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포스의 ‘감정교육’: 『단순한 이야기』와 열정적 사랑의 문제
Critique 2016. 3. 26. 19:24이우창. 「도리포스의 '감정교육': 『단순한 이야기』와 열정적 사랑의 문제」 . ≪영미문학연구≫ 29 (2015): 141-64.
논문 pdf 형태로 보시거나 혹시라도 공식적인 지면에 인용하실 분은 링크를 참조해주시길 바란다(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3390177).
첫 투고 결과물을 드디어 학술DB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글 자체는 소품격이지만, 그래도 한국 영문학계에서 루만을 써먹은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라는 데 작게나마 의미를 부여할 순 있겠다. 작은 글 하나를 글 답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분들께 큰 도움을 받았다. 투고-게재 과정에서 얻은 중요한 깨달음은 1) 글은 역시 고치는 만큼 좋아지긴 한다 2) 공식적인 심사과정을 포함해 글을 개선시킬 수 있는 시스템/네트워크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 특히 몇몇 선생님들의 큰 조력이 없었다면 이 정도 퀄리티도 절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을 제외하고도, 루만에 관해 친절히 설명해주신 J 선생님, 영어초록을 뜯어고쳐 주신 분들께 특히 감사드린다.
본문을 읽어보실 분은 접어둔 부분을 클릭하시길. 다만 한글 파일을 바로 웹브라우저로 옮기면서 이탤릭 표기를 포함해 원문의 표기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 혹시라도 필요하신 분은 위의 링크를 통해 직접 다운받으시고, 급하게 파일이 필요하신 분은 내게 따로 말씀주시길 바란다.
도리포스의 ‘감정교육’: 『단순한 이야기』와 열정적 사랑의 문제
엘리자베스 인치볼드(Elizabeth Inchbald)의 『단순한 이야기』(A Simple Story)에서 소설 전반부(1-2권)와 후반부(3-4권)의 이질성은 비평적 난제의 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경쾌한 로맨스에 가까운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는 “고딕 서사”(Gothic narrative, Spencer xix)라는 인상마저 들게 할 뿐더러 주요인물의 성격 또한 몹시 상이하기에 심지어 『단순한 이야기』를 비슷한 길이를 가진 두 편의 이야기를 합친 것으로 보는 평조차 있을 정도다(Mortensen 364). 실제로 이 문제는 물길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바위처럼 『단순한 이야기』의 비평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인치볼드의 “지나치게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작은 걸작”(a small masterpiece neglected far too long, Castle 290)을 선구적으로 다룬 연구자들은 전반부의 주인공이자 18세기 영국소설 정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유형의 여성인물 밀너 양(Miss Milner)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입장은 후반부에 밀너 양이 갑작스레 퇴장하고 그녀의 딸 마틸다(Lady Matilda)가 “올바른 교육”(a proper education)을 체현하는 여성으로 등장해 전통적인 해피엔딩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해명해야하는 곤란과 마주한다.1) 규범에 저항하는 능동적인 여성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단순한 이야기』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등장하는 남성인물 도리포스(Dorriforth, 후에 엘름우드 경Lord Elmwood)에 초점을 맞춘 비평들은 소설 전후반부의 불일치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해명할 수 있었다. “감성의 문화”(culture of sensibility)를 18세기 영문학의 역사적 해석에 중요한 키워드로 정립한 바커-벤필드(G. J. Barker-Benfield)는 도리포스가 감성에 의해 이끌리는 남성인물로서 밀너 양에 의해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는 기본적인 서사를 제시했으며, 이때 후반부는 감성의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5-57).2)
이 글은 도리포스의 변화에 집중할 때 『단순한 이야기』에 대해 비교적 일관된 비평적 서사를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두 번째 입장에 근접한다. 그러나 감성 개념에 기초한 기존의 비평이 도리포스나 밀너 양과 같은 특정한 인물의 성격을 풀어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이 글은 인물유형분석만이 아니라 인물들 간의 연애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 작업을 위해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언급한 “열정적 인간”(man of passion) 및 “열정적 사랑”(love as passion)의 개념을 참고할 수 있다.3) 루만은 고전적인 저술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Liebe als Passion: zur Codierung von Intimität)에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유럽의 로맨스 문학 텍스트들을 살피며 “사랑의 의미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를 수행한다. 루만의 요점은 근대사회에서 사랑이 법, 경제, 정치와 같은 다른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유럽의 로맨스 문학 텍스트들에서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사랑의 양식이 바뀌어 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사랑의 양식 중 가장 고전적인 형태는 “[연애] 대상의 완전함에서 사랑 고유의 정당성을 발견”(79)하는 “이상적 사랑”(ideal love)이다.4) 이상적 사랑은 사랑을 연애 대상이 표상하는 객관적인 미덕(virtue)에 합일해가는 과정으로 그린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열정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출현한다. 여기에서 사랑의 동력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열정으로, 본래 인간 행위의 수동성을 강조하던 이 개념은 격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을 촉발하는 능동성을 포함하면서 사랑을 (연애대상에 내포된) 미덕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연애 주체 내면의 열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바꾸어 간다. 열정적 사랑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를 경계로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서유럽 로맨스 문학의 주류를 이룬다.5) 이제 인간은 사랑을 통해 고유한 (깊이를 가진) 내면의 완성으로 향하는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한다. 사랑은 여전히 열정에 의해 촉발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연애 주체의 내면에 자리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주관적인) ‘미덕’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부분적으로 이전의 두 가지 양식을 융합한다.
