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베커, 푸코, 인적자본, 그리고 자유

Reading 2016.03.11 14:53
게리 베커, 프랑수아 에발드, 버나드 하코트. "게리 베커와 자본주의 정신". 강동호 역. <문학과사회> 27.3(2014): 401-39.
Trans. of "'Becker on Ewald on Foucault on Becker': American Neoliberalism and Michel Foucault's 1979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2012.

영어로 된 원문은 <http://chicagounbound.uchicago.edu/cgi/viewcontent.cgi?article=1076&context=law_and_economics> 에서 다운로드 가능. 인용한 대목은 모두 베커의 말. 내 코멘트는 맨 아래에 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인적 자본 이론은 인간을 경제의 중심부로 위치시킵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기계, 물적 자본, 토지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추상적인 수준의 노동력을 중심부에 둡니다. 그러나 인적 자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토지는 근대 경제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물리적인 자본은 분명 중요해.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형태의 자본은 인간이야. 그리고 인간이 단순히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정부가 인간에 대해, 그리고 부모가 인간에 대해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우리는 투자라고 부르지.” 경제를 혹은 경제 성장을 생각하는 과정에서인간을 그 핵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놀라운 점이지요. 인간은 경제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이 문제를 더 논하기 전에, 맬서스의 인구 이론을 생각해봅시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는 정말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맬서스적인 부정적인 정책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인구 증가를 멈추게 하려 했고, 그와 관련된 매우 조악한 법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인적 자본분석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인적 자본 이론은 이렇게 말하지요. “아니야. 인간이 중요해.” 물론 동질의 인간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공공 정책은 사람에 따라 다른 종류의 투자들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하지요. 그런데 몇몇의 이러한 선택은 제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고 푸코가 좋아할 만한 것입니다. 예컨대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 이론의 기본적인 함의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투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작업들에서 이러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강조했지요.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쉽게 감옥에 보내도 안 됩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마약법을 어기고 감옥에 갇힙니다. 자유주의자로서 저는 그러한 현상에 반대합니다. 우리가 마약법을 없애게 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투옥들, 특히 소수 인종에 집중된 투옥을 없앨 수 있습니다. 제 눈에 범죄자를 수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저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혹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저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미국의 자유주의를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저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적 자본 이론은 그러한 자유주의 전통의 저변을 확장시켜주지요.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중요시한다는 것은 부유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투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421-23)

"하지만 인적 자본 이론과 우생학 사이에는 확실히 근본적인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인적 자본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자유주의(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전통적인, 유럽적인 자유주의를 가리킵니다) 안에서의 인적 자본 이론에는 우생학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인 관점은 개인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은 단순히 국가의 도구가 아닙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제가 선호하는 일은 개개인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이것저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일을 가능한 피하는 것만큼요." (430)

"[프랑수아 에발드의 '인적자본이론은 인간을 조악한 행동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에 답하며] 저는 인적 자본을 정확히 반대의 일을 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경제학의 전통적인 이론을 보면 당신이 말한 내용들이 분명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선호라는 것이 있고 바로 그 선호에 반응함으로써 어떤 결과들을 얻게 된다는 식이지요. 인적 자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 개발 이론의 한 부분을 이루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특정한 방식으로 프로그램화되어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고, 또 그래서 법으로 이리저리 지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개발시킬 수 있어요. 물론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의 기능, 통치성[*원문은 "a function of the environment they’re in, the governmental and other environments", 그러니까 "정부 및 다른 환경을 포함해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의 기능"으로 번역되는 게 맞다; 이 대담에서 베커는 "통치성"governmentality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역자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의역한 듯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래서 인간은 그 자신을 개발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 부족하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더 풍부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인적 자본 이론은 소비자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알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소비라는 선택 행위를 넘어서는 것, 이를 테면 교육이나, 정부 법에 대해 어떻게 달리 반응하는지, 어떻게 나쁜 법을 피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이지요. 이게 푸코가 소비 이론이 흥미롭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맞아요. 만약 인간이 특정한 확실성 아래에 있다면, 인간 행위에 대한 결정론적인 측면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주 넓은 스펙트럼에서 인간은 다양한 선택의 항을 가지고 있어요. 인적 자본 이론이 발전하기 전에 그것은 경제학적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이 상관할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인적 자본 이론은 인간에게 허용된 선택의 항을 넓혀준 겁니다. 좁힌 게 아니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경제학적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 푸코도 그걸 따르고 있는데요, 그 비판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확실한 선호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선호에 따라 행동하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맞아요, 그건 일종의 캐리커처입니다. 허구죠. 그러나 제 생각에는 나쁜 허구입니다. 인적 자본이라는 관점에 의해 행해진 변화는 바로 그것이 나쁜 허구라는 것을 알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보다 더 복잡해요. 인간은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바깥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쓰고 그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전혀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인적 자본 이론은 우리의 관점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확장시켜주는 것입니다.
[...]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실업에 처하거나, 낮은 임금을 받게 되고, 건강하지 못하게 되며, 결혼을 하기 힘들게 될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죠. 그것이 인적 자본 이론이 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적 자본 이론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당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부 등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이론입니다. 우리는 인간 개인을(그들이 하는 행동을) 다른 어떤 존재들의 도구로 간주하는 대신 중심에 위치시킵니다. 인간 개인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개인과 다른 것들 혹은 권력 관계와의 상호 작용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지요. 그래서 저는 인적 자본 이론이 인간을 비하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436-39.)

