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나, 다니엘 블레이크>.

Critique 2017. 1. 6. 15:08

켄 로치(Ken Loach) 감독, <,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당연히 영화 줄거리가 언급된다]

 

 디킨스로 석사논문을 썼던 입장에서 <, 다니엘 블레이크>는 찰스 디킨스 같은 19세기 영국소설의 한 대목에 영국 노동계급적 감성을 불어넣고 이를 신자유주의자·보수당이 집권하는, 그러나 쇠락해가는 21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옮겨놓은 이야기다. 다르덴 형제의 비슷한 지향을 보여준 실패작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은 마지막에 자본가가 갑작스럽게 메피스토펠레스적 유혹자로 제시된다는 걸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다소 추상적인 연대의 윤리만을 초점으로 두었고 그 결과물은 도식적이고 반복적인 플롯이 96분의 상영시간을 억지로 지탱하는 지루한 작품이었다(이 영화에 대한 나의 리뷰는 http://begray.tistory.com/205 를 참고하라). 로치의 작품은 전통적인 영국적 전형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고, 내 생각에는 그게 이 영화를 다르덴 형제의 것에 비해 좀 더 성공적인 낭만적좌파영화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물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먼저 <, 다니엘 블레이크>는 명확하게 신자유주의 하의 복지제도 대 (다소 낭만적으로 그려진) 노동자계급·‘평범한 사람들의 대립구도를 뼈대로 삼고 있다. 영화의 시작은 다소 성마른 성격의 나이 든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가 외주화를 추구하는 영국 정부에 의해 고용된 미국계 기업의 의료 전문가와 면담을 빙자한 충돌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자는 미리 배정된 질문지만을 기계적으로 읊는다는 점에서 주어진 절차만을 따를 뿐 전문성이나 이해력, 책임감 및 배려심 등은 결여된 그 자체로 기계부품 같은 존재로 그려지며, 바로 그러한 전문가에게 다니엘 블레이크의 삶을 기괴한 복지제도 내에서의 절망적인 투쟁으로 자의적으로 처박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이 시스템은 관료제의 가장 끔찍한 전형을 대표한다. 무책임 때문이든 보복심 때문이든 해당 조사원은 심장질환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다니엘이 질병 수당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정해버리고, 여기에 불복하여 항고와 재심사를 신청하기로 결정하면서 다니엘은 신자유주의적 영국 복지제도의 가장 끔찍하고 한심한 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영화에서 복지행정업무의 종사자들은 대체로 철저히 행정상의 편의만을 따지며 자신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조금만 어긋날 경우 가차 없이 수당을 삭감하고 이러한 권한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악마적 존재들로 그려진다. 늙고 병든 다니엘이나 저학력에 다른 끈도 없이 두 자녀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싱글맘 케이티처럼 정상적인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지원수당은 사실상 생명줄과 같은데, 정부와 관료는 언제든지 이 생명줄을 쉽게 조를 수 있고 또 그러고자 한다. 바싹 마른 잔고를 보며 목이 죄어오는 느낌을 아는 관객이라면, 질병수당이 나오지 않아 구직수당 지원자격을 얻기 위해 길거리를 헤매면서 일자리를 알아보는 다니엘이나 너무 배가 고파 식료품 지원센터에서 이성을 잃고 통조림 스프를 뜯어먹다가 무너지는 케이티의 삶은 단지 슬프기보다는 그 자체로 공포스럽고 두렵게 다가올 것이다. 빈곤이 우리의 심신을 무너트린다면, 우파들이 조종하는 국가는 바로 그 빈곤을 통해 우리를 인간 이하의 비참한 존재로 만든다.

 

사악하고 억압적인 국가·제도의 반대편에는 한편으로는 열악하고 퇴행적인 제도에 의해 억압받고 궁지로 내몰리면서도 고유의 덕을 잃지 않는 노동자·하층계급의 삶이 있다. 앞서 영국식 복지(비록 영국인들의 국가·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은 것이지만) 마거릿 대처 이후에 점차 일반화된 인식을 재현한다면, 40년 경력의 숙련된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의 하층노동계급 등장인물들은 적어도 19세기부터의 오랜 전통을 가진 노동계급의 특정한 전형을 보여준다(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스티븐 블랙풀Stephen Blackpool을 포함한 19세기 산업소설의 노동자상, 혹은 E. P.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기억하는 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대략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비록 겉으로는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며 성마르고 서툰 면모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이웃의 고통을 함께하는, 무엇보다도 나름의 명예와 자긍심을 지닌 고결한 인물로 그려진다.