루만은 사랑의 변천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으로 열정을 지목한다.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의 고전적인 연구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17세기를 거쳐 인간을 이해하는 데 규범적인 측면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as he really is, 14)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 점차 지배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열정은 인간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출현한다. 17-18세기를 거쳐 열정은 이성을 통해 억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쇄하는 열정”(Countervailing Passion, 20)을 통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는 관점이 강조되면서 열정은 “삶의 정수이자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힘”(as the essence of life and as a potentially creative force, 47)으로 여겨지기까지 이른다.6) 이러한 상황은 루만의 설명에서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서로 상충되는 성격의 언어들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루만은 이를 “역설화”(paradoxicalization, 105)라고 부른다—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상적 사랑의 전통에서 그저 대립될 뿐이었던 사랑과 증오는 열정적 사랑의 체계 안에서 (보답 받지 못한 사랑에서 증오감이 태어나는 사례에서처럼) 하나의 구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통일적인 역설의 상이한 표현 형식들”로 재배치된다(109). 역설의 형식은 사랑이 외적인 준거에 기대지 않는 독립적인 체계로 성립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열정에 기초한 사랑이 과도함(excess)과 불안정성(instability)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이성(raison)과 신중함(prudence)으로부터 뚜렷하게 거리를 두는” 것으로서 과도한 열정의 표현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며(106), 동시에 계속해서 움직이는 충동에 근거하기에 불안정성을 갖는다(111). 열정적 사랑은 그 변덕스러움으로 인해 짧은 수명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단순한 이야기』는 열정적 사랑의 한계를 드러내고 또 이를 해결하려 시도하는 텍스트다. 이 과정의 핵심은 도리포스의 ‘감정교육’이다. 그는 최초에 미덕을 표방하는 사제였으나 강한 열정의 보유자 밀너 양과 사랑에 빠지면서 점차 그 자신도 열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열정적 사랑이 결혼이라는 결실에 도달한 순간, 인치볼드는 열정적 사랑에 내포된 불안정성이 어떻게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열정의 불안정성에 직면한 도리포스는 반작용으로 극단적으로 완고한 인간이 되지만 그러한 태도 역시 열정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는 역으로 열정에 지배당하는 폭군이라는 오래된 전형에 근접하게 된다. 소설은 도리포스가 스스로를 사로잡았던 열정을 극복하고 나아가 열정적 사랑의 불안정성을 해결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끝난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열정적 사랑의 양식 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인치볼드는 이상적 사랑이라는 과거의 모델을 다시금 끌어올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소설 전후반부 사이의 이질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소설 전후반부를 통해 열정적 사랑이 전개되는 양상 및 그 취약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피고, 결론을 통해 양자의 문제적인 공존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한다.
1. 미덕과 열정
소설 첫머리에서 사제 서원을 한 로마 가톨릭 사제 도리포스는 미덕을 체현한 인물로 소개된다. 그는 “사려, 정의로움, 용기, 절제”(his own prudence, justice, fortitude, and temperance, 3) 등의 고전적인 미덕을 갖추었을 뿐더러 자신이 설교하는 덕목을 직접 실천한다. 친우 밀너 씨(Mr. Milner)가 사후 자신의 딸을 도리포스에게 맡긴 것 또한 “도리포스는 내가 아는 한 도덕적 미덕이 종교적 미덕과, 타고난 명예가 경건한 믿음과 결합한 유일한 사람”(Dorriforth is the only person I know, who, uniting every moral virtue to those of religion, and native honour to pious faith, 5)이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덕성 때문이다. 밀너 씨는 도리포스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딸을 덕으로 인도해주리라 기대하고 딸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를 간청하며, 도리포스는 그리 하겠다고 약속한다. 여기까지가 덕 있는 스승․아버지가 어린 처녀를 미덕으로 인도하는 전통적인 구도였다면, 인치볼드는 곧바로 이를 완전히 뒤집힌 형태로 전개한다.
밀너 양은 도리포스와 달리 열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녀가 “민감한 감성”(a quick sensibility, 15)의 소유자라는 설명은 18세기 감성의 문화에서 밀너가 전형적으로 열정에 의해 지배당하기 쉬운 인물임을 암시한다.7) 자신이 머물 집의 거주자들과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호튼 부인(Mrs. Horton)의 진지한 종교적 몸짓을 본 밀너는 웃음기를 “절제하지 못하고”(uncontrolled, 17, 인용자 강조) 마음껏 웃는다. 뒤이어 프레더릭 경(Lord Frederick)의 구애를 받는 대목에서도 서술자는 밀너의 마음 속에는 허영이라는 열정만이 자리한다고 지적한다(19). 이러한 대목들은 밀너가 고전적 덕의 기초인 자기 지배(self-govern)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심신을 뒤흔드는 열정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그를 묘사하는 표현들, 예컨대 “찬사를 받고 싶은 과도한 욕망, 기쁨을 유발하는 기술의 과도하게 즐기는 것”(an inordinate desire of admiration, and an immoderate enjoyment of the art of pleasing, 19)과 같은 문구들은 온통 열정과 과도함의 수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대목은 밀너가 “[열정적 사랑이라는] 코드의 중심 테제인 무절제함, 과도함”(루만 106)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양의 원한, 분노, 격노가 밀너 양의 혈관을 뜨겁게 달구고”(all that vast quantity of resentment, anger, or rage which sometimes boiled in the veins of Miss Milner. 44) 마침내 눈물을 흘리게까지 하는 예에서처럼(45) 열정은 밀너 양에게 단순히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에너지로만이 아니라 심신을 아울러 뒤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열정은 가변적인 것이기에 밀너 양은 또한 매우 변덕스러운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속성, 차분함”(루만 116)을 지향하는 미덕의 대변인 도리포스가 자신의 피후견인 밀너 양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처음에 저녁 약속을 둘러싼 두 인물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최초에 밀너는 도리포스에게 저녁을 집에서 보내겠다고 말했으나 갑작스레 다른 약속이 떠올라 집을 나서려 한다. 도리포스는 자신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밀너의 태도에 화를 내면서 “오늘 저녁에는 당신이[밀너가] 집에 머물도록 명령”(I command you to stay at home this evening, 29)한다. 갈등의 배후에는 매 순간 그때의 기분에 맞춰 움직이는 밀너의 가변성과 그러한 가변성을 통제하고 고정시키는 도리포스의 ‘약속’ 간의 대립구도가 작동한다.8)
열정에 기반한 밀너의 행동방식과 그것의 가변성을 통제하려는 도리포스의 의지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두드러지는 대목은 밀너의 결혼상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감당하기 곤란한 피후견인을 가능한 빨리 혼인시키고 싶은 도리포스는 부유한 애쉬튼 경(Sir Edward Ashton)을 소개해주지만 밀너는 그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whom I could never love, 25) 잘라 말한다. 밀너가 프레더릭 경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거절했으리라 추측한 도리포스는 “밀너 양, 당신의 애정이 이미 누구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확실한 태도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Unless your heart is already given away, Miss Milner, what can you make you speak with such a degree of certainty?, 25 인용자 강조)라고 묻는다. 밀너의 내면에서 “확실성”을 찾고 끌어내고자 하는 도리포스의 말에는 “애정”이 일종의 소유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이때 애정은 마음의 주인이 아직 간직하고 있거나(your heart is still your own, 25 인용자 강조) 타인에게 주어버린 것으로 표현된다. 전자의 경우 마음의 원 소유자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할 수 있으나 후자에서,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주어진, 다시 말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경우에 원 소유자는 더 이상 자기지배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열정에 이끌려 행동하게 된다는 논리가 여기에 깃들어 있다.
