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추모하며
Critique 2016. 5. 21. 15:56*이 글은 약간의 편집을 거쳐 ppss에 게재되었다(http://ppss.kr/archives/81258).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www.huffingtonpost.kr/woochang-lee/story_b_10176478.html).
1.
10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이 끝날 때쯤부터 강남역은 혼잡한 안쪽과는 조금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포스트잇들은 왼편 벽을 도트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모자이크로 만들었고, 모자이크 끄트머리 및 틈새 간간이 붙은 한국어 및 영어로 된 흰 색 A4 용지들이 아니었다면 전혀 맥락을 모르는 방문객은 기획된 전시물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순진한 이조차도 출구를 완전히 빠져나와 일단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면 곧바로 생각을 달리했을 것이다. 젊은 남녀의 즉석 만남을 약속하는 듯한 광고물을 세워놓은 대로변의 음악홀부터 지하철 출구까지의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은 밤 10시 반 가까운 시각이었음에도 출구 외벽 어딘가를 응시한 채 서서 침묵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사람 사이를 힘겹게 뚫고 제 갈 길을 가는 행인들도 아무런 불평의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죽은 이를 기리는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예의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를 위한 공간은 그 폭이 약 40m가 넘어보일 정도로 컸다. 10번 출구 계단을 덮은 반투명 지붕의 한쪽 벽면은 무릎 아래부터 사람 손이 닿는 높이까지 포스트잇과 A4 용지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꽃송이들이 정강이 정도 높이까지 쌓였다(사람들 사이로 작달막한 소녀가 빼꼼히 튀어나와 꽃 한 송이를 내려놓고 다시 어머니의 손으로 돌아갔다). 바닥과 난간 곳곳에는 리본 등의 작은 악세사리 및 과자가, 벽면 가운데쯤의 바닥에는 녹색 소주병 서너 병이 가지런히 놓였다.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아주 작은 양초들은 강남대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전깃불 사이에서 고유의 일렁이는 빛으로 이 작은 영역을 채웠다. 꽃더미와 초에서 새어나온 향기의 층은 곁의 도로를 내달리는 차들이 내뿜는 연기들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로 두터웠다. 출구 지붕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는 역시 포스트잇으로 빼곡한, 종종 작은 리본들이 붙은 게시판 네댓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 끝에는 근조화환들이 우두커니 섰는데 어떤 것은 흰 꽃송이가 시들어 마치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모양처럼 되었다. 게시판 앞 긴 테이블 둘 위에는 새로운 조문객을 위한 포스트잇 뭉치와 볼펜, 사인펜 수 자루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때로는 거기에서, 때로는 건물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썼다.
내가 바라보았던 한 시간이 채 못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주로 1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 사람들이었고(여성이 다수였지만 남성도 드물지 않았다), 이따금 어린 딸과 어머니가 함께, 사진기를 든 나이든 남자 몇몇이 보였다. 곳곳에서 굳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포스트잇을 촬영했고, 어딘가에서는 조용한 흐느낌이 들렸다. 나직하게 탄식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맨 앞에 선 이들은 말없이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를 훑어보았고, 함께 온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뒤쪽 조금 떨어진 곳 한편에서는 분노와 공포를 토로하는 목소리가 오갔다. 아마도 2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냉소적인 투로 "여혐"에 분노하는 문구의 "논리없음"을 조소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러한 발화를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이 장소에서 적절한지 판단할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먼 곳에서는 마스크를 쓴 여성과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이 목소리를 높여 언쟁 중이었고, 그보다 더 멀리 9번 출구 앞에서는 어느 그룹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버스커버스커의 노래가 이상적인 조곡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2.
추모해야 할 죽음이 결코 드물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이 자리가 매우 독특한 사례로 기억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추모식의 핵심에 추모자들의 언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겪은 한국의 장례식 혹은 제사에서 추모객들의 개별적인 목소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향을 태우거나 꽃을 놓거나 절하거나, 기껏해야 곡하고 탄식하는 정도의 비언어적 제스쳐가 개인이 스스로의 심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이것 또한 관례적인 애도의 전체 풍경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이해되었다--예컨대 노란 리본은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엄청난 무게를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그러나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갖가지 쪽지들은 분명히 추모자들 각각의 자기표현이며, 이러한 형식 자체가 매우 다양한, 경우에 따라 폭발적인 반응을 초래할 수 있는 메시지가 읽히고 공유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정확히 말해 수천 개가 넘는 포스트잇을, 거기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메시지를 (선택적으로나마) 읽고 접하는 것이야말로--그리고 끝내는 자신의 메시지 또한 덧붙이는 것이--이 추모식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정을 보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죽은 이는 비어있는 실루엣으로 존재하며, 추모자들이 그를 투과해 실제로 접하는 것은 바로 다른 추모자들이 발화한 언어다. 그런 점에서 강남역 10번 출구는 하나의 거대한 댓글창과 같다. 중요한 점은 이 댓글창을 통해 각 추모자의 의사표현이, 이 죽음이 초개인적인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메시지의 내용을 훑어보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식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아마도 친분이 있는 이들이 남겼을 메모들을 포함해) 한 개별적 인간으로서 피해자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지만(입장1), 메시지의 상당수는 피해자가 단순히 한 명의 인간 혹은 개인으로서라기보다는 "여성" 정체성으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러한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깊은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다(입장2). (입장2에서 출발했을) 또 다른 목소리는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자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이 사건이 여성혐오로부터 촉발되었음을--정신분열증 여부와 무관하게 가해자가 여성혐오적 사고체계로부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형성했음이 분명함에도--외면하거나, 여성혐오 및 성적 불평등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스스로를 포함하는 남성들이 언제든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과 반론을 제기한다(입장3).
