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리뷰.

Reading 2016. 6. 24. 05:05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önen). 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2016(2015). 12000원.

<아름다움의 구원>의 주된 유용함으로 두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 이 책을 주 레퍼런스로 인용하는 사람이 서구 미학 전통에 대해 충분한 독서를 쌓은 사람이 아님을 알려준다. 둘째,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는데 3,40분 정도면 충분한 책이므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분노와 아쉬움이 크게 들지 않는다(책값은 조금 아까울 수 있는데, 나는 선물 받았기 때문에 그 점은 해당되지 않았다). 책 후면의 광고문구를 살짝 바꾸어 말하자면 "한병철의 최신작인 이 책은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권장할 가치가" 없다.

첫 문단을 냉소적이고 심술궂게 쓰게 된 근거를 말하겠다. <아름다움의 구원>은 기본적으로 <피로사회>를 비롯한 한병철의 다른 저작들에서 제시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책이다. 즉 주체에게는 타자성과의 대면이 필요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신자유주의"란 표현을 남발하지 않지만) 현대사회는 긍정성의 강요를 통해 주체를 자폐적 내면에 가두고 있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말이다. 타자성과의 대면을 윤리적 당위로 설정하는 점은 포스트모던 계열의 이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이야기고, 현대사회의 독아론적 요소를 지적하는 것 또한 지난 세기에 덜 흔하지 않았던 흐름이다. 물론 한병철이 약 30년 전쯤의 이론가들과 다른 점은 세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다. 첫째, 과거의 이론가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쏟아부었던 지적 노력이 한병철의 텍스트에서는 대체로 생략된 채 당연한 결론으로 주어져 있다. 둘째, 한병철이 참조하는 동시대 자료의 범위는 물론 또한 그 분석에 들이는 노력도 현저히 적다. 셋째, 한병철은 가끔가다 포스트모던 이론을 비난조로 인용함으로써 자기차별화를 꾀한다.

이러한 성격은 기본적으로 미학의 문제를 다루는 이번 책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병철은 위의 작업을 미학 저작들, 특히 헤겔 및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독일의 변증법적 미학 전통을 인용하면서 되풀이 한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그가 미학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철학자"에게 기대할 법한 진지한 독서가 결여된 단순인용 및 되풀이에 가까우며, 그것도 원 텍스트의 메시지를 매우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자신이 다루는 텍스트,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논의를 일종의 3분 레토르트 요리로 만든다. 그가 진정한 미학의 요건으로 꼽는 건 한 단어로 말해 주체의 자족적 성격을 깨트릴 "부정성"(negativity)의 제시인데, 그는 부정성의 미학이 현대사회의 주체를 깨우쳐줄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언명에서 단 한 발자국도 사유를 전진시키지 않은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솔직히 이 책에 고유한 사고 혹은 적어도 그에 도달하기 위한 고투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비슷한 두 번째 문제점으로, 그는 현대사회에서 몇몇 사례--라고 해봐야 예술작품 몇 개와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 정도지만--를 든 뒤 그것을 자신의 원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는 예시라고 어떤 주의깊은 분석도 없이 결론을 내린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한병철의 사유방식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표현을 이미 지니고 있다--"답정너"라는 단어 말이다. 그가 자신이 요구하는 것처럼 대상의 타자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단 5분도 생각하지 않은 채 대상을 자신의 논리에 끼워맞추는 '주체의 폭력'을 이런 식으로 실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동시대를 이해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구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현대사회는 "매끄러움"이란 말로 대변되는--물론 여기엔 진지하게 씹어볼 고찰따위는 없다--주체의 긍정성/내면성에 몰두하는 곳으로, 부정성을 통해 주체가 자신을 넘어 타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결과적으로 어떤 영원성을 산출하는 (신화화된) 미학이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학 이론>을 포함해 아도르노의 미학적 저술들을 접해본 독자에게 한병철의 주장은 냉정히 말해 아도르노의 매우 열화된 혹은 클리셰화된 복제품에 불과하다--아도르노는 그가 가장 미학에 의지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조차도 이렇게 순진한 결론을 내리기를 거부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끔찍하게 생각한 근대사회를 이렇게 쉽게 부인하고 치워질 수 있으리라 믿지도 않았다(한국에서는 잘 강조되지 않지만, 그는 전후 독일사회학계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미학에서든, 그것과 긴장관계에 놓인 이 사회의 합리화/계몽과정에 있어서든 한병철의 주장은 심지어 제대로 된 역사적 시선도 결여한 너무나 단순한 수준이라 지적으로 지루하다(그는 결국 마지막에 고대 그리스와 하이데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역시 단순 인용수준을 넘는 고유한 사고의 흔적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좀 더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자. 진지한 독서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다행히 미학과 관련해서 훨씬 쓸모 있는 책들을 괜찮은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다. 독일 근대 미학사에 관해서는 카이 함머마이스터의 <독일 미학 전통>이 있으며, 아도르노의 저작 중 <미학강의1>은 한병철의 모든 저작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숙고할 대목이 많다(<미학이론>은 매우 까다로울 뿐더러 괜찮은 한국어 번역본을 추천하기 어렵다). (근)현대 비판론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가 있다면, 차라리 18세기의 루소가 보다 평이한 언어로 쓰였으나 훨씬 숙고할 지점을 많이 제공하는, 그리고 이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친 저작들을 남겼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루소 번역은 대체로 괜찮으며, 최근에 책세상에서 전집이 출간 중이다). 20세기 후반 이후부터의 현대사회의 경우 차라리 각 분야에서 좀 더 디테일하게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 "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로 퉁치는 것보다 현실인식에 도움이 된다.

당초 30분 정도에 끝날 것 같았던 리뷰를 쓰는데 1시간 가까이 걸렸다는 사실이 가장 아까운 일이다.

이하는 페이스북에서 다른 분과 댓글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의 입장을 보충한 내용.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저는 인문학 분야의 지식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작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고, 본래 난해한 개념이 대중화되면서 어느 정도 깎여나가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난해함의 순수성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은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쫓는 사람에겐 불필요한 요소고, "철학적 사고의 단순화" 또한 사유의 전파과정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입니다. 단지 제가 짜증난 점은 한병철의 책은 그런 기준에 맞춰봐도 심각하게 별로라는 데 있는 거죠. 뛰어난 대중저술가들은 이것보다 넓은 범위를 훨씬 효율적으로 정리하며 추가적으로 사고의 고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여지까지 마련해 줍니다(제가 영미권의 텍스트에 익숙해져 있는만큼 그러한 필자들이 존재한다는 걸 좀 더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반면 <아름다움의 구원>은 솔직히 말해 대학원생 석사레벨의 노트 정리랑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문장을 좀 더 예쁘게 쓰는 대학원생이라고는 할 수 있겠네요. 요약하면, 저는 이 책이 미학적 사고의 복잡함을 충분히 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걸 재가공하는 작업에도 기준 이하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의 편집자라면 현재의 책 상태를 초고 정도로 간주하고 추가로 자료를 보충할 것, 그리고 전체적으로 한 번 갈아엎기를 요구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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