문제는 열정에 따라 움직이는 밀너와 같은 인물에게는 도리포스의 수사적 논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리포스에 따르면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언행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밀너에게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고 지속적으로 캐물을 때 여기에는 밀너가 스스로의 마음을 알고 그에 따라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윤리적 주체’일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밀너는 “저는 제 의향의 주인이 아니랍니다”(I am not mistress of my inclinations, 53)라고 답함으로써 도리포스의 전제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밀너는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선언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알고 책임지는 주체이기를 바라는 도리포스의 요구를 회피한다. 여기에서 도리포스가 밀너에게 요구하는 ‘진심’은 애초에 확정될 수 없다.
소설 전반부 플롯의 쟁점이 밀너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고 또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있다면, 이 문제는 앞서와 같이 밀너의 내면에서 확실성을 확보하려는 도리포스의 분투와 그러한 노력을 좌절시키는 밀너의 대응 사이의 긴장관계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확실성”(certainty)과 함께 도리포스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드러냄”(reveal)이다. 예컨대 1권 12장에서 밀너의 감정이 드러내어야 할 것으로 제시되었다면(I[Dorriforth] remain wholly unacquainted with your sentiments, even after you have revealed them to me, 55 이하 인용자 강조), 프레더릭 경을 사랑한다는 밀너의 (거짓)고백을 듣고 다시금 도리포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속마음을 드러냈다는”(she had at length, revealed to him the state of her mind, 82) 사실에 만족한다. 우들리 양(Miss Woodley) 또한 밀너의 마음을 드러내고 해석하고자 욕망하며(to reveal these sentiments [...] to interpret the slightest words to its own use, 83) 마침내 밀너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도리포스라는 고백을 듣고 “지금 바로 도리포스 씨에게 가서 당신의 본심을 드러내 밝혀야겠다”(To go and reveal to Mr. Dorriforth, without hesitation, the real state of your heart, 89)고 말한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드러내다’라는 동사의 활용은 이처럼 밀너라는 열정적 인물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단순한 이야기』 전반부의 서사는 도리포스의 ‘앎의 의지’를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1권 11장에서 도리포스가 밀너에게 프레더릭을 남편감으로 생각하는지 처음으로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희미하게 ‘아니에요’라 답했다”(she faintly replied, 'No, he is not.', 51). 밀너의 말과 태도의 불일치는 도리포스를 당황하게 만들고, 그가 어느 쪽이 참이냐고 다시 묻자 밀너는 “믿고 싶은 쪽으로 믿으세요”(Which you please, 51)라고 답한다. 도리포스가 대화를 통해서 밀너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12장의 대화는 이러한 난관이 어떠한 논리에 기초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마침내 도리포스는 말했다. “그의[프레더릭의] 아내가 되지는 않겠다는 게 당신의 확실한 의사입니까?”
그녀[밀너]는 여기에 답했다. “지금은 그래요.”
“‘지금은’이라니! 그럼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여성들은 때때로 그러기도 하죠.”
[...] 그녀는 “저는 이런 관계가 계속됐으면 좋겠어요”라 답했다.
“도대체 왜?” 도리포스가 외쳤다.
“재밌잖아요.”
At length Dorriforth said, "And it is your firm intention never to become his wife?"
To which she answered—"At present it is."
"At present! do you suspect you shall change your sentiments?"
"Women, sometimes do."
[...] She replied, "I had rather it would continue."
"On what account?" cried Dorriforth.
"Because it entertains me." (57)
설령 밀너가 도리포스의 요구에 따라 본인의 “현재” 의사를 밝힌다고 해도 이 뜻은 다음 순간에 언제고 바뀔 수 있다. 자신의 진의를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진의가 열정의 유동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상 매 순간 바뀌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도리포스의 논리가 진심과 거짓의 분할에 기초한다면 밀너의 논리에서는 애초에 진심과 거짓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그는 항상 진심을 이야기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진심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유동하는 열정에 따라 매번 다른 답변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즉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가벼운 연애를 유지하는 이유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밀너는 철저히 열정에 따르고 있다.
