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혹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관해.

Critique 2016. 6. 21. 04:08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85(2016 봄): 83-105. [온라인으로는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6660292 를 참고. Dbpia 이용이 불가능한 분은 논문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mcohj/220742672315 를 참고하라.]



1.


오늘날 지적인 관심사를 가진 젊은 독자들은 문학비평/평론에 별다른 흥미를 기울이지 않는다. 90년대, 아주 관대하게 잡아 2000년대 중반까지 각종 문예지의 평론들이 이 세계의 앎(知)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나름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로부터 10년 뒤인 오늘날 문학비평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촛불이라도 될 수 있다고 믿는 독자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내 생각에는 '문학적 감수성'이 과잉된, 그리고 충분히 넓게 지식을 섭취하지 못한 일부 국문과 학부생 정도가 그 마지막 세대를 구성하게 될 것 같다. SNS와 검색엔진을 조금만 활용하면 넓은 시야와 위트까지 겸비한 필자들의 시의성 있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진짜로 심도 깊은 지식을 추구한다면 차라리 전문분야를 공부하는 게 낫다. '등단'한 사람들을 포함해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지인들조차 "이건 정말 읽어볼 만하다"고 추천해주는 글이 없는 마당에 다른 책 읽는 것도 시간이 없는 내가 뭐하러 일부러 그걸 찾아 읽어야 하나?


그런 점에서 오혜진의 메타비평은 지난 수 년 간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한국비평 중 거의 유일하게 진정으로 흥미로운 글이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왔음이 분명한 폭넓은 지적 관심사, 불필요한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냉정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다루는 대상이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분명한 입장. 이 글은 한국문학/비평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냉소적인 평가를 초과해 모처럼의 지적 자극을 준다. 그러나 현재 몇몇 언론기사나 논평을 통해 소개되는 양상을 보면 이 글은 유감스럽게도 단지 젊은 연구자의 열정적이고 다소 서툰 현 세태 비판 정도로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이 그런 식으로 흘려보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분명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있고, 지금은 바로 그런 시선이 필요한 때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2.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은 상당히 많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비평 특유의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스타일은 특히 이런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글의 내용을 차분하게 이해시키는데 아주 효율적인 방식은 분명 아니다(그리고 오혜진은 종종 독자가 자신이 염두에 두는 맥락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먼저 이 글이 각 절에서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오혜진의 글은 2015년의 신경숙 표절사태 및 문학권력 비판론의 귀환을 언급하며 시작하지만, 실제로 1절은 이 글의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만 기능한다. 본론이 시작되는 2절에서 오혜진은 신경숙 사태를 둘러싼 두 개의 주요 입장, 즉 신경숙 및 "1990년대 문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려는 문학권력 비판론자들("1980년대적")과 이에 대항하여 "문학(장)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신경숙을 옹호하는 창비 측("1990년대적")이 일견 대립하는 구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세계문학·노벨상·영화화 등의 강박을 통한 가부장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상통하며 공모한다"고 주장한다(88). 양자가 공유하는 욕망의 핵심이 바로 "장편대망론"으로, 장편대망론은 "시장주의적 욕망과 경험주의적 환원론에 입각한 586세대의 문학관"으로서 "'사사화된 개인'의 내면성과 여성성을 바탕으로 성립한 1990년대 문학"을 "'현실 경험이 일천한 청년들의 자폐적 형상'만을 다루는 2000년대 문학의 부정적 시원"으로 간주한다(89).


즉 오혜진은 신경숙 사태를 둘러싼 두 입장이 공통적으로 586세대 "개저씨들"의 욕망을 체현한다고 보며, 이것이 90년대-2000년대의 '자폐적인' 여성적 문학 및 '고생도 안해본 20대'의 글쓰기를 타자화한다고 주장한다. 한 줄로 말해, 현재의 한국문학장은 개저씨들이 여성과 청년세대를 폄하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공간이다--주지하다시피 이 구도는 세대론을 핵심으로 하는 헬조선 담론의 세계인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물론 남성적 장편서사를 통해 "문학의 '한류'를 이뤄보겠다는" (언제나 위대한 가부장이고 싶은) 개저씨들의 욕심은 "오늘날의 독자가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허황된 꿈"에 불과한데, "한국문학은 세계시장은커녕 국내에서의 위상조차 '하위문화'로 강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90). 오혜진은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로 가득찬 개저씨들의 퇴행적인 문학관을 "K-문학"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에서 젊은 세대들에겐 비웃음의 대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91-92).



