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계몽주의의 환빠적 해석" 비판
Critique 2017. 5. 28. 18:07아주 오랜만에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읽고 싶은 논문을 읽는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던 와중, 멍청한 글을 읽고 기분이 매우 많이 안 좋아졌다(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59456 ).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이병한을 위시해 이런 형태의 동아시아 담론,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동아시아 연구에 "중빠" 혹은 "환빠"의 논리구조를 덧씌운 주장을 하는 이들이 지적으로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서구 근대"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 자체로는 특별히 문제가 없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하되, 그로부터 각자의 자유, 모든 사람의 평등, 정치적 민주주의 같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구성하는 개념 또한 서구 근대의 것이므로 함께 폐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추종적 동아시아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유교·공맹·중화적 (이병한의 경우는 "新동학") 통치질서 등인데, 이는 '보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가 '만물의 자연스러운 위계'에 기초하여 나라와 세계를 다스리면 된다는 "덕치"와 동일시된다(나는 그들이 스스로를 능력있는 통치자로 규정할지, 아니면 위계의 아랫쪽에 있는 피통치자로 규정할지 궁금하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서구 근대 비판이 사실상 독재옹호와 별 다를 바 없는 反민주주의·反자유·反평등론으로 퇴행하는 극단적인 사례다. 나는 <프레시안>이나 장정일, 홍세화 선생을 포함해 이병한과 중국 추종적 동아시아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적 시선 없이 추천·전파하는 "진보적" 매체·필자들이 심각하게 자기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한때의 진보적 지성이 한 시대의 퇴물로 전락하는 사례를 몇 개 더 추가하게 될 것이다.
이병한의 2017년 5월 26일 <프레시안> 기고글 "근대는 '유라시아의 합작품'이다"를 보자. 얼핏 보면 상식적인 제목을 단 이 글의 논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서구 근대 계몽주의는 중국 공자·맹자의 텍스트가 서구에 유입됨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1,2번). 둘째, 지금의 서양사는 가짜역사이며, 우리는 서구 근대의 자유민주주의의 종말을 인정하고 중화적 질서의 귀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3번). 이런 종류의 논의를 어느 정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이병한의 글이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두 권의 책의 주장을 합쳐놓은 데 불과함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첫 번째 명제는 황태연·김종록,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유럽 근대의 뿌리가 된 공자와 동아시아 사상>(김영사, 2015)에서 비교적 자세히 전개되었으며, 두 번째 명제는 이병한 자신의 <반전의 시대: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서해문집, 2016)의 핵심주장을 매우 간략하게 축소한 것이다. "계몽전제군주정"을 치켜세우는 전자 또한 어느 정도 유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천하: 중화세계의 논리”, “덕치: 동방형 민주정치의 논리”, “동학: 서학을 품어 동학으로, 새 학문의 논리”의 총 3부로 구성된 후자는 앞서 문단에 소개한 反민주주의·反자유·反평등론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다(뒷부분의 추천사를 읽어보면 여러 모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이병한 류의 주장을 필터링하지 못하는 한 진보 세력이 소수파의 반동적 극단주의로 퇴행하거나―나는 언젠가 그들이 반동성애 개신교 극단주의자들과 에로틱한 입맞춤을 하는 날이 와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다―아예 유의미한 정치적 담론장 밖으로 추방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기서는 첫 번째 명제의 학문적 가치에 대해 코멘트하겠다.
황태연과 이병한이 공유하는 서구 근대 계몽주의 공맹기원설의 핵심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서구 근대 계몽주의의 여러 필자들은 당시 서구에 번역·소개된 공맹의 주요 경전을 읽었고, 중국 문화 및 정치질서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언급했으며, 서구 근대 계몽주의의 전개에서 특히 좋은 면은 유교 경전에서 (한 두 문장 정도로) 이미 언급된 것을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②그러므로 서구 근대 계몽주의는 유교 혹은 중국전통에서부터 태어난 것이다. 나는 좋은 비교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예시로 들고 싶다. ①고대 중국대륙 어딘가에 한반도에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 중동 혹은 다른 대륙 어딘가에서 한반도의 언어와 유사한 발음의 표기가 발견되었다. ②그러므로 위대한 고조선과 한민족은 중국과 다른 대륙에까지 널리 영향력을 떨친 (가끔은 화성과 다른 외계인에게도 영향을 준) 모든 문명의 시원이자 모태다. 이로부터 내가 이병한·황태연을 비롯한 서구 계몽주의 공맹기원설의 주장자들을 “서구 근대의 환빠적 해석”으로 명명해도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이들은 유사역사학, 혹은 이병한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짜역사(Fake History)”의 추종자들이다. 이렇게 역사를 편파적으로 재구성하는 게 기꺼이 허용되는 일이라면, 나는 둘의 책에서 페이지를 뒤져 한두 글자씩 떼어낸 후 “저”, “는”, “사실”, “서구”, “제국주의”, “와”, “미국”, “의”, “열렬한”, “추종자”, “이며”, “몸”, “과”, “영”, “혼”, “을”, “바쳐”, “그들에게”, “충”, “성”, “하”, “는”, “노예”, “입”, “니”, “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그들의 책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의도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왜 이게 헛소리인가? 서구 역사학의 스칼라십을 조금만 따라간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을 몇 가지만 꼽아보자.