도리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프레더릭과의 결투를 통해 밀너의 진심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가 프레더릭을 구타하고 결투신청을 받게 되자 밀너는 자신이 프레더릭을 사랑하기에 그를 해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거짓으로 고백한다(1권 14장). 밀너가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면서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69) 도리포스는 그녀가 진심을 고백했으리라 믿고 결투를 포기한다. 그러나 도리포스와의 대화 직후 밀너는 우들리 양에게 자신의 고백은 완전히 거짓이며 자신이 실제로 애정하는 대상은 도리포스라고, “나는 그를 애인의 열정과 아내의 애틋함을 다해 사랑한다”(I love him with all the passion of a mistress, and with all the tenderness of a wife, 72)고 선언한다. 도리포스는 다시 한 번 기만당한다.
이 대목은 『단순한 이야기』에서 열정적 사랑의 양식이 진실과 거짓이라는 구별에 내재한 윤리적 우열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 밀너는 완전한 거짓으로 도리포스를 기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포스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어린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밀너의 행위에는 역설적인 진정성이 부과된다. 곧 객관적으로 볼 때 거짓인 그의 언어는 그의 진심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며, 마찬가지로 그의 거짓말은 (도리포스를 향한 사랑이라는) 진정한 열정의 표현행위로서 나름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는 밀너가 펜튼 양(Miss Fenton)에 대해 갖는 질투를 서술자가 설명하는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진정한질투를 품어본 이가 적은 까닭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이가 드물기 때문”(There are but few persons who ever felt the real passion of jealousy, because few have felt the real passion of love, 119 인용자 강조)이라는 진술이 보여주듯 열정은 그 자체로 참되고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들리 양은, 나아가 독자는 밀너의 행위 내에 진정한 애정과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에 그를 쉽사리 비난할 수 없게 된다. 객관적인 참/거짓의 가치판단을 주관적인 진실의 표현이 무력화시키고 또 후자가 고유의 ‘윤리적 정당성’ 및 ‘진실됨’을 획득하는 상황이야말로 대상의 미덕에 기초한 이상적 사랑을 열정적 사랑이 대체하는 구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도리포스는 마침내 밀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의 ‘앎의 의지’는 밀너에게 완벽히 교란 당한 뒤이다.
2. 열정과 지배
1절에서 밝혔듯 『단순한 이야기』의 전반부가 인식론적인 층위에서 열정적 사랑이 미덕 혹은 고정된 사실의 추구를 무력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면, 이러한 구도는 미덕을 체현하는 도리포스라는 인물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최초에 미덕과 자기통제의 화신으로 제시되었던 그는 밀너와의 관계를 통해 점차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해간다. 변화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제시되어 있다. 도리포스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서술자는 그를 두르고 있는 온갖 덕에 대해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한 줄기의 감성 [...] 마음에 깃든 감정들 [...] 희망과 공포로 뛰고 있는 빠른 맥박”(a gleam of sensibility[ ...] the feelings of his heart [...] the quick pulses that beat with hope and fear, 8) 등이 있다고 덧붙인다. 밀너 양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도리포스에게 마치 아버지를 대할 때와 같이 복종하겠다고 말할 때 도리포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격앙된 마음”(the agitation of his heart, 13)을 애써 감추려 한다. 이러한 심성을 갖춘 도리포스는 밀너를 만나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게 이끌림으로써 점차 덕과 자기절제 등 자신이 따르던 성향들을 벗어나 열정적 인간이 되어 간다.
열정적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은 스스로에 대한 지배력/통제력을 점차적으로 상실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가 프레더릭 경을 구타하는 순간은 이를 잘 보여준다. 프레더릭이 자신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밀너에게 달라붙자 분노한 도리포스의 목소리는 순간 프레더릭을 놀라게 할 정도다(61). 그러나 프레더릭이 일개 사제인 도리포스를 무시하고 밀너를 붙들어 그 손에 키스를 퍼붓자 이성을 잃은 “도리포스는 순간적인 충동에 휩싸여 앞으로 뛰쳐나가 프레더릭의 얼굴을 후려갈겼다”(Dorriforth with an instantaneous impulse, rushed forward, and struck him a blow in the face, 61).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내가 나의 본분으로부터 벗어났구나 [...]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나는 더 이상 학인이 아니라 깡패에 불과하다”(I have departed from my character [...] I have departed from myself. I am no longer the philosopher, but the ruffian, 62)고 자책한다. 이 말은 곧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과 그에 기초한 미덕으로부터 이탈했음을 의미한다. 밀너는 이를 보며 도리포스의 거친 행위야말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기뻐한다(62).
이후 밀너와의 갈등 끝에 그를 바스(Bath)로 떠나보낼 때도 결국 도리포스는 작별의 순간에 밀너의 훌쩍임을 보고 감정의 고양을 겪는다(92). 그는 점차적으로 ‘다정다감한 남성’(man of feeling)이 되어 간다. 병든 밀너를 방문한 “[도리포스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his looks expressed his feelings, 98)는 묘사에서 내면의 열정이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감성의 수사가 도리포스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냐는 밀너의 말을 듣고 도리포스가 격정으로 충만해 기도드리는 장면은 종교적 행위에도 밀너를 향한 애정을 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99). 물론 도리포스는 자신의 내면에서 열정과 이성적인 덕이 투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사촌으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아 엘름우드 경(Lord Elmwood)이 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뒤죽박죽이 되어 열정이 의기양양해 하고 있지.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열정에 완전히 지배당하진 않았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이성은 최후까지 열정에 맞서 싸울 거요. 이성이 무너지기 전에 내가 잘못을 범할 일은 없을 겁니다.