2절이 문학론의 차원에서 '586 개저씨'들의 사고구조를 비판했다면, 3절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평의 복권이라는 과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새로운 비평관을 제시한다. 많은 것들이 당연한 배경지식으로 전제되어 다소간 독자를 당황케 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내 임의대로 정리해보자. 비평 복권론, 즉 "'타락'한 한국문학장을 '계도·정화'하기 위해 비평의 권위과 '회복'돼야 한다는 관점"은 단지 계몽주의적이서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의 기준"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586개저씨들의 영광의 순간이었던 과거 언젠가에 만들어진 기준을 다시금 꺼내어 강요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퇴행에 불과하다(94). 특정한 종류의 현실인식과 가치판단이 진리로서 상정되어 있으며 이것을 재현하는 문학만이 참된 가치를 갖는다는 비평관이 있다면, 오혜진은 여기에 대항하여 "비평은 '취향의 정당화' 문제로 수렴된 것이 벌써 오래 전"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그의 입장은 비평적 상대주의나 '개인 취향의 존중' 따위를 외치는 비평의 퇴행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에게 비평이란 "'취향'의 영역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독서취향과 감식안,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비전인지를 겨누어 보는" 행위로서,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취향의 좋고 나쁨은 존재하며, 비평은 각자가 지지하는 좋은 취향을 공동체의 공통감각(common sense)으로 등재시키는 정치적 투쟁이다. (4절을 염두에 둔다면) 비평은 공통감각으로서의 취향을 설정하고자 하는 복수의 시민들 사이의 의사소통적 투쟁으로, 여기에서 취향은 개인의 내적 전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 된다(흄David Hume을 비롯해 18세기 영국문학을 접한 독자라면 오혜진의 주장이 비평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3절의 주장을 보충하는 4절은 문학 교과서 좌편향 논란, 한국문학과 여성혐오라는 문제의식의 등장, 한국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컨텐츠(웹소설, 웹툰 등등)의 급부상이라는 세 가지 새로운 현상을 열거한다. 이어 필자는 "이처럼 한국문학(장)이 처한 물적 인식론적 토대의 변화에 따라 문학의 외연과 내포가 급격히 변화하는 이때, 필요한 것은 구시대의 규범에 입각한 문학/비평의 '회복'이 아니"라 "이 장의 역동(dynamics)을 기민하게 읽고 탄력적으로 반응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사건'을 포착할 수 있는 시민-비평가로서의 감각"이라고 주장한다(98). 나는 여기서 다른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문학비평과 별개의 것으로 여겨졌던 "시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19세기 낭만주의, 특히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셸리P. B. Shelley를 아는 독자라면 이 단어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직접적으로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과 위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재현의 문제"가 최근의 중요한 비평적 화두가 되었다는 인식을 근거로 삼고 있다(100). 이걸 좀 더 직접적인 언어로 다시 말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80년대와는 매우 다른, 과거에는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것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시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도외시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나는 이걸 (국가 대 민중이 아니라 시민과 시민 사이의 관계가 드디어 핵심적인 문제로서 시야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로의 본격적인 이행기라고 부르고 싶다. "'재현장치로서의 한국문학'이 지니는 무능 혹은 기능부전", 다시 말해 스스로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망상에 여전히 빠진 채로 새로운 사회의 요구사항을 반영하지 못하는 K문학/비평은 2010년대의 젊은 독자들에겐 "이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산적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유물이거나 시대착오적 양식으로 간주"될 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으로, 오혜진은 마지막 5절에서 지금껏 무시되어온 새로운 독서대중, 특히 "현재 가장 발 빠르게 첨단의 문화를 소화하며 새로운 정치적·문화적 주체로 부상·활약하고 있는 20~30대 여성 독자들"의 요구를 파악하여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을 하루 빨리 탈피해 한국문학의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것"만이 한국문학/비평의 유의미한 과제라고 역설한다(104).