 

<, 다니엘 블레이크>는 특히 19세기에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그려졌던 미덕을 갖춘 노동계급의 전형을 크게 손대지 않고 활용한다. 결국 조사(弔詞)로 낭송되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말은 그 전형을 거의 그대로 문자화하고 있다. 근면하고, 자선을 베풀고, 구걸하지 않는, 자립적인 인간이자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존중받을 자격을 갖춘 노동자 말이다. 물론 이러한 형상은 정치적으로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 가령 덕이 없고 자립적이지 못한 노동자는 존중받을 자격이 없는가? 그러나 로치의 영화가 이 전형의 활용을 통해 묘사의 구체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람을 개처럼대우하고 몰아붙여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조차도 박탈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영화에서 영국 복지제도는 때때로 거의 19세기 전반 공리주의자들이 개혁한구빈원workhouse을 떠올리게 한다)을 더욱 강력하게 고발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켄 로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며, <, 다니엘 블레이크><그란 토리노>(Gran Torino,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008)처럼 당당한 노인을 그 자체로 남성적 영웅으로 만드는 대신 노동계급·빈민 간의 공동체적, 혹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가족적 유대와 연결시키는 역시나 영국적인 전형을 따른다. 다니엘이 일했던 직장은 노동자들 간의 긴밀한 유대가 강조되며(영화 앞부분에 짧게 작업장이 나오는데, 켄 로치는 기계와 같은 전형적인 공장의 이미지보다는 노동자와 그들의 대화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춘다), 이웃의 아프리카계 청년은 아버지뻘의 다니엘과 유쾌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노동자·하층계급은 케이티를 성매매로 유도하는 인물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로에게 친절하고 온정적인 인물들로 그려져 있다. 사실주의적영화는, 19세기 영국 사실주의 소설들 역시 그랬듯, 실제로는 낭만적인 스케치에 가까우며 예컨대 차브(Chav)와 같은 하층계급의 악덕이나나는 뉴캐슬은 런던과 달리 차브가 없는 지역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뻔했다!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적대감 등은 다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 이후의 영국에서 노동자 연대가 정부와 대항해 실질적인 투쟁을 벌일 역량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투쟁도 기껏해야 비인간적 복지센터의 벽에 페인팅을 하고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는 것 정도다. 대신 로치는 두 자녀를 홀로 키우면서 사회 최하층 수준의 삶조차도 간신히 영위하는, 그러나 역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노력하는그런 점에서 역시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습적인 전형인젊은 싱글맘 케이티와 늙은 홀아비 다니엘 블레이크가 유사 가족을 형성해가는 서브플롯을 집어넣는다. 사실 이러한 유대감과 상호 위로를 제공하는 유사 가족 혹은 가족적 공동체에 어떤 대안적위치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디킨스와 같은 19세기 영국 사실주의 소설에서 종종 발견되는 패턴이다. 국가도, 개인도, 노조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로치는 좀 더 오래된 선택지를 재발굴한 셈인데, 물론 이때의 가족 공동체는 이상적 전형으로 영화의 낭만적 색채를 좀 더 짙게 만든다.

 

여기서 다니엘과 케이티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로맨스적 긴장을 처리하는 방식은 한번쯤 짚을 필요가 있다. 케이티는 두 명의 남편 혹은 애인으로부터 각각 한 명씩 자녀를 얻은 젊은 싱글맘(혹은 미혼모)이자 자녀들을 위해 성매매를 수행하는 인물로, 이 두 가지 전형은 우리의 대중매체·문화적 관습에서 섹슈얼한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 실제 미혼모·성매매여성의 현실과는 별개로, 적어도 서구의 대중문화는 전통적으로 미혼모와 성매매 여성을 섹슈얼해진sexualized 여성으로 그려 왔고 우리는 대표적으로 <레 미제라블>의 팡틴을 포함해 이 전형이 등장할 때마다 텍스트에 기묘한 성적 긴장이 들어서는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적 관습에 더해 다니엘이 그녀의 자녀들에게 유사-아버지 역할을 할 때 그와 케이티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 미국이나 프랑스, 혹은 좀 더 젊은 감독이었다면 둘 사이의 로맨스적·성적 긴장은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다사실 영국문학 내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건 아닌데, 나이 든 남성과 딸 뻘인 여성 사이의 유사 로맨스 관계에서 나오는 긴장이야말로 디킨스적이다.