They[my passions] are confused—they are triumphant at present. I have never yet, however, been vanquished by them; and even upon this occasion, my reason shall combat them to the last—that, shall fail me, before I do wrong. (131)
엘름우드의 고백은 『단순한 이야기』에 두 가지 가치체계, 즉 이성적 덕의 지배를 목표로 하는 담론과 (진실한) 열정에 이끌리는 것을 선호하는 양식이 공존하며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름우드와 밀너의 로맨스가 전개되는 방향은 엘름우드가 전자로부터 후자로 점차 이행하도록 이끈다. 열정과 지배의 모티프는 밀너의 선언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덕을 상징하는 여성으로서 엘름우드의 배우자감으로 지목되었던 펜튼 양과 엘름우드가 결합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엘름우드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 밀너는 기쁨에 가득 차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매력이 내 생각보다도 강력한 것일까? 도리포스가, 그 근엄하고 경건한 은둔자 도리포스가, 내 매력에 의해 이끌려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연인이 되었다니. 그 오만하고 엄격한 후견인이, 내가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면, 스스로를 낮추어 사랑의 진정한 노예가 된다니. [...] 그가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애정으로도 나는 가장 행복한 여성이지만, 과연 내가 그에게 못되게 굴어도 그 마음이 여전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나를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만약 여전하다면 나의 승리와 행복은 더 커지겠지.
Are not my charms even more invincible than I ever believed them to be? Dorriforth, the grave, the pious, the anchorite Dorriforth, by their force, is animated to all the ardour of the most impassioned lover—while the proud priest, the austere guardian is humbled, if I but frown, into the veriest slave of love. [..] I am the happiest of women in the affection he has proved to me, but I wonder whether it would exist under ill treatment? If it would not, he still does not love me as I wish to be loved—if it would, my triumph, my felicity, would be enhanced. (138)
여기에서부터 『단순한 이야기』 전반부 나머지의 플롯은 엘름우드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시험하고 또 이를 입증하려는 밀너의 노력 또는 도발로 구성된다. 밀너는 먼저 무절제하게 사치를 부리며 이를 마주한 엘름우드는 밀너를 배우자로 맞아들일 때 장차 자신의 가정생활이 무분별한 배우자로 인해 엉망이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곧바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는 못한다(142).
이어 가면무도회에 놀러나간 밀너가 아침에야 돌아오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그[엘름우드]는 격렬하게 몸을 떨고 안색이 창백해졌다”(He trembled extremely, and looked pale, 161). 이어 한 문단이 온통 그의 심신을 통해 요동치는 열정에 대해 기술된다(indignation ; satisfaction [...] at being on revnege ; emotion arose from joy, to find she was safe ; perturbation at the regret, 162). 프레더릭과 밀너의 다정한 사이를 보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격앙되었는지 드러내지 않을 힘을 갖지 못했음”(he had not the power to conceal how much he was affected, 171)을 느낀다. “그는 떨다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더듬거릴 뿐이었고, 자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붉게 물든 걸 느꼈기에, 여기에서 비롯된 당혹감이 또 다른 당혹감을 촉발한 끝에 그의 상태가 측은해질 정도였다”(He trembled—when he attempted to speak, he stammered—he perceived his face burning with confusion, and thus one confusion gave birth to another, till his state was pitiable, 171). 자신이 열정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내면에서 또 다른 열정을 생산한다. 밀너는 이 광경을 보며 “그가 나의 영원한 소유물”(he is mine for ever, 171)이 되었다고 환호한다.
밀너의 이어지는 도발과 자기 통제의 상실을 견딜 수 없었던 엘름우드는 결국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작별의 자리에서 엘름우드와 밀너는 둘 다 감정적으로 격앙되고, 결국 사제 샌포드(Sandford)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소설 전반부가 마무리된다. 이는 밀너의 도발적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미혼상태의 종결이자 열정적 사랑을 결혼으로 봉합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시로 밀너의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가 “추모 반지”(mourning ring, 193)라는 대목이 암시하듯 이 봉합은 완전하지 않다.
3. 불안정성과 지속성
소설의 후반부는 두 사람을 사로잡았던 열정적 사랑의 치명적인 약점, 즉 사랑의 지속불가능성이 현실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3권의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들은 밀너와 엘름우드의 결합이 파탄에 도달했음을 목도한다. 결혼 후 4년째, 엘름우드는 재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인도 제도(the West Indies)로 향하고 그곳에서 발이 묶인다. 남편의 부재가 길어지자 “처음에는 단지 불행할 뿐이었던 엘름우드 부인은 마침내 화가 났다. 그녀는 자신이 잘 다스리지 못하곤 했던 참을성 없고 짜증 많은 성격에 굴복했고 [...] 런던의 방탕한 사교계에 섞여 놀기로 결심했다”(Lady Elmwood, at first only unhappy, became at last provoked; and giving way to that irritable disposition which she had so seldom governed, resolved, [...] by mixing in the gay circles of London, 196). 최종적으로 자신의 열정에 굴복한 그는 프레더릭과 간통하기에 이르고 남편이 돌아오자 죄의식과 부끄러움에 딸을 두고 떠나버린다. 열정적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열정 자체의 무절제함과 가변성에 의해 해체된다.
