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일기. 故 신승욱 선배 3주기
Comment 2016. 7. 11. 02:571.
9일 토요일에 故 승욱 선배의 납골묘에 다녀왔다. 3주기에 맞추려면 기일인 24일 근처에 가는 게 맞겠지만 일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배와 블로그로 교분을 맺었던--그리고 선배의 조언에 힘입어 어느새 한국사 박사과정까지 시작하게 된--이가 대전까지 가는 운전대를 잡았고, 선배와 같은 반이었던 또 다른 이와 내가 신세를 졌다. 에어컨을 잔뜩 틀었음에도 볕이 워낙 강했기에 진이 빠졌다. 두 경기도민에겐 폭염주의보 문자가 수차례 왔으나 충청북도민인 내게는 아무경보도 오지 않았다. 토요일 서울을 탈출하려는 차량들로 인한 교통지체 속에서 한국사 전공자와 (역사 덕후이기도 한) 베테랑 사회부 기자의 조합은 길동무로 정말 최고였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나는 그들 사이에서 가끔 겸손하게 개드립을 더하는 걸로 만족했다. 10시 20분쯤 대공원에서 출발해 대전에 도착하기까지 3시 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민중은 개돼지"라고 진보계열 언론, 그것도 교육관련 베테랑 기자 앞에서 떠벌린 교육부 고위관료가 대기발령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고인이 살아서 이 소식을 접했다면 한 편으로 성을 냈을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분명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보탰으리라. 이제는 단지 상상만 해 볼 수 있을 따름이지만.
대전 구봉산 영락원은 카카오내비에는 제대로 검색이 되지 않았고, 고민 끝에 근처 정류장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2014년에 두 번 왔던 길이라 거기서부터는 곧바로 기억이 났다. 2년만에 온 영락원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고, 주차장엔 여전히 그늘진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주기 때 왼편의 정자에서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때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었던 이들 중 또 다시 여기에 온 둘은 잠시 상념에 젖었다. 오른편 건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면 도서실 사물함마냥 빽빽하게 봉안소가 배치되어 있다. 2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곧바로 몸이 찾아갈 곳을 기억했다. 손 두 뼘만치도 안 될 폭의 유리 칸막이 안쪽에 작은 단지가, 그 오른편에 아마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기 5개월여 쯤 전 석사학위 졸업식날 학사모를 쓴 선배의 사진이 있다. 얼핏보면 햇볕에 눈을 살짝 찡그린 것 같지만, 눈높이를 맞추고 자세히 보면 입가에 슬몃 미소가 감돌고 있다. 원래 잘 웃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고생 끝에 마친 학위논문에 대한 기쁨 또한 없지 않았으리라(<1․2차 유엔한국위원단의 평화통일 중재 활동과 그 귀결 (1948〜1950년)>, 석사학위논문, 2013. http://snu-primo.hosted.exlibrisgroup.com/82SNU:ALL:82SNU_INST21463601380002591). 고인과 처음 대면하는 이에게 이 사진이 생전의 고인을 정말 그대로 담아놓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의 풍채와 선량한 목소리, 그리고 결코 작지 않았던 그의 다소 높은 웃음을 지금 이 순간도 생생히 기억한다.
봉안 앞에서 한참 말이 없던 우리들은 각자 선배에게 인삿말을 건네고 이윽고 그에 관한 추억을 하나씩 끌러놓았다. 나는, 고인도 나도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고인으로 인해 적어도 지난 2년 여 간의 삶의 궤적이 상당히 바뀌었다.
2.
2011년 여름 서울대 법인화 사태로 인해 만들어진 대학원생 모임에서 우리는 둘 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멤버였다. 솔직히 말해 정치적인 영향력은 그다지 없었던 그 모임의 주 활동 중 하나는 대학원생 답게 사태를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고, 그는 서울대 법인화 논의의 역사에 관해 작은 논문을 남겼다(<공공성 가치의 위축과 특권 유지- 서울대 법인화 논의의 역사>, 2011.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693039 / 그의 글 초안이 실린 당시의 모임 자료집은 다음 링크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drive.google.com/open?id=0B_Ax-_xoHoEVVEYtbTU5VW1ycE0). 모임은 2012년 봄 서울대 내 최초로 전체 대학원생 대상 대학원 연구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했고, 나는 분석결과가 나오던 중 "제발 망하지 말아주세요"란 부탁을 남기고 입대했다. 첫 휴가 때 승욱 선배는 바쁜 일정 속에 잠시 저녁자리에 와서 곧 치러질 대선에 대한 인상깊은 코멘트를 남겨주었다. 그게 그를 마지막으로 보는 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듬해 7월 부대에서 급작스럽게 그의 부음을 접했고 나는 단지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014년 봄 박사과정으로 돌아왔을 때 모임의 중요멤버 중 관악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모임은 결국 망했고, 나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200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녔으면 이런 일은 익숙하다). 그럼에도 고인에 대한 부채감은 있었다. 실제로 만나고 함께한 시간은 결코 길지 않고 솔직히 말해 우리가 서로를 잘 알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동료였다--나는 모두와 잘 지낼만큼 원만한 성품은 갖추지 못했지만, 동료라고 여기는 이에겐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지금으로선 다소 시대착오적인 원칙의 소유자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동료의 죽음에 합당한 예를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은 계속 남았다. 때마침 <대학신문>에 기고할 기회가 있었고, 내게 주어진 지면을 통해 선배를 공적으로 추모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을 일이었다. 당시 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그리고 선배의 때이른 죽음에도 일조한 '대학원생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분노 또한 함께 눌러담아 글을 썼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56). 글에 대한 평가와 호오는 읽는 이마다 갈리겠지만, 나로선 매 문장에 아주 많은 상념과 감정이 담겨 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도 읽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썼고 그 예상은 심각하게 틀렸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내 글을 읽고 반응했다(2년이 지난 지금에도 누군가 이 글을 링크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다). 개인적으로 의미있게 간직한 기억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어떤 분께서 이 글을 읽고 승욱 선배의 사망년도를 저자 데이터에 반영하겠다고 연락해온 일이다. 그리고 이어서 내 인생의 궤적을 바꿔놓은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3.