 

이 미묘함이 극대화된 장면이 바로 다니엘이 위장된 성 구매자로서 성 판매자 케이티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성매매에 뛰어든 여성을 그녀에게 (낭만적) 호의를 가진 남성 조력자가 마주하는 일종의 폭로플롯은 특히나 그 순간 동원되는 강력한 감정적 힘 때문에 종종 사용되어오던 패턴인데(물론 이러한 플롯 자체가 남성중심적인 것은 명백하다), 켄 로치는 아마도 이 플롯의 채택을 통해 비참한 상황에 대한 정념을 극도로 끌어올리고자 했겠지만 동시에 이 선택이 케이티-다니엘에게 잠재되어 있던 섹슈얼리티를 전면화하게 되는 위험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예를 들어 <비스티 보이즈>에서 윤계상이 윤진서를 고객으로 만나는 최후반부 장면을 보라). 나는 영화 전면에 흐르는 거의 과잉될 정도의 고전적 장치들이 섹슈얼리티 문제를 어떻게든 우회하기 위한 점잖은 좌파 어르신켄 로치의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매매 폭로의 순간에 여성 인물의 도덕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역시나 고전적인 처리기법이나, 그 자체로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영화 전체 구성에서 특별한 기능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죽은 몰리의 회상 장면 등등(의도적으로 부녀관계처럼 보이도록 대사를 번역한 한국어 자막도 여기에 일조한다).

 

그러나 이 모든 낭만적·도덕주의적 색채도 <, 다니엘 블레이크>가 토대로 삼는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다. 기나긴 불경기와 식료품 지원센터에 길게 늘어선 줄, 노인은커녕 청년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 복지센터를 빽빽하게 채운 지원대상자들은 영화의 이야기가 쉽게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침체와 불황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걸 잊어버릴 수 없게 한다. 결국 그 모든 자선과 우애에도 불구하고 바닥부터 꺼져가는 영국사회에서 주인공들이 생존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은 국가의 복지수당 뿐이다. 영화 말미에 다니엘이 항소를 처리할 직원·전문가들을 보며 분노와 한탄, 절망을 담아 저런 것들에게 내 목숨이 달려 있다니라고 탄식하는 장면은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한다.


사실 다니엘의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는 교묘하고 조금은 약삭빠르기까지 한 선택이다.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너무나 절망적이었을 것이고, 항소가 받아들여져 질병수당이 나온다면 국가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로치의 선택은 아예 다니엘을 항소심에 들어서기 직전 죽여 버림으로써 국가가 답변할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으로, 국가는 입이 봉쇄된 채 끝까지 죄의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이후 교회에서 치러지는다니엘 블레이크는 국가와 싸우고, 빈자와 함께하지만 어쨌든 죽은 뒤에는 교회로 간다가난한 자의 장례식에서 낭송되는 죽은 이의 마지막 말은 무척 강한 정서적 울림을 갖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노동자의 덕목을 재확인하며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방어적 스탠스를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덕 있는 노동자/빈민의 곤경을 다뤄온 19세기 영국문학의 전통이 그랬듯 말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 나는 <,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2014)가 떠올랐다. 전자가 전통적인 노동계급적 감수성을 낭만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대변하는 영화라면, 후자는 자유로운 엘리트들의 공공선을 위한 연합이라는 영국 상층계급의 역시나 전통적인 이상을 충실히 재현한다(<내셔널 갤러리>에 대한 나의 리뷰는 http://begray.tistory.com/383 참조). 두 텍스트가 그려내는 두 개의 세계는 서로의 삶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둘 혹은 그 이상의 세계가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영국다움이기도 하다.


2010년대에 양자가 때때로 마주치는 순간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2011년의 런던 폭동참여자들을 경찰봉으로 후려치는 기마경찰, 혹은 귀족이 "Manners maketh Man"이라고 말하면서 차브를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훈육하는 <킹스맨>(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5), 하원에서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이 어느 빈곤층 지지자의 편지를 읽는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보수당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의 표정 같은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러나 <, 다니엘 블레이크>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지 40여일 뒤, 이 두 세계는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에서 아주 짧게나마 마주했으며 내 생각에 그 순간의 기억은 쉽사리 잊힐 수는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에서 두 세계가 자신을 이번처럼 과거의 관습에 따라 묘사하는 게 가능할까? 그럴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재현양식이 선택될 것인가? 어쩌면 켄 로치의 이번 영화는 브렉시트 이전 시기 최후의 영국예술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이후를 복잡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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