귀국한 엘름우드 경 또한 크나큰 열정에 사로잡힌다. 엘름우드는 이전까지 부인을 사랑했던 만큼이나 그녀를 증오하게 되어 복수심을 품고 밀너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더 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196). 자신의 굳은 맹세에 따라 엘름우드는 아직 어린 딸 마틸다를 영지에서 추방한다. 이어 그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숙적 프레더릭 경과 처참한 결투를 벌인다. 프레더릭과의 사생결단을 결심하거나 상대의 죽음까지 확인하고서야 결투장을 떠나는 대목은 엘름우드를 사로잡은 복수심의 크기를 보여준다(198). 그는 자신이 받았던 충격으로 인해 감성을 거부하는 가혹한 인간이 되지만 이는 열정을 거부하고 미덕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열정에 지배당하는 쪽에 가깝다.9) 죽은 아내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손을 떨며 눈물을 쏟는 대목((212)에서 볼 수 있듯 점에서 그는 여전히 열정적 인간이지만 단지 그를 지배하는 열정의 성격이 전반부와 매우 달라졌을 뿐이다. 후반부 결말 직전까지 엘름우드의 내면은 완고함, 분노, 가혹함과 같은 감정들로 채워진다.10)
따라서 후반부 플롯의 핵심은 사실상 엘름우드의 상태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표면적으로는 마틸다가 용서를 받고 아버지와 재결합할 수 있는가 및 해리 러시브룩(Harry Rushbrook)과 마틸다 사이의 로맨스가 성사될 것인가가 『단순한 이야기』 후반부 플롯을 이끌어나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틸다를 용서할지를 결정하는 주체도, 자신의 상속자 러시브룩이 마틸다와 사랑하도록 허락할지를 결정하는 주체도 모두 엘름우드라는 점에서 그의 변화야말로 후반부의 유일한 쟁점이다. 후반부 서두에서부터 강조되듯 엘름우드의 완고함이 매우 강하기에 마틸다와 러시브룩은 무언가 적극적인 행위를 시도조차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며, 이들의 로맨스는 밀너와 도리포스의 로맨스에서 연출되었던 오해-진심의 확인-사랑이라는 패턴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패러디처럼 보인다. 서사의 무게중심은 엘름우드의 내면을 사로잡은 분노, 완고함, 가혹함이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에 쏠리게 된다. 그러나 내적인 변모를 설득력 있게 이끌어낼 다른 동력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이야기』 후반부는 전반부와 비슷한 길이에도 불구하고 훨씬 단순화된 플롯을 보여준다. 전반부가 도리포스와 밀너라는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동력원을 갖추었기에 더 많은 역동성이 주어진다면 후반부는 엘름우드가 독재적인 위치에 있고 이 사실이 플롯 진행상의 난맥을 야기한다. 결국 후반부에서 플롯의 전개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유일한 사건은 마틸다가 탕아(rake) 마그레이브 자작(Viscount Margrave)에게 납치당하고 이를 안 엘름우드가 딸을 구출하러 나가는 것뿐이다.11)
마틸다의 피랍을 알게 된 엘름우드가 어떠한 망설임 없이 곧바로 딸을 구하러 출발하는 데서부터 러시브룩의 청혼을 마틸다가 받아들이며 끝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결말부는 마치 그때까지 플롯의 지지부진함을 벌충이라도 하듯 매우 신속하게 전개된다. 이 대목에서 3권 첫머리에 제기되었던 과도한 열정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먼저 플롯 진행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었던 엘름우드의 완고함(“obstinacy”, “stubbornness”, “inflexibility”)은 딸을 향한 애정을 통해 해소된다. 3권 11장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듯 엘름우드가 “자신의 완고한 성격을 굽힌 적”(overcome the inflexibility, 251)은 단 두 번뿐이었는데, 그 두 번은 각각 밀너와의 결혼 및 의절한 누이의 핏줄 러시브룩을 받아들인 일이었고 양자 모두 밀너와의 애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밀너가 죽은 지금 “절대로 바뀌지 않는 이 영혼을 매혹시킬 수 있는 마법은 더 이상 없다”(the magic which once enchanted away this spirit of immutability was no more, 251). 마틸다의 납치는 엘름우드가 자신의 맹세를 깨고 자신을 구속하던 완고함을 극복한 세 번째 사례가 된다. 그는 딸을 구출하고 “참을 수 없는 부모의 사랑으로 그녀를 품에 안”(with all the unrestrained fondness of a parent, folded her in his arms, 328)으며 부녀관계를 회복한다. 여기에서 완고함은 사랑의 열정을 통해 극복된다.
마틸다를 구출해서 떠나는 엘름우드에게 마그레이브는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이냐고 묻지만 그는 단호하게 “법이 자네의 유일한 심판자가 될 것이네”(The law shall be your only antagonist)라고 말하며 결투를 포기한다. 소설이 출간된 1790년대에 영국에서 결투횟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Shoemaker 527) 및 엘름우드가 이전 프레더릭과의 두 차례 결투를 모두 수락했다는 사실은 엘름우드의 이례적인 거부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게 한다. 결투가 그 자체로 분노 및 난폭함과 같은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행위라면, 엘름우드의 거부는 그가 그러한 열정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시사한다. 이제 그는 마그레이브와 같은 탕아들이 속한 무법적인 세계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법과 같은 보다 공적인 규범의 세계에 문제해결을 맡긴다. 여우 사냥을 즐기고(246) 부녀자를 함부로 강탈하는 마그레이브가 방탕하고 난폭하며 거친 고전적인 귀족유형을 대변한다면, 엘름우드는 이제 열정에 이끌린 결투 대신 법이라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규약이 지배하는 세계로 편입하면서 자신을 추동했던 분노와 같은 감정을 벗어난다.12)
마지막으로 엘름우드의 행위를 추동한 근본적인 원인인 열정적 사랑의 불안정성은 지속성이 강조되는 러시브룩과 마틸다의 관계를 통해 봉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러시브룩은 여러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마틸다와의 로맨스 구도에서, 심지어 마틸다의 구출장면에서조차도 존재감이 약하면서도 동시에 항구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긴 하다. 이 사실은 두 번에 걸쳐 명시적으로 표현되는데, 서술자는 직접적으로 “그[러시브룩]는 마틸다를 어떤 상태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사랑해왔다”(He had loved Lady Matilda, in whatever state, in whatever circumstances, 250 원문강조)고 기술하며 후에 마틸다를 구출한 후 러시브룩은 엘름우드에게 허락을 청하면서 자신의 애정(affections)이 “굳게 결정되어”(fixed, 334) 있다고 말한다. 곧바로 엘름우드가 이 말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러시브룩이 자신의 애정이 다시 한 번 “변함없이 고정되었다”(Immoveably fixed, 334)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표현이 세 번 연속으로 반복됨을 볼 수 있다. 첫 대목에서 러시브룩의 사랑이 문자 그대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면 소설 말미의 반복은 불변성 자체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즉 러시브룩의 사랑이 갖는 불변성이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던 밀너-도리포스의 열정적 사랑에 응답하듯) 노골적으로 선언되는 셈이다. 요컨대 『단순한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러시브룩과 마틸다의 관계는 열정적 사랑의 불안정성을 제거하고 지속적이고 확실한 애정을 표상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4. 결론
그러나 『단순한 이야기』의 결말을 통해 텍스트의 전반부를 통해 제기되었던 열정적 사랑의 문제가 실제로 성공적으로 해결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 소설을 도덕적 우화에 가깝게 본다고 해도, 러시브룩과 마틸다의 로맨스 구도가 밀너와 도리포스의 로맨스 구도를 성공적으로 극복․대체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후자가 17세기부터의 감각론적 인간학의 발전에 힘입은 감성의 문화를 거의 한계에까지 밀어붙여 인간의 내적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전자에서 특히 러시브룩과 같은 인물의 역할은 기능적인 수준에 가깝다. 우리는 글의 첫머리에 제기한 문제, 곧 『단순한 이야기』 전반부와 후반부 간의 이질성이 열정적 사랑과 이상적 사랑이라는 상이한 양식의 공존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치볼드는 열정적 사랑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소설의 후반부를 덕성에 기초하여 불변성을 강조한 이상적 사랑이라는 보다 고전적인 양식에 기초해 구성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더 과거의 작품처럼 읽힌다.
