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테일러. <세속화 시대>. 서문 정리.

Reading 2015. 12. 6. 16:28
어젯밤부터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세속화 시대>_A Secular Age_의 22쪽 정도 되는 서문을 읽었다. 세미나 계획을 던져놓긴 했는데 대충 뭘 이야기하려는지 내가 몰라서는 곤란하니까. 아래의 설명을 보고 이 책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이 많아진다면...나로서는 기쁘고 동시에 (겨울방학 때 할 일이 늘어난다는 측면에서) 피곤해질 것이다.

참고로 테일러의 영어는 약간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욕이 나오는 건 아닌 매우 세련된 영어다. 그러나 통상의 "영미권" 저자들과 비교하면 읽으면서 정신적 에너지를 좀 더 많이 투여해야 하는 편인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준적인 영미식 글쓰기가 문단 앞에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명확히 밝히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그래서 표준적인 미국 학적 글쓰기의 장점 중 하나는 문단 앞부분만 쭉쭉 읽어나가면서 몇 페이지의 논의를 정리하며 넘어가도 대략의 요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괜히 헤겔 연구의 대가가 아니랄까봐 뒷부분까지 꼼꼼히 읽어야 요지가 드러나는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테일러는 자신의 논의를 단순하고 선명하게 만드는 대신 연구대상의 복잡함과 다면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저자고--그래서 그의 서술은 의식적인 단순화를 거치지 않고는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이러한 미덕은 대상의 여러 면모를 일일이 짚는, 상당히 느린 속도의 글쓰기로 나타난다. 물론 테일러는 특히 프랑스어권의 저자들과 비교할 때 대상을 형식논리적인 층위로 분해하여 간결하고 명확하게 사고하는 영미권 글쓰기의 오랜 전통 하에 있고, 이러한 훈련이 스스로가 대상에게서 끌어내고자 하는 면의 반대 측면까지도 포괄하고자 하는 세심함과 균형을 이루어 그의 서술이 지나치게 늘어지지 않도록 한다. 한 마디로 테일러를 읽는 것은 나의 입맛에 맞춰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하는 경험보다는 저자의 사유경로를 따라가면서 지적으로 훈련받는 여정에 가깝다.



1장을 시작하며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1500년대 우리 서구사회에서 사실상 신을 믿지 않기란 불가능했던 반면, 오늘날 2000년대에 우리 중 다수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별 문제 없는 정도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란 무엇인가?"(why was it virtually impossible not to believe in God in, say, 1500 in our Western society, while in 2000 many of us find this not only easy, but even inescapable, 25) 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16세기와 신을 믿는 것이 더 어려운 21세기 사이에 있었던 변화를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해명하는 작업이 테일러의 대저 <세속화 시대>의 목표다.


서문에서 테일러는 세속화(secularization), 세속성(secularity)이라 말하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하여 자신이 어떠한 논의를 전개하려는지 간략하지만 명확한 언어로 밝힌다. 우선 그는 세속화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 1) 정치와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신앙/신과 같은 개념이 사라지는 것, 2) 예를 들어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종교적 신앙과 실천이 쇠퇴한 것, 3)신앙의 조건(the condition of belief)의 변화, 즉 신앙이 각자가 취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내 나름대로 비교의 예를 든다면, 오늘날 우리는, 심지어 난민조차도, 국가없는 삶을 각자의 자유에 따른 선택지로 간주하기 거의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도덕적, 영적 혹은 종교적 경험 및 탐색"(our moral, spiritual or religious experience and search, 3)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당연히 테일러의 초점은 3번째 항으로서의 세속화에 맞춰져 있다.

