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 <곡성>
Reading 2016. 5. 15. 06:24나홍진이 감독한 <곡성>(哭聲, _The Wailing_, 2016)을 보았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2010년대 한국의 '웰메이드' 상업영화의 테크닉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이것이 상업적인 고려의 영향인지 혹은 <추격자>에서부터 일관된 감독 자신의 성향인지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2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쉴틈을 주지 않고 감상자를 자극한다. 일광(황정민 분)의 굿판을 포함해 매우 잘 만들어진 시청각적 스펙타클이 몇 군데 있고,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코믹한 장면을 포함해 많은 관객들이 별 어려움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주도면밀하게 배치되어 있다--언제부터인가 진부한 카피가 된 "천만관객" 영화에 <곡성>이 합류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홍진이 <베테랑>이나 <국제시장>의 길에 합류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곡성>은 의도적으로 해석의 모호함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고, 갖가지 관습이나 클리셰에 전혀 익숙하지 않으며 '어쨌든 마지막에는 안심하고 납득할 수 있는' 플롯을 원하는 관객들이라면 단지 공포와 불쾌감만을 느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감상자라면 자신이 받은 압도적인 인상을 그처럼 단순한 호오의 감정으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독의 말처럼 <곡성>이 "정통 상업영화"라면(http://m.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60512145729884), 이 "상업영화"는 우리가 상업영화가 다루는 영역이라고 믿어온 경계선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넘어가 버린다.
<곡성> 자체가 단 한 번의 감상만으로 명쾌한 해석을 제출하기 좋은 영화는 아니며 거기에 더해 나는 아직도 <황해>를 보지 못했기에--그리고 일정상 한동안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스스로가 그다지 신뢰할 만한 해석을 내놓을 입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먼저 갓 5월 15일이 된 시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문건들을 몇 개 골라보자. 먼저 나무위키 "곡성(영화)" 문서의 감독과의 대화 항목의 토크 영상 및 요약본(다만 요약본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물음이 누락되어 있다)은 몇 가지 불분명한 지점을 해소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며(https://namu.wiki/w/곡성(영화)#s-7), <씨네21> 2016년 신년 대담도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2602)--물론 작가가 아닌 작품을 믿으라는 로렌스의 말을 잊지 말아야겠지만. 리뷰 중에서는 이동진(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36183)과 듀나(http://www.djuna.kr/xe/review/12983122)를 참고할 수 있는데, 내 취향에는 가슴벅찬 관객의 열정으로 가득차 다소 성급하게 형이상학적 교훈에 도달하는 전자보다는 짧고 건조한 투로 말하는 후자가 좀 더 많은 시사점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링크한 글들이 대체로 입을 모아 강조하는 <곡성>의 두 가지 특징은 1) 오컬트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 관습을 수합해 활용하는--그만큼 플롯도 분산되는--장르 영화면서(당장 기독교-엑소시즘, 무속, 일본 풍의 주술, 좀비영화 등을 어려움 없이 꼽을 수 있다), 2) 그것들 모두를 불확실성의 지평 안에 배치한다--마지막에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거의 관객에게 던지듯 제공함에도 불구하고(어쩌면 사실 이것들이야말로 '미끼'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기도 한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문제의식의 영향력은 감소하지 않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곡성>의 플롯이 완결된 인과관계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명백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강조해서 보는 감상자라면 이창동의 <밀양>을 비교대상으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요컨대 <곡성>은 수많은 장르/플롯을 나열한 뒤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다소 뒤틀린) 기독교적 물음, 즉 믿음/의심 사이의 선택으로 압축한다. 중간에 펼쳐진 모든 요소들을 조금 억지로나마 묶어줄 마스터플롯으로 누가복음의 인용구와 '악마'의 손에 난 못자국을 통해 수미상관적으로 배치된 성경 전통을 채택한 것은 분명 효과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곡성>이 정말로 흥미로운 까닭은, 위의 글들에서 충분히 강조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들을 현대 한국의 어떤 곳이라는 특정한 맥락에 넣고 뒤틀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나홍진이 직접 말했듯 <곡성>이 "가족영화"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가족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채택하지만 점차적으로 가족구성원들이 배제되고 결국 가톨릭 사제들의 신앙이 강조되는 <엑소시스트>와 비교한다면 <곡성>에서 서사의 핵심이 시종일관 가족에 놓여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때 가족을 단지 보편적인 모티프로 파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는데, 이 작품은 딸 효진(김환희 분)을 구하려는 아버지 종구(곽도원 분)의 필사적인 의지, 즉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의무를 근본적인 동력으로 삼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한국의 가족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한국의 가족 개념 자체에 가장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범죄와의 전쟁>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한국대중영화에서 부모-자식의 수직적 관계에 초점을 둔 가족주의는 계속해서 재생산 되어 왔으며 <곡성>도 그러한 관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물론 <곡성>은 <국제시장>이 아니며, 전자의 가족주의는 후자에 비해 좀 더 복잡한 질문을 제기한다(적어도 종구는 딸에게 성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아버지다). 