인치볼드는 열정적 사랑을 탁월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한계까지도 분명히 드러낸다. 열정적 사랑의 한계란 그것이 불안정한 열정에 기초하기에 영원한 사랑을 보장할 수 없다는 데 있으며, 이는 열정의 논리 안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치볼드가 선택한 길은 소설의 후반부를 지속성과 확실성이 승리하는 이야기로 제시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엘름우드는 자신을 사로잡은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하며 마틸다와 러시브룩은 지속성과 확실성을 전면에 내세운 사랑을 약속한다. 그 결과 소설 전체에 걸쳐 도리포스의 감정교육이라는 일관된 서사가 만들어질 수는 있었으나 후반부에서 마틸다와 러시브룩의 관계가 피상적으로만 남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여성을 위한]올바른 교육”(A PROPER EDUCATION, 338)이라는 마지막 문구는 실제로 소설에서 마틸다의 교육과정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거의 아이러니에 가깝게 읽힌다.13)
18세기 영국 로맨스 소설의 역사에서 이처럼 두 개의 이질적인 양식이 공존하는 『단순한 이야기』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루만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변덕스러움은 결국 열정적 사랑을 영원성으로 향하는 자기완성의 서사 안에 포섭하는 데 성공한 낭만적 사랑으로의 ‘진화’를 통해서만 제대로 해결될 수 있었다.14) 낭만적 사랑은 열정과 미덕을 나름대로 하나의 체계 안에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영국에서 이 지점에 도달한 최초의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인치볼드를 읽고 참조하기도 한) 오스틴(Jane Austen)의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에마』(Emma),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와 같은 소설은 인물의 감정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최종적으로 합당한 배우자와의 결혼에 도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미덕의 계기 또한 강조한다(MacIntyre 239-43). 그와 같은 ‘해결책’이 등장하기 전에 나타난 『단순한 이야기』는 오스틴 소설들의 뼈대를 이루는 열정적 사랑과 미덕의 대립구도를 역설적으로 보다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루만의 비유를 받아 말하자면, 때로는 채택되지 않은 변종이 진화의 요인을 좀 더 잘 드러내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인용문헌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 정성훈 역. 새물결, 2009. [영역본은 Niklas Luhmann, Love as Passion: The Codification of Intimacy, trans. by Jeremy Gaines and Doris L. Jones, Cambridge: Harvard UP, 1986 참조]
Barker-Benfield, G. J. The Culture of Sensibility: Sex and Society in Eighteenth-Century Britain. Chicago: The U of Chicago P, 1992.
Breashears, Caroline. “Defining Masculinity in A Simple Story.” Eighteenth-Century Fiction 16.3(2004): 451-70.
Byrne, Paula. “A Simple Story: From Inchbald to Austen.” Romanticism 5.2(1999): 161-71.
Campbell, Colin. The Romantic Ethic and the Spirit of Modern Consumerism. Oxford: Basil Blackwell, 1987.
Castle, Terry. Masquerade and Civilization: The Carnivalesque in Eighteenth-Century English Culture and Fiction. Stanford: Stanford UP, 1986.
Hirschman, Albert O. The Passions and Interests. Twentieth Anniversary ed. Princeton: Princeton UP, 1997.
Inchbald, Elizabeth. A Simple Story. Ed. by J. M. S. Tompkins. NY: Oxford UP, 2009. [Oxford World’s Classics Ed.]
Lott, Anna. “Sexual Politics in Elizabeth Inchbald.” SEL 34(1994): 635-48.
MacIntyre, Alasdair.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3rd. ed. Notre Dame: the U of Notre Dame P, 2007.
Min, Eun Kyung. “Giving Promises in Elizabeth Inchbald’s A Simple Story.” ELH 77(2010): 105-127.
Mortensen, Peter. “Rousseau’s English Daughters: Female Desire and Male Guardianship in British Romantic Fiction.” English Studies 4(2002): 356-70.
Rogers, Katharine M. “Inhibitions on EIghteenth-Century Women Novelists: Elizabeth Inchbald and Charlotte Smith.” Eighteenth-Century Studies 11(1977): 63-78.