①서구가 계몽기에 들어가기 전에 서구 바깥을 모르는 서구중심주의에 찌들어 있었다는 건 헛소리다. 중세 후기 14세기 중반에 꽤 잘 팔린 (물론 ‘사실적인’ 여행기와는 거리가 먼) <맨더빌 여행기>만 봐도 유럽 바깥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사는 매우 높았으며, 서구의 기독교가 전 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상이 아니며 어딘가에 당시의 서구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하게 존재했다(<맨더빌 여행기>는 지금도 전공자에 의해 번역된 깔끔한 한국어본을 구해 읽어볼 수 있다). 독단적 서구중심사상이 있다가 공맹 때문에 깨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유럽 바깥에 대한 인식이 있다가 18-19세기를 거치고 전 세계에 대한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서구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문명이라는 사고가 본격화된 거다. 애초에 중세 암흑시대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주의로 들어간다는 식의 옛 도식 자체가 중세와 후기 고대(late antiquity), 초기 근대(early modern) 등의 보다 복잡해진 시대구별이 등장하면서 비판받은 게 수십 년 전이다.
②공맹사상을 비롯한 중국 사상의 수용이 서구에서 핵심적인 쟁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첫 번째 사항에도 암시되어 있지만, 17세기 중후반, 종종 “초기 계몽”(early Enlightenment)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서구 기독교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되었고, 이때부터 유럽 바깥의 다양한 문명권을 참조해서 비교대상으로 삼는 저술이 19세기까지 계속 나온다. 중국문명이 분명 흥미를 끄는 관심사였고 중국풍(과 일본풍)이 문화적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중국애호가(Sinophile)들이 많이 등장한 건 사실이지만, 이 또한 여러 다른 문명권을 참조해서 당대 서구의 지배적인 관념들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다고 보는 게 좀 더 올바른 서술일 것이다(“환빠적 해석”은 지금 한국에 레게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이 있으니 한국 현대 음악의 모태가 아프리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③문명의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매우 상식적인 일이지만, 근대 서구인들 또한 자신들의 맥락과 관심사에 매우 충실했으며 타 문명권의 정보를 편의적으로 재구성했다. 잔혹한 종교전쟁 이후 맞이한 17-18세기에 서구인들은 서로 다른 종파들 간의 관계, 세속적 통치자와 종교의 관계,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통치테크닉의 발달, 인간의 본성과 통치방식 포함해 “근대국가” 체제 형성의 토대가 되는 다양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두고 논쟁을 벌였고,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범위의 문헌들을 참고해 “보편적” 가치를 갖는 답변들을 제기하고자 했다.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참고한 타 문명권에 대한 정보는 서구인들의 관심사에 맞춰 재구성되었고, 중국에 대한 서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문명과 고전의 수용을 둘러싸고 서구인들이 크게 갈라져서 논쟁을 벌였다는 식의 서술은 이 시기 서구 지성사의 맥락과 그 복잡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황태연은 자신이 수많은 “1차 문헌”으로부터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역사적 맥락을 전혀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1차 문헌을 들여다봐야 자의적 독해를 반복할 뿐이다). 20세기 후반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 근대인들의 유럽 외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적으로 명명했는데, 계몽주의 중국기원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걸 보물단지처럼 껴안고 그 위에서 춤추고 있다. 사이드가 무덤에서 돌아누울 일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일차적으로 한국에 이 시기를 포함해 반세기 가까운 시기 동안 수행된 서구 지성사 연구가 사실상 거의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계몽주의 관련 지성사 연구에 대한 소개 및 정리로는 나의 http://begray.tistory.com/410 를 참고하라). 한국어로 번역된 관련저작도 너무 적고 그중에서도 한심한 수준의 번역이 종종 눈에 띤다. 나는 한국에 소개되는 서양사 저작이 여전히 사회사·문화사 등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을, 왜 그런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다소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정통 역사학” 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라는 구도, 오해만을 불러일으키기 쉬우며 별 쓸모는 없는 대립구도가 심지어 역사학 전공자들에 의해 강의실 안팎에서 재생산되는 광경으로부터 이제는 탈피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이 그동안 각각의 분야에서 진행되어 온 전문화된 연구성과를 수용하고 다른 전공자들에게 빠르게 소개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황당한 수준의 주장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도 학계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역사학, 특히 서양사는 지금보다 양적인 측면에서든 다양성의 측면에서든 훨씬 확장되고 다른 필드와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서구 계몽 중국기원설 필자들이 역사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론조차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케이스에서 애초에 철학전공자인 황태연의 저작이 기초적 수준의 역사적 오류로 뒤덮인 꼴은 어느 정도 웃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무려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백영서의 지도 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역사학자” 이병한이, 그의 논쟁적인 정치적 견해는 차치하더라도, 위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나는 동아시아 역사학계에서 그의 학적 평판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서구 근대에 관한 역사적 진술에서 그가 단지 서구 학술장에서 축적된 내용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음을 넘어 애초에 역사가로서 훈련받은 연구자라면 당연히 의심할만한 주장을 자신만만하게 되풀이하는 건 매우 경악스럽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역사가적 감각을 갖추기 위해 공부해온 문학 전공자로서, 이병한이 과연 “역사학자”라는 호칭에 값할 지적인 능력을 보여주는지 잘 모르겠다. 앞서 언급했듯 특정 시공간에 속한 행위자의 언행이나 문헌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적합한 맥락에 귀속시키는 최소한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서구 계몽주의 중국기원설의 필자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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