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 <달이 속삭이는 이야기>

Reading 2016. 1. 18. 03:16
레진 코믹스에서 가장 좋은 만화 중 하나인 <여자 제갈량>을 연재 중인 김달의 단편선 <달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보았다(연재일은 2014. 08.15~2015. 03. 06, 링크는 http://honeynpie.com/product/70). 프롤로그와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2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모두 매우 짤막한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구조는 대체로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기보다는 독특한 반전 등을 통해 어떤 낯설음의 정서를 이끌어 내기 위해 특화되어 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에 수용되었던 미국의 단편소설들을 따라 읽어본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판타지나 SF 같은 경우) 김달의 단편들에 깃든 기이함의 색채가 어떤 정신적 배경에서 기인하는지 대략의 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런 전통에서 의도적으로 "빈 공간"을 창출하는 방식,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자의식을 보여주는 인물들, 이야기의 긴장이 농축되었을 때 툭 덮어버리듯 정리해버리면서 짧은 코멘트를 덧붙여 쌉싸름한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결말부의 처리 등은 <이야기>가 어떠한 관습에 입각하여 서사적 구조를 형성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달이 영향받은 전통은 그것뿐만이 아닌데, 예를 들어 진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와중 급작스럽게 그림체를 바꾸면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넣어주는 방식은 현대 일본만화가 "일상"을 다루는 태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김달의 로맨스 구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딘가 허술하지만 선량하고 이해심 많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안길 수 있는' 남성 인물은 일본만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유형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야기>와 <여자 제갈량>을 한국의 200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대중서사가 끼친 영향들이 뒤섞인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그리고 그것이 그와 같이 서로 다른 전통에 친연성을 가진 독자들 모두가 이 작품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김달의 작품을 그저 관습적인 모티프들이 뒤섞인 결과물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는 명백한 실수다. 그는 진지한 흐름과 유머러스한 "일상적" 코드를 자연스럽게 뒤섞는 데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이러한 완급조절은 줄거리 작가로서 김달이 가진 최대 강점 중 하나다--, 이러한 전환을 처리하는 감각은 분명 오리지널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깔끔하고 눈에 편안하게 들어오면서도 섬세한 부분을 터치하듯 잡아내어 표현할 수 있지만, 나는 김달의 진짜 강점은 자신의 작품을 그 이야기만으로도 읽을만한 것으로 만드는 '글솜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미국적 전통과 일본적 전통 양자의 독자를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만큼이나 빠른 템포의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나 천천히 음미하는 독서를 선호하는 독자 모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데, 이는 이야기의 완급조절능력과 함께 매우 뛰어난 대사조탁에 기인한다. 그는 분명 언어를 상당히 섬세하게 구사하는 작가다(이런 능력을 갖춘 웹툰작가는 <치즈 인 더 트랩>의 순끼나 <자꾸 생각나>의 송아람처럼 아직 매우 소수에 가깝다).

그러나 내게는 <이야기>보다 <여자 제갈량>이 분명히 더 좋은 작품으로 보인다. 두 작품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왜 김달에게 삼국지가 필요했는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야기>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진 소품들의 모음집인데, 각각의 작품은 환상적인 세계 혹은 아주 추상화된 형태로서의 일상을 배경으로 한다. 20세기 중후반에 집필된 (영미권의) 판타지 단편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대체로 관습적인 문학장치들을 활용한) 특정한 분위기의 형성, 급작스러운 전개 혹은 반전에 따라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끌어올려지는 페이소스, 위트 있는 대사에 기초한 재미 등을 핵심으로 삼기 마련이라는 판단에 직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이 장르는 한 발자국만 잘못가도 뻔한 교훈의 알레고리적 되풀이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그래서 독자로부터 최대한 모호하고 불가해한 감상을 이끌어내는 게 관건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더욱 심층적인 차원에 위치한 무언가를 지시하는 대신 철저하게 표층의 차원에서 작동한다(우리는 소설을 표층의 차원에 국한시키는 것 자체가 이 장르의 포스트모던적인 성격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낯설음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이야기가 그려내는 세계가 실제로는 매우 추상적이고 비좁다는 사실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마치 예전의 PC게임에서 맵의 한계지점까지 가면 밋밋한 CG로 이루어진 벽이 있으며 그저 그것을 바라보다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여자 제갈량>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그것이 엄청난 전통이 축적된 삼국지라는 거대한 서사를 뼈대로 삼고 있으며, 더불어 후한 시대에 대한 역사적 문헌들을 언제든 참고하고 선택하여 끌어올 수 있다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여자 제갈량>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광대한 시공간과 서사를 자원으로 취함으로써 변주와 패러디를 얼마든지 행하면서도 현실감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다. <이야기>의 단편들은 각각 세계를 새로이 만들어내야만 했고 그래서 그 세계들의 빈곤함을 대가로 치렀다면, <여자 제갈량>은 장편답게 그 안에서 세계 자체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이미 대부분의 독자가 익숙해져 있는 정해진 흐름에 기댈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적은 부담을 갖고 이야기의 완급조절을 행할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해도 된다면, <여자 제갈량>은 삼국지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단편 환상문학 전통이나 일본만화의 일상물에서 끌어오기 힘든 크고 넓은 시공간에서 굵고 힘있는 줄거리를 일관성있게 전개하는 장점을 추가로 끌어올 수 있었다. 4컷 만화에 가까운 형식에 기초해 삼국지를 그린다는 기본구상 자체가 김달의 기획이 본래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전통들을 혼합하는 데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작가 본인의 역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에서 단 한 대목은 쉽게 잊어버릴 수 없으며, 오히려 이 대목을 통해 작가로서의 김달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야기>의 에필로그에서(http://honeynpie.com/product/contents/70/view/3744) 김달은 흥미롭게도 "나는 왜 쓰는/그리는가"를 질문한다. 이것은 모든 글쟁이들이 언젠가는 마주하는 질문이지만, 의외로 이것을 진지하게 질문하거나 이에 대한 답변을 타인에게 보여줄 만큼 숙고하는 사람은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드물다. 조지 오웰을, 스티븐 킹을, 크레이그 톰슨을 인용한 뒤 김달은 자신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람은 평생 외롭고 평생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남았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전보다 훨씬 작아졌지요. 결국 전 평생 만화를 그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개인적인 코멘트를 덧붙이는 게 허용된다면, 나는 그에게 좀 더 근본적인 동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것은 쓰지/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이끌림이다. 우리는 분명 고독, 불안, 고통을 쓰기를 통해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에서 계속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어내야만 하는 삶이 있다. 이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의 절박감에 가까운 어떤 동기에 기초한다. 현재로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서, 나는 김달에게 이러한 동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내 추측이 옳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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