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만, 독립분화, 세속화, 그리고 역-세속화

Comment 2016. 7. 3. 01:51
"정치적 윤리학과 자연권의 과거 전통에서 사람들은 코드-가치(긍정적/부정적)와 행동의 올바름 또는 유용성의 조건을 위한 일반적 공식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선함과 올바름의 통일성은 선과 악의 차이가 의미를 지녔던 영역, 곧 세계의 영역을 초월한 종교적 의미론에서 보장되었다. 선은 그로 인해 이중화되었다. 초월성에서는 반대 가치 없이 작용하는 것에 반해, 세상에서는 악이라는 반대 가치를 가지고 작용한다는 것이다. 선은 논리적으로 모호해졌으며 다층적 위계질서 같은 다차원 이론을 구성하도록 강요받았다. 선이 이제 자연으로서 세속화했으며 논리적 모호성 속에서 때때로 나쁜 결과를 가진다는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알아차릴 수 있게끔 된다손 치더라도, 계몽주의자들도 장 자크 루소도 여전히 이 도[/]식을 따랐다. 프랑스 혁명은 이 점을 센세이셔널하게 보여주었고, 그와 함께 지혜의 역사에 종말을 고했다. 모든 성찰은 이제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코드들의 탈도덕화는[*지인의 코멘트에 따라 번역문 수정]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화폐 메커니즘에 의해 분화독립화된 경제에서 체계 경험이 이를 강요했다. 그리하여 경제의 성찰 역사는 도덕에 대한 기능적 등가물을 찾는 것과 더불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함께 시작된다. 훨씬 이전에 과학도 과학적 진보가 임박해 있으며 측정할 수 없는 선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했다.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오늘날 우리를 불안케 하는 두려움에 대한 어떠한 계기도 명백히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 때문에 세련화되었지만 이제는 '도그마'로서 거부된 초월성의 이론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와 이미 달성된 진보에 대한 암시로 충분했다.

이념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이행 시기에 준형이상학을 지닌 진보 낙관주의를 발견한다. 기능적 분화라는 새로운 질서는 옛 사회의 계층귀속에서는 개진될 수 없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자율성, 고유 가치 및 협력을 고려하지 않는 개별적 기능체계의 기능과 관련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성찰 이론이 가능하다. 동시에 그 결과 구조적으로 없어진 것이 의미론적으로는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는 아직까지 긴박한 것은 아니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야 먼저 단지 '사회 문제'[social problems]로서 긴박해졌다."(73-74)

"기능적 분화는 한편으로 '중복에 대한 포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능체계는 상호 간에 서로를 대신할 수 없으며 서로서로 대체할 수도, 단지 짐을 덜어줄 수도 없다. 모든 등가물은 각각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즉 체계 내적으로 처리된다. 정치는 학문을 대신할 수 없다, 학문을 법을 대신할 수 없다 등등처럼 모든 체계 사이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로 인해 과거의 다(多) 기능적 제도와 도덕은 해체되고, 그 대신 근대 사회를 모든 선행 사회와 구별해주는 특화된 코드의 특화된 체계로의 바로 그 귀속 현상이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 기능적 분화는 이러한 중복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심한 저항을 혼선 및 교란과 관련한 매우 특별한 민감성과 결합할 수 있는 기능체계의 높은 고유 역동성을 산출한다. 이는 동시에 전체 사회적 체계를 이론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은 각각의 특별한 반향 능력의 관점에서 모든 기능체계들을 따로 분석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때 전체 사회적인 반향은 부분 체계들의 특수한 반향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부분 체계들은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환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의 부분 체계가 환경 변화에 반응하고 그 결과 다른 부분 체계의 사회 내적인 환경을 변화시킨다면, 교란이 요동치는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 [.../]

그러나 교란만이 계속 전달되고 그로 인해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기능체계들의 공동 작용 또한 거의 모든 경우에 불가피한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은 '학문적' 연구 결과에 근거해 우선 '법적' 책임 제한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의해 '경제적으로' 가능해진다. 이 세계는 원래부터 사건들이 대체로 특수한 기능의 그물에 [딱 맞게] 떨어지게 할 정도로 그렇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기능적 특화는 오히려 복잡한 체계의 효과 만점이고, 모험적이고, 진화상 비개연적인 성취물이다. 그리고 기능적 특화는 자기 편에서 볼 때 체계 경계에 의해 제어되는 고도의 내적 상호 의존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 의존성으로부터 탈분화를 추론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상호 의존성은 오히려 근대 사회가 자신의 주요 부분 체계들을 특수한 기능의 관점에서 분화독립시키고, 이를 통해 부분 체계들이 상호 서로를 기능적 등가물로서 대신할 수 없게끔 하며, 이를 통해 문제들을 다수 기능체계들의 공동 작용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면 항상 부분 체계들을 서로서로 의존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78-79)

니클라스 루만. <생태적 커뮤니케이션: 우리 사회는 생태적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가?>. 서영조 역. 에코리브르, 2014[2008, 이 책의 토대가 된 강연 자체는 1985년]. 9장 "코드, 기준, 프로그램" 중.