다만 세속화 과정을 단순히 종교적 세계관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뀌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첨언하자면, 니스벳이 지적했듯[<보수주의>], 우리는 계몽기에 프리스틀리처럼 충실한 신앙과 과학적 사고를 동시에 견지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던 사례들을 수없이 꼽을 수 있다). 종교적/영적/도덕적 경험의 변화과정에서 테일러가 핵심적으로 꼽는 것은 바로 "충만감"(the sense of fullness, 5)의 경험이 변모한 것이다. 이때 충만감이란 자신의 삶이 보다 큰 맥락에 속하면서 보다 완전하고, 풍성하고, 깊고, 가치있고, 그래야 할 것에 더 가까워졌다고(more what it should be) 느끼는 경험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충만함 속에 살아간다고 믿을 수도, 거기에 더 이상 가 닿을 수 없다고 판단할수도, 혹은 (소명vocation 등을 통해) 그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테일러는 오로지 신앙만이 이러한 충만감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충만함의 경험에 대한 서로 다른 종류의 이해방식들이 출현한 사실이야말로 근대 세속화의 중요한 특징이다(우리는 테일러의 전작을 빗대어 이 책을 <충만함의 근원들>_Sources of Fullness_라고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앙인들이 자신 바깥의 초월적인 무언가로부터 충만함의 경험을 받는(receive)다면, (애초에 그러한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회의주의자들을 제외하고--테일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이러한 사례로 꼽는다) 스스로의 이성에 합치함으로써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칸트나, 오로지 이성의 비판적인 기능을 통해 맹목적인 편견 및 본능을 극복하고 참된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본성/자연(Nature)에 귀기울임으로써 충만한 삶에 접근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낭만주의자들과 같은 입장까지 비신앙인 중에서도 충만감에 대한 믿음과 지향을 견지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오히려 신앙과 불신앙을 구별하는 진정한 초점은 충만감에 대한 사유가 어떠한 '공간적' 이해와 맞닿아 있는가에 있다. 즉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삶/세계를 초월하는(transcendent) 곳에 있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혹은 초월적이지 않은 세계 안의 어떠한 힘(power within)으로부터 근원하는 것, 즉 내재적인(immanent) 것인가?

테일러는 이 초월과 내재의 구분항이 종교(religion)의 변화와 같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리라 주장한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자연을 어떠한 내재적인 질서를 포함한 자기운행적인 체계로 파악하는 이신론과 같은 사유의 출현을 서구 문명의 매우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경우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행복/번영(flourishing)을 넘어서는 목표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번영을 하나의 좋은 것으로 승인한다는 점에서 내적인 긴장이 있다(18). 이와 같은 흐름에서 근대 세속성의 도래과정의 핵심은 "순수하게 자기충족적인 인본주의"(a purely self-sufficient humanism)가 전면화된 사회의 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테일러는 물론 인본주의 자체가 세속성이 아니라 인본주의적 형태의 충만함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의 출현을 세속성의 핵심적인 요소로 지목한다(19). 그러나 (삶의 충만함을 인간적인 세계 안으로 흡수하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세속화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한다. 요컨대 (3번째 의미의) 세속성은 배타적인 인본주의의 가능성과 함께 등장했으며, 이는 '순진한' 종교적 신앙의 시기가 끝나고 여러 다른 형태의 선택지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세속화 시대란 인간의 번영 피안을 향하는 모든 목표가 퇴색해버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때를 뜻한다"(a secular age is one in which the eclipse of all goals beyond human flourishing becomes conceivable).

이때 초월이란 특히 종교와 연관지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일러는 초월의 세 가지 특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아가폐와 같은 사례처럼, 인간적인 번영 너머에 무언가 더욱 뛰어난 선(some good higher, 20)이 존재한다. 2) 더욱 높은 선은 더 높은 힘, 즉 초월적인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가능하다. 3) 우리의 삶이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자연적인 삶을 넘어서, 즉 "지금의 삶"(this life)을 넘어 확장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세속화란 초월을 향한 추구와 지향 혹은 그것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naive acknowledgement, 21) 것이 불가능해지고 배타적인 인본주의가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상황을 가리킨다.

테일러의 목표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서사를 제출하는 것이다. 그는 특유의 겸손함으로 자신의 논의가 서구 또는 북대서양 세계, 혹은 "라틴 기독교"에서 발원한 문명권에만 국한될 것이라 선을 긋는다. 이때 유의할 점은, 그가 자신이 통상적인 근대화의 서사, 즉 근대 문명의 필연적인 발전과정에서 종교와 신앙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해석에는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이다. "서구 근대성은, 그 세속성을 포함해, 새로운 발명들, 새롭게 구축된 자기 이해 및 이와 연관된 실천들의 결과물이다"(Western modernity, including its secularity, is the fruit of new inventions, newly constructed self-understanding and related practices, 22)--그런 점에서 우리는 테일러의 기획이 보다 이전에 집필된 주저 <자아의 근원들>(_Sources of the Self_, 1989)과 함께 근대세계를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시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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