Shoemaker, Robert B. “The Taming of the Duel: Masculinity, Honour and Ritual Violence in London, 1660-1800.” The Historical Journal 45.3(2002): 525-45.
Spencer, Jane. Introduction. Inchbald, vi-xx.
Stone, Lawrence. The Family, Sex and Marriage: in England 1500-1800. NY: Harper&Row, 1977.
Ward, Candace. “Inordinate Desire: Schooling the Senses in Elizabeth Inchbald’s A Simple Story.” Studies in Novel 31.1(1999): 1-18.
1) 『단순한 이야기』를 해방(liberation)과 전복(transgression)의 코드로 읽는 캐슬은 마틸다 역시 마찬가지로 전복적인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마틸다의 수동성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는 입장은 인치볼드의 동시대인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부터 있어왔으며(Ward 13),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현대의 평자로는 번(Byrne)과 로저스(Rogers) 및 롯(Lott) 등을 참조하라.
2) 워드(Candace Ward)의 해석 역시 이러한 뼈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때 마틸다는 “감성과 성에 대한 [도리포스의] 반동적 태도의 산물”(the product of reactionary attitudes toward sensibility and sexuality, 13)로 간주된다. 유사한 전제를 공유하되 당대의 남성성(masculinity) 담론에 보다 밀착한 해석으로는 브레셔스(Caroline Breashears)를 참조. 민은경(Eun Kyung Min)의 글은 도리포스의 변모에 초점을 맞추되 소설을 “계약”(contract)과 “선물”(free-gift), “약속”(promise)을 중심으로 한 “도덕적 우화”(moral fable)로 읽는다는 점에서 다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106).
3) "passion"은 17-18세기 영국사상사에서 통상 “정념”으로 옮긴다. 그러나 루만은 이 단어가 본래 몸의 충동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인간 행위의 수동성을 함축하다가 17세기 후반부터 (특히 로맨스 텍스트에서) 점차 인간 행위의 능동적인 성격 또한 아울러 가리키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루만의 책 6장을 참고). 따라서 이 글에서는 루만의 강조점을 반영하고자 “열정”을 역어로 채택한다.
4) 이후 루만의 텍스트를 인용할 때 국역본을 따르되 몇몇 개념어의 인용에 있어서는 영역본을 참고하여 영어병기를 하도록 한다.
5) 18세기 말부터 영국소설에 성행한 “낭만적 사랑”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은 콜린 캠벨(Colin Campbell)의 책 26-27쪽 및 로렌스 스톤(Lawrence Stone)의 책 282-87쪽을 참고.
6) 물론 열정에 기초한 인간형에 대항해 자기통제의 미덕을 강조하는 흐름 역시 계속해서 공존했다. 바커-벤필드의 책, 특히 3장을 참고.
7) 감성의 논리와 결부된 인간학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바커-벤필드의 책 1장을 참고(1-36). 그가 지적하듯 이 문제는 특히 강한 감성을 갖추었다고 간주된 여성들의 능동적 행위 가능성을 둘러싼 담론의 형성과 이어져 있다.
8) 『단순한 이야기』에서 약속이 갖는 확정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민은경의 글 1절을 참고(107-110).
9) 18세기 영국에서 결투는 감성의 이상에 반하는 것이며 동시에 결투자들이 열정과 분노에 지배당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는 슈메이커(Robert B. Shoemaker)의 지적을 참고(541).
10) 실제로 후반부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어휘들(“angry”, “angrily”, “enraged”, “rage” 등)이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해 분노의 열정 자체는 전후반부 모두 빈번히 등장하지만, 전반부가 그것을 상쇄해줄 긍정적인 열정들이 산포되어 있음에 비해 후반부에서는 분노와 원한을 상쇄해줄 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분노의 열정은 주로 엘름우드 경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대신 이를 보완이라도 하듯 샌포드, 마틸다, 우들리 양은 슬픔에 잠겨 우는 장면이 잦아진다(특히 샌포드는 후반부에서 가장 빈번하게 눈물을 흘리는 인물 중 하나가 된다).
11) 3권 14장의 엘름우드와 마틸다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목이나, 인치볼드는 이 대목이 엘름우드의 태도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12) 실제로 소설 후반부에서 그토록 자주 화를 내던 엘름우드는 4권 9장 및 10장에서 단 한 번도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13) 18세기 영국의 가장 중요한 소설 중 하나인 『파멜라』(Pamela; or, Virtue Rewarded)와 비교하면 인치볼드의 난관이 좀 더 뚜렷해진다. 마찬가지로 전후반부의 이질성이 논쟁점으로 거론되는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의 소설은 감성과 열정을 갖춘 여주인공을 내세우되 그녀와 Mr. B의 로맨스 자체는 덕성과 결혼을 지향하는 것으로 제시했으며—루만이 지적하듯 리처드슨의 텍스트에서 결혼은 덕과 성, 사랑을 결합한다(154 및 191)—양자의 어긋남은 텍스트의 구조적 일관성에까지 영향을 준다. 그러나 『단순한 이야기』에서는 열정적 사랑이 이미 결혼을 무너트리기에 이르렀고, 그 틀을 유지하면서 해법을 찾을 수는 없었던 인치볼드는 (아마도 자기 자신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을) 다른 양식을 끌어와야만 했다.
14) 사랑의 양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바라보는 이론적 설명은 루만의 책 4장을 참고.
'Critiq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추모하며 (10) | 2016.05.21 |
---|---|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비판적 논평(4/6 갓뫼포럼 토론문) (6) | 2016.04.08 |
더불어민주당 2016년 총선 청년정치/청년정책 단평 (0) | 2016.03.19 |
한 '매맞는 아이'를 위하여: <약체, 인문학>에 대한 반비판 (0) | 2016.03.05 |
누리미디어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13) | 2016.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