2014년 여름 대학원생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에서 내게 실태조사 및 제도개선안 보고서 작성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죽은 동료와 사라진 모임을 기념할 기회였고, 무엇보다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생활비에 보태 쓸 수 있는 인건비가 몇 달 동안 받을 기회였다. 그래서 1년 뒤 <201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제도개선 조사보고서>가 나왔다(http://hrc.snu.ac.kr/board/academic_material/view/25 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2015년 초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전문위원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활동부담을 최소한만 지고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구두조건 하에 "고등교육전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새로 만들어서 들어갔다(지금은 한 학기만 더 하고 좋은 후임자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탈출...아니 임기를 마치는 게 목표다). 2015년 여름엔 국가인권위에서 대학원생 인권 관련 보고서 작성을 위촉받은 연구팀에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나는 당시 2학기 생활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그 많지 않은 인건비가 절실했다)--이 결과물은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로 발간되었다(http://www.humanrights.go.kr/common/board/fildn_new.jsp?fn=in_BB2015120316213282418001.pdf).
조사보고서 작성 못지 않게 중요한 활동은 대학원 관련 문제를 정책화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2016년 초에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 주관 청년정책연석회의에서 대학원생 인권/연구환경 개선 관련해 정책발제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이때 발표자료집은 https://drive.google.com/open?id=0B_Ax-_xoHoEVdHczV2hTNkFRc1U 참조), 이 연장선에서 2016 총선청년네트워크에 대학원생 관련 정책을 실을 수 있었다(카드뉴스 파일은 https://drive.google.com/open?id=0B_Ax-_xoHoEVdEtPejJtZGw3MjQ 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7월 초에는 국가인권위 보고서 후속작업으로 대학원생 권리지침 표준안 작업을 위한 간담회에 대학원생 대표 겸 권리지침 초안 작성참여자로 참가했다. 만약 일정이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면(현재 학교 분위기 상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하반기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권리장전 준비테이블에 들어가게 된다.
박사과정 코스웍, 조교일, 내 공부 모두 정신없는데 위의 일들까지 하려니 지난 1년 간, 특히 직전 반년은 정말 몸이 힘들었다. 힘든 와중에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를 자문해 보았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는 놀랍게도 아직 대학원생 기본권/연구환경 관련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관련 테이블을 가 보면 주로 법학 전공 교수들이 아마도 인권/기본권을 다룬다는 이유로 인해 전문가로 초청받아 앉아있다). 아무도 없으니까 하던 사람이 계속 일을 제의받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육학과 수업은 들어본 적조차 없는 내가 반은 의무감에, 반은 돈이 필요해서 일을 맡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 주제에 관해 전문가 비슷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교육사회학, 교육정책학 전공자들을 포함해 제대로 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등장하면 나 같은 포지션은 과거의 유물이 될 것이다. 나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그래서 지금처럼 우연히 이 일에 휘말리게 된 사람이 강제로 전문가가 되어버리는 마법의 계절이 하루 빨리 지나가기를 희망한다.
4.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선배의 급작스런 죽음이 있었다(다른 몇 건의 케이스도 있지만 그건 언젠가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죽기 전 가족과의 통화에서 "공부는 재밌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건강검진을 하루라도 먼저 받을 수 있었다면, 프로젝트 때문에 과로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에 머리를 싸안고 있었다면, 가끔 6동에서 마주쳐 간단히 안부를 묻고 "다음에 봐요!"라고 답하며 지나가는 사이로 남았다면, 어느 여름날 지인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현대사에 대한 별 기묘하고 시시콜콜한 사실들까지 재밌게 설명해줄 수 있었다면, 나는 2년 간--혹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아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갖가지 보고서와 발표에 허덕거리며 지내지 않아도 됐을 거고(대신 다른 알바를 찾느라 고생 좀 했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폭염 속에 당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선배는 당신의 봉안 옆에서 주의깊게 살펴봐야 알 수 있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고, 나는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 지금까지 2년 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고자 여기에 와 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는다면 조금은 놀라고, 기뻐하고, 어쩌면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칭찬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2년 전 그날 선배가 의식을 잃어가면서 나를 떠올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위에 길게 나열한 일들을 하면서 선배를, 그리고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몇몇 이들을 잊어본 적이 없다--그럴 수 없었다. 당신이 살아 있다면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어떤 채무를 나는 떠안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수십 년이 넘도록 그걸 어떤 식으로든 갚으려 노력하면서 지낼 거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젠장.
모두가 침묵한 채 고인의 사진을 보고 있던 몇 분 동안 나는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을 조용히 전했다. 언젠가 다음 번에 선배를 만나러 올 때는 이런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세상 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 마십쇼"라는 말만 던져놓고 떠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래서 이 자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의례적인 자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영락원을 떠날 때는 2시가 넘었다. 1층의 제사장소에는 아기들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차 시트는 불과 30여분 동안 한껏 달궈져 있었고 뒷좌석에 앉으려던 이는 "앗 뜨거"하고 비명을 질렀다. 온통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건너편 어딘가에서 닭 울음 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성심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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