즉 다수의 추모 문구는 이 사건을 단지 운이 심하게 없었던 피해자와 정신병에 사로잡힌 살인범 사이의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해프닝으로 묻어두기를--“남혐”을 비판하는 적지 않은 남성들이 바로 이렇게 판단하는데--거부하며, 피해자의 죽음을 사적 개인의 영역을 초월한 일종의 일반적인, 공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인식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피해자의 신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많은 추모자들이 피해자의 신상을 상세히 확인하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 사건이 어떤 특정한 개인이 아닌 “(젊은) 한국여성A”, 즉 나이와 성별 모두에서 언제 어디서든 경멸받고 비난받고 구타당하고 심지어는 살해당하기까지 하는 ‘만만한’ 집단으로서--19일에는 아무 관련도 없는 25세 여성의 눈에 BB탄총을 맞추고 달아난 20세 남성의 사건이 보도되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92227005)--젊은 여성 전체가 처한 상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3개월 간 전화방·출장 마사지에 종사하는 여성 11명을 살해한 유영철이 자신의 범행동기를 “출장 마사지사 출신의 전처와 동거녀에게서 버림받으면서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져 무차별 살인에 나섰다”고 설명했음을 상기할 때, 여성혐오 및 그에 기인한 범죄 자체는 한국사회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그는 총 20명을 살해했으며[http://news.joins.com/article/4336006]). 2000년대 중후반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정남규·강호순을 포함해 젊은 여성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연쇄살인이 이어졌다--길거리에서 집단적으로 게이들을 습격·폭행하는 일이 종종 벌어져왔음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소수자·약자 대상 폭력 자체가 늘 있어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16년 5월은 2004년 7월과 달리 더 이상 여성살해를 그저 끔찍하고 안타까운, 그리고 예외적인 일로만 여기지 않는다. 여성살해는 이제 한국에서 널리 공유된 특정한 인식체계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으로, 즉 사회적 문제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여성혐오”다.
2010년대 중반 한국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헬조선"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다양한 현상이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과정에서 그것을 폭넓게 지칭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여성혐오"가 필연적으로 매우 넓은 대상을 포괄하며 때로 그 일관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러한 폭넓음을 다소 희생할 위험을 무릅쓰는 게 허락된다면, 나는 여기에서 오늘날의 “여성혐오”를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언어적·물리적 폭력 및 성적대상화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 및 이러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권하거나 최소한 자연스러운, 흔하고 평범한 일 정도로 정당화하는 인식체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하고 싶다. 이때 중요한 점은 “여성혐오”가 단지 소수의 개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박힌 공통의 인식체계로서 수많은 이들의 여성혐오적 행위를 초래하는 일종의 사회적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6년 5월 17일의 살인사건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인식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 사회적·구조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몇몇 언론기사 및 위키사이트에서 사용하는 “묻지마 살인사건”이란 표현이 이 사건을 살인자의 주관적 동기로부터, 즉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에 기초한다면, “여성혐오 살인사건”은 이 사건을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작용하는 인식체계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묻지마 살인사건”이 이 사건을 일종의 불운, 천재지변으로 간주함으로써 (치안을 강화하는 걸 제외하고는) 우리가 이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유도한다면, “여성혐오 살인사건”은 우리들의 집단적인·공적인 실천을 통해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원인을 제거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함축한다.
4.
