 분명 우리 사고의 복잡성을 간략화시켜주는 고마운 지적 도구이며, 우리는 그런 단순화된 틀을 통해 현상에서 의미를 찾아내곤 한다("도식적"이란 표현은 보통 비난의 함의를 갖는데, 사실 도식화하지 않고 복잡한 현상을 다룰 수 없다). 하지만 그걸로 역사적인 현상, 특히 특정한 시공간 내의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아주 많은 걸 희생할 각오를 요구한다. 실제로 행위자들의 언행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과거의 반복처럼 보이던 것들이 당시의 맥락에 따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러한 도구들에 발견술적 용도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 않으며, 이것들에 기초해 비교적 길고 넓은 시공간에 걸친 현상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아주 섬세한 수사적 기법이 없이는 무리수로 이어지기 쉽다. 누구누구의 어떤 개념-을 적용해서 다른 시공간에 있는 현상을 설명하겠다는 시도도 마찬가지다(대표적으로 정신분석계열은...나는 여기에 독자의 사고를 훈련시켜주는 의미 이상의 "진리치"를 부여하는 건 매우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8. 경제 혹은 물질적인 영역이 사람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하는 건 어리석다. 그러나 그러한 영역에 나타나는 변화조차도 사람이 이미 지니고 있는 해석틀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해석에 기초해 사고하고 말하며 행동한다는 사실을 잊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다는 뜻이다. 매우 거시적인 현상을 다루거나 선택적인 연구를 수행할 때 이 해석 혹은 (전통적인 맑스주의 문예학의 개념어를 끌어오는 게 허용된다면) 매개의 문제를 괄호 안에 넣을 순 있다. 그러나 다시 미시적인 행위/자의 분석에서, 특히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역사적 행위/자의 분석에서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경제결정론은 오직 제한적인 효용만을 가지며, 대체로는 너무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언어와 사유는 만물에 빛을 비추는 절대정신이 아닌 것만큼이나 물질의 단순한 반영물 또한 아니다--현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자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언어와 사유를 다룰 필요가 있다.

9. 특히 문학이나 역사 같은 분야에서 방법론에 대한 고찰없이 텍스트/사료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는 맹신을 아직까지 고집하는 건 바보짓이다. 방법의 초점은 "어떻게" 사고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있으며, 따라서 방법없는 사유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결여됨을 뜻한다. 반성이 결여된 사유는 연구자를 그 자신에게 가장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사고,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되풀이로 인도한다. 물론 일부 천재적인 사람들은 그런 사료들만을 읽으면서 직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함정들을 뛰어넘고 놀라운 통찰들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나와 같이 지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지금까지 축적된 방법론적 통찰을 흡수하고 필터링하면서 어떤 사고가 어떤 실수를 낳는지를 유념하고 이를 신중하게 피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애초에 "과학적 실증"이란 구호 자체가 그런 역사적인 방법론적 투쟁에--구체적으로 19세기 독일 역사주의에--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주의자들과 그 후예들은 그 뒤에도 계속 나아갔는데 희한하게 후발주자인 우리들이 "실증"에만 매달리는 건 무슨 경우인가.

10. 연구분야가 전문화될수록 자기 분야 바깥의 책들은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ㅎㅎㅎ" "제 관심분야가 아니라서^^" 등등의 이유로 외면하기 쉽다. 특히 (애초에 한국어로 주어진 지적 전통 자체가 아직 그다지 크지 않은) 한국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뛰어난 책들은, 그것이 설령 내 직접적인 관심사가 아니며, 동시에 시간이 지나 잘못된 자료에 기초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할지라도, 독자의 사고를 훈련시켜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자료의 집적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연구자 또한 한 명의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이 이야기꾼이 다른 뛰어난 이야기꾼들에게 배우지 않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다. 자기 분야의 그저 그런 논문 수십 편을 읽어서 읽는 효용과 타 분야의 정말 천재적인 사유물 한 권을 읽는 효용은 같지 않으며, 우리에겐 양쪽 다 필요하다. 단순히 성실한 연구자가 아니라 길을 개척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면 당장 독서범위부터 새롭게 개척하는 게 필수적이다.

방법론의 축적이 잘못된 길을 피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면, 뛰어난 저자들이 보여준 서사 혹은 이야기하는 방식의 수집은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구조의 가짓수를 다양화·심화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비록 우리의 학문적 제도 및 학계가 질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눈먼 채로 움직이고 있지만, 인문분야에서 연구는 철저히 질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걸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사유의 방법과 형식을 다듬어야 한다.

11. 우리 모두는 시간 속의 행위자며, 이는 우리가 참고하는 (보통 타 분야의) 주요한 연구서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게 개설서를 비롯해 필드를 정리하고 개괄하는 연구로, 당연히 이런 연구 또한 해당 필자 또는 그가 속한 지적인 맥락의 관심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참조할 경우엔 "최신 연구 반영"이 안 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찾아볼 수 있지만, 예컨대 1960-70년대 미국 정치철학과 동시대 영국 정치사상사처럼 같은 대상을 매우 인접하고 때로 겹치기까지 하는 분야에서 다루면서도 매우 다른 관점을 내보이는--동시에 서로의 관점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경우가 있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초보 연구자가 서구 학술장의 연구를 급하게 정리할 때 생기기 쉬운 실수인데, 한때 유명하고 고전적인 텍스트로 간주되었지만 이미 다른 연구자들에게 철저하게 논파된 연구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다거나, 역사적 대상으로의 "자유주의"처럼 지난 20여년 간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급속도로 증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고루한 방식으로 정리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서구가 하나가 아니듯 서구 학술장 또한 하나가 아니며, 서구가 계속 바뀌듯 서구 학술장 또한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유동성 속에서 정확한 위치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었을 때 내 연구 또한 이상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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