윤제균의 영화에서 부모는 국가 창건 및 발전의 주역이었으며, 그렇게 성장하는 국가는 동시에 가족이 번영하고 재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 경찰들에게 불편함을 불러일으킨 <추격자>의 감독이기도 한 나홍진이 묘사하는 곡성군에서 종구 자신이 속한 국가적 체계, 즉 경찰은 그에게 거의 초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행동범위를 허용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능을 하지 않으며, 그나마 그러한 행위들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종구의 경찰 신분이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영화에서 거의 의식적으로 배제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희미해진다는 사실은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다른 주요한 '공식적인' 체계들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곳처럼 그려지는 지역병원은 물론이고, 아마도 퇴마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공인된 절차를 지닌 거의 유일한 조직인 가톨릭 교단의 신부는 종구의 말을 아예 무시한다. 악령과 죽음이 떠도는 곡성군에는 국가의 권위만이 아니라 영적인 권위 또한 부재한다(이런 점에서 현대 한국에서 세속화와 정치신학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한국사회는 한편으로 분명 강력한 국가숭배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거의 철저할 정도로 세속화된 태도가 모든 주요한 종교를 집어삼키는 곳이기도 하다; <곡성>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포함해 관객의 합리주의적 태도 자체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플롯의 덫을 설계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믿음과 의심이라는 기독교적 모티프가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둘러싸고 복음서가 제시하는 교훈의 핵심은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곡성> 결말부의 물음은 이와 달리 일광과 무명(천우희 분) 중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형태로 제시되어 있으며(당연하지만 양자 모두 믿지 않는 세 번째 선택지도 있다--종구가 닭이 세 번째로 울기 전에 집으로 들어갈 때, 그가 일광을 '적극적으로' 믿었다고 해석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둘 중 어느 누구를 믿어야 할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는 주어지지 않는다. "믿느냐"는 물음의 기저에 내가 결코 파악할 수 없는 타자에 나를 맡기는 도약이 있다면, "누구를"이라는 물음은 믿음의 대상을 가려내어야 하는 선택 주체에게 훨씬 큰 하중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믿느냐"는 물음 자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꾼다. 동굴에서 일본인(쿠니무라 준 분)와 대면하는 가톨릭 부제 양이삼(김도윤 분)의 경우에도 자신의 앞에 앉은 이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거나, 악마거나, 구세주일 수 있다는 세 가지 선택지와 마주하기에 "믿느냐 의심하느냐"란 주제는 마찬가지로 뒤틀린다. 현혹되지 말라면, 도대체 무엇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인가? 다시 말해 <곡성>의 결말부가 제시하는 것은 결코 고전적인 신학적 주제가 아니며, 오히려 영화는 그것을 변형된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이 세계의 혼돈 자체를 강조한다. 악과 파멸은 확실하나 구원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곡성>은 오로지 적그리스도만 강림한,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여부는 알 수 없는 가장 끔찍한 종말론적 비전을 재현한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한국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가족-재난영화'라는 한국대중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범주를 적용해보는 것이다. 거대한 재난 앞에 공적 체계의 무력함이 드러나고 가족은 위기에 처하는--당장 2006년의 <괴물>부터 2012년의 <연가시>까지 떠올릴 수 있다--일반적인 패턴은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한국의 통상적인 가족-재난 영화가 통상적으로 재난 극복을 통해 공적 체계의 정상화와 가정의 회복이라는 판타지로 관객들을 인도한다면, 국가도, 교회도, 성당도, 무속도, 모든 것들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곡성>의 세계에서 한국인들의 마지막 신앙이라 부를 수 있는 가족 또한 예외는 아니다. "아빠가 다 해결할게"라는 미약한 웅얼거림으로 끝나는 종구의 부성애는 그것이 강조되는만큼 역설적으로 흐릿해진다. 모친과 외조모를 살해하는 효진을 포함해 가족 살해가 반복된다는 점에서--결말부 직전 종구의 파트너 오성복(손강국 분) 또한 자신의 모친을 살해한다--이 영화는 가족-재난 영화의 틀을 가져오되 그 기초부터 무너트리는 셈이다. <곡성>은 <범죄와의 전쟁>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가족신앙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듀나가 지적한 "아재스러움" 또한 토대 없는 어둠 속에서 점차 잠겨들어간다. 이 영화가 신학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할 때, 이 영화가 설정한 신학의 대상이 과연 어디까지인지는 한번쯤 곱씹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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