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6일 일기. 서울시향, 말러 교향곡 6번.

Comment 2016. 1. 17. 03:10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6번 연주회에 다녀왔다(티켓을 선사해주신 분께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오프닝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이 있었고--모차르트라는 사실은 이후에 찾아보고야 알았는데, 곡 자체가 "한 발자국 씩 더 나가는" 성격을 지닌 것처럼 들렸다--잠시 쉰 후 말러의 곡 총 4악장이 1시간 반 정도 휴식없이 연주되었다. 당초 예정되었던 지휘자 정명훈이 한국을 떠남에 따라 부지휘자 최수열이 지휘를 맡았다. 1층 객석은 거의 꽉 들어찼고, 2층과 3층도 절반 넘게 찼으니 성황인 셈이었다(50% 할인을 받아 15000원만 지불하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하다...그것이 누구의 공이든 간에, 지난 10년간 서울시향의 발전상을 폄하하는 이의 안목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필사적이었을 연주자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으리라. 처음으로 들어가 본 콘서트 홀은 매우 컸고 갈색의 나무빛깔과 은빛의 조명, 검은 그림자가 교차하는 공간은 일상에서 잠시 옆으로 새어나오고픈 이들을 위한 마법과 같은 이질감으로 들어차 있었다. 공연을 비스듬히 바라보아야 했던 위치 때문인지, 중간중간 천장과 객석을 훑어보았을 때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고 그래서 이 공간의 이질감은 더욱 강했다.

나는 클래식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음악적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고, 더불어 말러는 완전히 처음이다(내가 이 시기의 음악을 들은 건 쇤베르크 몇 곡이 전부다). 따라서 내가 시작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말러의 곡을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고 구조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연주의 질을 평가할 능력 또한 없다(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동석한 지인들은 매우 만족스럽게 들었다). 내게는 단지 순간의 음과 선율에 대한 일차원적인 인상, 그리고 시각적인 이미지가 남아있을 따름이다.

어떠한 배경지식도, 청취력도 없이 순전히 순간의 집중력만을 그러모아 들었을 때 곧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쟁터의 그것이다. 무엇보다 강렬한 타악기들을 포함해 수많은 음들이 중첩되어 휘몰아치는 광경은 여러 군세가 맞부딪히는 전장과 같다--음들의 지속적인 축적이 일정수준을 넘을 때 연주는 시간적인 것에서 공간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전장의 이미지는 부분적으로 시각적인 인상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맨 앞쪽 좌측 구석에서 무대를 올려다볼 때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파트가 시작되기 직전 활을 수직으로 높게 드는 모습은 적과의 충돌 직전 칼을 높이 든 보병부대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Tragische이라는 별칭에서 전장의 참혹함과 슬픔, 좌절만을 떠올리게 되지는 않는데, 음과 선율들에 깃든 에너지는 배경에 깔린 음울함과 불안감을 때로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활기차기 때문이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전투에 임하는 각각의 정신들은 유머와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눈에 세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종다양한 악기들이 어떻게 단순한 음 덩어리로 뭉개지지 않으면서 각자 고유한 위치를 찾아 하나의 전체로서 성립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곡가와 연주자의 기교를 쫓아갈 수 있을만한 수준의 인식능력이 필요하겠지만, 내게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다만 최대한 소리를 섬세하게, 뒤섞지 않고 조화롭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노력에 필요한 체력과 집중력에 비하면 세 차례 울려퍼진 거대한 나무망치의 충격을 쾌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쉽다(망치의 타격 이후 천장을 향해 피어오르는 먼지가 다시금 전장의 이미지를 강화했다는 것도 덧붙인다). 내 노력이 성공적이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악기가, 너무나 많은 음들이 있었고, 내 집중력은 생각보다 일찍 밑천을 드러냈다. 나는 단지 많되 그것이 무언가 의도된 효과를 추구했다는 인상만을 기억한다(다만 거대한 하프의 경우, 소리가 다른 악기들에 묻히는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는데, 내가 단지 그 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육중한 소리-집합체들의 사이로 가늘고 높은 음/선율 하나가 길게 질주하는 광경. 때로 한 선율에 그러한 '주역'으로서의 자리를 부과한다는 점에서 6번의 말러는 이전 19세기에까지 허용되었던 구도를 여전히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망치의 용법이 곡 전체를 끝장내기보다는 음이 만들어낸 공간 안쪽에서 보다 구체적인 적수를 상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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