이때 (아들을 편애하고 딸을 폄하하며 여성혐오에 공모하는 일부 어머니들을 제외하면) 이 여성혐오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공유하는 주요한 주체로 지목되는 것은 한국의 남성들이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을 증오한 남성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여성혐오라는 추상적 관념이 여성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여성혐오에 입각해 언어적·물리적 가해행위를 실천하는 구체적 행위자로서의 남성들이 있다. 따라서 적지 않은 남성들이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는 명명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문제의 잠재적 공모자로 지목되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상황을 좋아하기는 어려우며, 그것도 지금까지 잘해봐야 동등한 존재 정도로 생각했던 여성들에 의해 ‘계몽’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사건을 필사적으로 개인적인 광증의 소산으로 치부하고, “잠재적 가해자”로서 “죄책감”을 거부한다고 선언하며, 여성혐오를 말하는 사람들을 “남성혐오자”로 부른 뒤 귀를 닫고 싶어하는 등의 감정적인 반응은 설령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나는 그러한 남성들이 (그들 스스로 늘 주장하듯) 덜 감정적이고 좀 더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남성들이 누군가를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특정한 평가기준을 적용하고, 모욕·비난하고, 폄하하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욕망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 공격하며 그럼에도 단지 그 대상이 여성이란 이유로 이 모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그것을 매우 극단적으로 실현한 사례에 불과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남성독자 중에 자신이 이 모든 일들과 무관하며 억울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분명 당신은 매우 드문 범주에 속하는 운 좋은 경우다. 그러나 주변의 남성들을 한번 주의 깊게 지켜본다면, 아직도 다수의 한국남성들이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채 여성혐오적 발언과 제스처를 주고받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생의 상당부분을 한국남성집단 속에서 보낸,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 기간 동안 여성혐오적 인식을 물과 공기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수많은 한국남성이, 결과적으로 한국사회가 여성혐오를 비록 의식하지 못한 채라고 할지라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신이 없다.
남성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공유해온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정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여성혐오는, 여성혐오적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자기 자신이, 친구 및 동료가, 존경하는 사람이, 가족과 친척이 잘못된 사고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때 누군가는 평생의 트라우마와 원한, 공포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분노하기 전에, 그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낫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선택을 고민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5.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장소에 붙은 많은 포스트잇은 단지 자신이 그때 그 장소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단지 남자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문구 또한 자신이 살아남아 이렇게 메모를 쓰고 있는 것이 어쩌면 그저 우연적인 일일지 모른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단지 조금 다른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리고 5월 17일 새벽의 그 건물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나는 20일 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장소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조금만 다른 삶의 경로를 살았다면, 과연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었을까. 단지 누군가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올리지 않았을까. 설령 살인까지는 저지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건기사에 차마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댓글을 무심히 달거나 “여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약해서 죽은 거다” 따위의 헛소리를 쓰거나, 피해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보다도 여성주의자들을 욕하는 게 더 중요한 인간이 되지 말란 법이 있었을까.
나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에서 단 한 번도 여성 및 각종 소수자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러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물론이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이 상황은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초 학과에 속해서 여성들과 친구가 되는 법을 어쩔 수 없이 익혀야 하지 않았다면, 몇몇 이해심 깊은 친구들의 사려 깊은 지적과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성을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친구도 동료도 될 수 없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성소수자 혐오를 안고 살아갔을 것은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가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으며 이 사건을 두고 함께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여성 동료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교육과정은 여전히 이 문제를 철저히 개개인의 우연적인 상황에 맡겨 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의 선배·동료들 중 학부생을 가르치는 이들은 종종 토론수업에서 여성혐오나 소수자혐오가 버젓이 튀어나올 때의 당혹감을 이야기하며, 학교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를 깔고 있는 진술이 많은 지지를 받는 현황을 개탄한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더 이상 다른 이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해진 곳이 되었다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하지만, 공감이 상당 부분 인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공감의 부재 이전에 교육의 부재를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학교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시민으로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당연하지만 이것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습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존재하며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여기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여성혐오가 무엇이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성소수자는 괴물이 아닌 인간이며 그에 대한 혐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간을 피부색과 출신지에 따라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한국이 누군가가 스스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잠재적 피해자로, 또 잠재적 가해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며 더 이상 그런 곳이 되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5월 17일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은, 그 앞에서의 흐느낌은, 집에 돌아와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어느 추모자의 뒤척임은 이러한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감의 표현이다. 공중화장실의 치안을 강화하는 정도로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며, 지금도 터져 나오는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와 침통함의 표현은 한국사회의 ‘상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인식의 발로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 우리가 시도해볼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는 바로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와 같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에서 이 주제를 의무적으로, 진지하게 다루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 및 이후의 경제적 삶에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평생 동안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관계 맺어야 하는가 만큼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상식과 합의를 재설정하는 일이 늦춰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의,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목숨과 상처를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사건을 다소 늦은 5월 19일에서야 제대로 접했다. 그 순간부터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늦은 시간 강남역에 간 것도 가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또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포스트잇을 집어들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내 글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글은 내 방식대로의 추모이기도 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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