3.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의 주장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1980-90년대와 아주 많은 것이 근본적으로 바뀐 사회에 진입했고, (잠재적) 독서대중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문학/비평계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을 되풀이하는 586 아저씨들의 욕망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비평도, 문학도 새로운 인식의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오늘날 합리적인 세계인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어도 큰 틀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주장이 한국문학/비평계에 제대로 수용되기까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혜진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제출된 정홍수의 "왜 당신은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문학동네 87(2016년 여름호))를 보자. 솔직히 전자와 비교할 때 지적인 격차가 너무나 명백해서--더 나은 필자를 섭외할 수 없었던 문학동네의 편집위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일대일로 비교하기가 어색한 후자에서 정홍수는 마치 사선(射線)에 일부러 뛰어드는 표적처럼 정확히 오혜진이 비판하는 "K-저씨"로서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출하고 있다. 


정홍수는 오혜진의 논의를 구성하는 논리적 구조물을 전부 무시한 채 대상을 "증오와 적의, 냉소와 조롱으로 가득 찬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심판과 단죄의 언어"라고 매우 간단하게 정리해버린다(!). 그 뒤에 그의 문학론이 나오는데, 문학은 "인간 진실"이 있는 곳으로 이때 진실은 "모순과 역설"로서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 남는다--그는 "아무리 명료하게 개념화하고 질서화해도 남는 잉여나 결여를 포함하면서 덩어리진 채 유동하는 인간 현실을 향한 문학의 질문"을 "사랑"한다. 이처럼 추상화되고 미학화된 문학론을 펼치는 필자에게 독서대중의 변화나 사회적 행위로서의 문학/비평과 같은 인식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가감없이 말해 정홍수의 글에는 오혜진에 대한 체계화된 반론보다는 필자 자신과 그가 사랑하는 문학을 향한 미학적 태도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오혜진의 지적사항을 (별 영양가 없이) 일일이 반박하는데, 그 모든 걸 모아놓고 정리하면 결국에는 '지금 문학/비평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으며,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걸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왔다' 란 이야기가 된다. 문제를 지적하니 고치는 대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이미 필요한 조치는 다 해놨다고 답변하는 이런 태도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 '관료'적이다; 내 생각엔 "문학권력"보다는 "문학관료" 같은 단어를 도입하는 게 좀 더 인식적으로 쓸모있지 않을까 싶다.


지적인 측면에서도 이 글은 유감스럽다. 문학과 비평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라면 "현실의 생생한 구체로부터 출발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그의 믿음이 특정한 시대의 문학이 스스로 되고자 했던 목표에 불과함을--그리고 어떠한 인식적 틀도 경유하지 않고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 따위는 없음을--, "취향은 비판은 침묵시키고 거부"한다는 주장이 비평의 역사 자체에 무지한 발언이라는 걸 잘 알 것이다(근대 문예비평의 출발점인 18세기 유럽은 바로 그 취향의 보편성과 우열을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내가 "왜 당신은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를 위와 같이 정리한 까닭은, 이 글이 오혜진의 보다 탁월한 글의 맞수로 인식되는 잘못된 프레임이 형성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정홍수와 같은 반응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우리가 오혜진의 문제제기를 가장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식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겠다. 모든 분야에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사고방식·삶의 양식에 대한 요구가 끓어오르고 있는, 그러나 그러한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은 아직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2010년대 중반의 한국에서, 오혜진의 글은 (최근의 여성주의의 부흥과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을 위해 가장 먼저 앞으로 내달리는 주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의무는 진지한 응답을 통해 그 질주를 연장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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