: (내가 루만을 읽은 것은 본격적인 체계이론을 다루지 않는 한 두 권이 고작임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생태적 커뮤니케이션>을 읽던 중 이 두 문단을 골라 뽑은 이유는 아주 간단히 말해 서구의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을 체계 이론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index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가 포함되지조차 않았지만, 루만이 설명하는 각 기능체계의 독립분화과정으로서의 근대화과정은 기저에 세속화라는 거대 서사를 깔고 있다(동시에 근대를 다루는 서구의 주요한 사상가들 중 과연 세속화라는 주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러한 세속화의 서사에 따르면, 전근대 서구는 기독교의 지배로 대표되는 세계, 즉 선함과 유용함이 구별되지 않고 지상의 모든 판단/행위가 구원사라는 초월적 심급에 종속되는 시공간이다--엄밀히 말하자면 "초월적"이란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데, 중세 후기의 기독교 신비극에서는 애초에 구원사와 일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세계, 신의 뜻이 역사하는 세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의 전망이 희박해지면서(A.D. 100에 살았던 이와 1500에 살았던 이의 종말에 대한 감수성이 같을 수는 없다), 동시에 현실정치나 학문과 같은 영역에서 점차 독립적인 판단기준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위태로워진다. 신의 선한 뜻을 품은 질서로서의 자연이나 당장은 악하고 해로운 결과처럼 보이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구원에 수렴하리라는 섭리(providence) 같은 개념이 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얻는 근세는 과거의 유일-보편적 해석틀이었던 신학적 체계가 점차 그 복잡성이 더욱 잘 인식되어가던 '이 세계'를 설명하는 중심논리로 남아있기 위해 무리에 가까운 곡예로 스스로의 사지를 연장시키고 뒤틀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16-18세기를 거쳐 국가이성 개념의 등장, 시장이 독립적인 기구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 종교적 관용의 토대가 되는 "양심" 개념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과 같은 일은 세계의 복잡성을 해명하기 위해 복수의 독립적인 해석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점차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17세기의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같이 선한 신과 선한 신이 부여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리들이 점차 칼뱅주의적 이중예정론을 밀어냄과 함께 국가의 경영에 있어서도, 학문의 발전에 있어서도, 시장경제의 자유로운 운행에 있어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수사와 같이 '그 자체로 자유롭게 작동하면서도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신의 섭리를 자신들의 주요한 근거로 채택하곤 했다는 것은--우리는 심지어 자신들이 사회의 전부라고 선언한 인민주권론의 이론가들에게서조차 이런 자연신학적 논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경제이론가들 중에서 종종 (시장주의적) "경제신학"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이 발견되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세속화된 근대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잘 보여준다. 심지어 루만이 중요한 결별점으로 간주하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조차도 신적인 권위를 보유한 군주의 역할을 호소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만에게 있어 우리는 (적어도 서구 근대인들은) 이미 세속화된 사회에 도달했고, 이것은 비가역적이다. 여러 영역에 걸쳐서 하나의 판단기준으로서 "중복"된 역할을 수행하던 초월적 심급은 이제 사라졌고, 경제, 법, 학문, 정치, 종교, 교육, 예술, 심지어 (낭만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가치체계를 갖춘 독립된 기능체계들이 독립분화했다--정치나 종교가 "예술의 자유"를 침범할 때 많은 이들은 거센 반감을 가지며,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반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칭송받을 행위로 간주된다. 사회는 이처럼 독립되었지만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서로의 의견을 활용하는 복수의 기능체계들의 총합이다. 요컨대 루만에게 근대화과정 혹은 사회 내 각 기능체계들의 상호의존적 독립분화 과정은 세속화와 불가분에 있다.

여기까지가 앞서 인용한 여섯 문단을 나의 언어로 좀 더 평이하게 재기술한 것이라면, 2016년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세속화는 이미 완성된, 비가역적인 현상인가? 이슬람 종말론을 신봉하는 정교일치 '국가' ISIS의 등장을 애써 비서구 사회의 예외적인 현상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포함해 각 기능체계의 고유영역을 침범하는 특정한 유형의 도덕적 언어가 재출현하는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기능체계의 독립분화가 필연적으로 각 영역의 언어를 이해하는 전문가들의 출현을 요구한다고 할 때 그와 같은 전문가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사람 즉 각 기능체계 고유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의 비/제도적 정치적 행위는 어떠한 가치에 준거할 수 있는가? 이는 심지어 하나의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닌데, 종종 예술가들이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한심한 코멘트를 하거나 반대로 그 역의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한 기능체계의 이해는 결코 다른 기능체계의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요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무지하며, 오로지 해당 영역의 소통을 이해하는 전문가를 선택하는 것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나마 체계의 소통을 이해할 수 있다--그리고 복수의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전문가가 존재하는 체계에서는 전문가의 선별 자체가 매우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만약 우리가 위와 같은 상황을 세속화된 근대세계의 일반적인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사실상 사회의 복잡성 앞에서 판단불능 상태에 빠져 있으며 여기서 벗어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이 모든 영역을 초월적으로 통합하는 도덕적 코드라는 선택지에 강하게 이끌리는 것 또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속화된 세계는 세계의 복잡성을 극도로 단순화하여 행위/판단의 준거를 '붙잡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도덕화 경향의 출현가능성을 일상적으로 함축한다. 다시 말해, 세속화로서의 독립분화가 진행된 사회는 그것을 위협하는 기제 역시 산출한다. 그리고 이 위협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사회는 세속화가 비가역적이지 않은 흐름이라는 것을 직접 실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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