이하 나의 코멘트.

최근 반짝 인기를 끌고 있는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지지자였는가?"라는 논쟁의 참여자들 중에서 "베커가 푸코의 작업에 매우 긍정적으로 코멘트했다"는 사실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려는 유혹에 휩싸이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실제로 푸코에 대해서는 딱히 유효한 코멘트가 나오지 않는 대담이다. 그러나 내게 흥미로운 지점은 오히려 베커가 자신의 작업을 (그것이 우파정치에서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떠나)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몇몇 대목들이다.

첫째, 주체와 역량의 문제다. 벌린 식의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에서는 비교적 축소되는 지점이지만, 근세의 고전문예부흥과정에서 "자유"(libertas)의 핵심적 의미 중 하나는 자율성, 즉 바깥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보유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개인(시민), 가정, 도시국가, 국가를 포함해 각각의 자유로운 주체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고 보유하고 강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키아벨리의 덕/비르투(virtu)에서 바로 예를 찾을 수 있는 이러한 주제는 서구 근대의 인간학에서 유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교양교육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완성'은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한 구성물이다. 실제로 한국어로도 읽을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에서--스피노자, 로크,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만 아니라 덕성virtue의 문제를 다룬 수많은 대중소설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19세기의 조지 엘리엇--이 주제는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베커가 자신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 개념을 설명하며 개인을 욕망 혹은 이를 대체하는 이해관계의 계산주체로 '평면화' 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관점과는 달리 인간의 역량 강화(empower)라는 요소를 주요한 강조점으로 놓을 때, 나는 이것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역량을 축적하여 발전해나가는 '덕/역량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과 부분적으로 갖는 유사성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소 모험적으로 베커와 같은 문제의식이 1970-80년대 서구의 좌우파 정치담론에서 공통적으로 출현했음을 덧붙이고 싶다. 요컨대 19세기 이래 점차 지배적인 것이 되어 간 특정한 형태의 자유주의 담론에 대한 반발로 자유의 개념에 대한 다른 전통을 참고하고 구축하려는 시도 말이다.

이때 이들의 비판대상이 된 '자유주의'를 정의할 때, 푸코적인 시선을 취한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입장을 간추리는 게 편리하다. 그의 수많은 저술들 중 하나만 꼽는 게 허용된다면, <판옵티콘>에서 우리는 두 가지 명제를 끌어낼 수 있다. 하나, 모든 인간은 효용을 추구하며 추구해야만 하는 존재로, 인간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 둘, 인간이 최대한의 효용을 끌어낼 수 있는 환경의 배치가 가능하다. 첫번째로부터 사회를 '합리적 이해관계의 주체'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나온다면, 두 번째는 그 주체들의 합리적 이해추구를 증진/자극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통치자=경영자'의 존재를 함축한다. 요컨대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자유는 (대체로 자유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익추구의 자유로 급격히 축소되며, 이익추구의 자유는 암묵적으로 정부와 같은 초월적 판단주체의 통치 하에 놓인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이야말로 벤담의 사고가 가진 탁월함으로, 이러한 논리의 영향력은 이것이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이들과 명백히 적대적이었던 20세기 중후반의 사회주의자들에게서까지도 드러난다는 점에서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권력 및 주체화 과정에 대한 푸코의 70년대 이후 작업은 대체로 '자유주의'의 이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의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작업이 개인에 대한 '합리화한' 통치 테크닉의 형성과 발전을 다루었고, 그 끝이 '국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었다면, 80년대부터의 주체화 과정에 대한 탐구는 평면화된 이해관계의 주체가 아닌 스스로 역량을 생성과 축적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다--그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근대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고대를 재수용한) 근대에 부분적인 형태로 남아있는 자율적인 주체, 덕/역량의 주체의 자기형성 테크닉에 대한 추적으로 읽힐 수 있다(내가 들뢰즈의 작업을 거의 모른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 성격은 다를지언정 들뢰즈의 정치철학적 작업 역시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적' 통치를 비판하고 역량의 주체를 복권시키는 흐름에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푸코가 베커의 인적 자본 개념을 포함해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작업에 흥미를 가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자신과 매우 다른 지적 맥락에서 나타난 사유가 자신과 비판대상을 공유하는, 그리하여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쪽이야말로 이상하다.

직접적으로 20세기를 (아직은) 다루지 않는 내가 현재로서 이 즉흥적인 노트에 더 이상 유의미한 진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푸코와 신자유주의라는 주제는 결국 다음과 같은 선결문제들을 요구한다. 첫째, "전후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예컨대 롤즈는 어떤 맥락에서 태어났는가)? 둘째, 이들은, 이들의 시대는 "전후 자유주의"의 핵심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셋째, '신자유주의' 혹은 인적자본론이 어떠한 지적 자원으로부터 태어났으며 그것을 어떻게 변형했는가? 얼마 전까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주체" 같은 말들이 유행할 때, 80년대 푸코를 다루는 자리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는 반문 중 하나가 바로 푸코의 작업이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주체"와 유사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자였다'는 식의 이야기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이지만(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자"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었나?), 이러한 반문은 푸코가 무엇인가를 묻기 이전에 신자유주의의 인간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여지를 주는 한에서 나름의 쓸모를 지닌다. 요컨대, 나는 특히 좌파의 연구자들이 과연 신자유주의를 얼마나,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질문을 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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