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신춘문예 평론당선작들을 읽고: 어떤 글쓰기 유형에 관하여

Comment 2016. 1. 14. 00:16

링크: 2016년 신춘문예 당선작 작품 모음. http://m.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4


고등학생 이후 한국문학에 깊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내일 세미나 준비가 하기 귀찮아서 링크에서 평론들만 읽어보았다. 나는 근본적으로 서사와 플롯에 집중하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이야기"로 풀어읽는 인간이라 상대적으로 시 장르에 흥미를 갖지 않는 편이다(전공상 낭만기의 영시는 종종 읽지만, 내게는 어쨌든 그것들조차 개념과 플롯의 구성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예년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문학평론 전체 7편 중 4편이 시 텍스트를 다룬 것이 조금 놀라웠다. 이 상황이 올해의 특수성인지, 혹은 협소해진 한국의 "본격문학" 장에서 시가 갖는 위상이 상대적으로 상승한 것을 보여주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비록 한국의 현대소설이 특정한 독자층들만이 읽는 일종의 컬트적 취미가 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나는 학부시절 친구의 자취방 책꽂이를 보면서 이 사실을 그야말로 체감했다) 여전히 한국"본격"문학장에서는 가장 지배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아닌 것인가?


평론들을 읽으면서, 물론 일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텍스트 읽기 자체보다는 그러한 질료를 통해 만들어지는 서사화의 방식에서--학술과 비평 또한 역사만큼이나 서사를 갖는다!--과연 필자들이 본인의 주장이 정말로 "유효"하다고 믿을지 의문이 든다. 솔직히 말해 올해의 것을 포함해 내가 지금까지 읽은 몇 안되는 평론들 중 다수는 텍스트를 특정한 비평이론적 개념, 다시 말해 (영문학을 경유해 한국에 들어온) "현대 프랑스철학" 및 그 후신들에서 사용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린다. 이걸 읽어도 주체의 문제, 저걸 읽어도 주체의 문제라는 식이면 솔직히 어떤 문학을, 평론을 읽든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프로이트든, 알튀세르든, 라캉이든, 지젝이든, 뭐든 간에 결국 모든 텍스트가 주체의 곤경과 그 전복/해방/극복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책이나 붙잡고 단 한번 읽은 뒤 다시는 문학을 읽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문학텍스트는 주체의 해방가능성에 중독된 독자들이 금단증상을 느끼기 전에 뇌의 혈관에 꽂아넣어야 하는 약물이라도 된단 말인가(마약씩이나 될 수 있다면 문학에겐 과분한 평가인가?)? 정치적인 감수성을 자극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밝히는 게 문학의 효용이라면, 나는 이걸 훨씬 더 구체적이고 치밀한 수준에서 실현하는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저널리즘적 기록물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짧게 말해 한국 문학평론의 한 전형으로서의 주체중독 장르는 그 텍스트가 왜 중요한지, 혹은 심지어 해당 평론 자체를 왜 숙고해 읽어야하는지 별다른 설득력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는 부분적으로 "문학평론"이 더 이상 지적인 글쓰기에 속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주체중독 장르에서 이론을 활용하는 방식은 7-80년대 미국 영문학계의 좌파 정치를 지향하는 일부가 만들어놓은 패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신비평적 훈련의 결과에 따라)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그것을 적당히 주어진 "주체 해방의 이론적 서사"에 기입해 논문을 만들어낸다(유사종으로 모든 문학을 데리다적 해체deconstruction의 사례로 읽어내는 논문장르가 있는데, 이건 아주 탁월한 소수를 제외하면 끝까지 참고 읽어도 인용해서 써먹지 못하기 십상이라 마주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오늘날 영문학이 매우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함에 따라 필드마다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90년대 중후반쯤을 기점으로 이런 글들은 아주 드물게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무슨 값을 입력해도 "오늘은 맑음!"이라는 값만 출력하는 마술상자가 손님들을 더 이상 끌지 못하는 상황이 놀라울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직전까지 페이퍼를 쓰느라 몇 십년에 걸쳐 비평사가 뒤바뀌는 걸 훑어본 영문과 대학원생에게 한국 문학평론의 주체중독 장르는 상당히 신기한 물건인데, 마치 어느 외딴 섬에 불시착했더니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종이 진화를 멈추고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새끼를 불리는 광경을 보는 듯한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바로 그 7-80년대 영문학/비교문학의 좌파 후신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목적에 좀 더 일관되기 위해서는 "고급" "본격" 문학텍스트만 다룰 게 아니라 보다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데올로기나 담론을 추출해나가는 작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고, 믿은 대로 실천했다(적어도 자신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그 산물인 90년대의 신역사주의에 대해 다소 복잡한 태도를 갖고 있지만, 어쨌든 그러한 흐름이 나름대로의 이론적/윤리적/정치적 입장의 실현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한국의 주체중독 장르를 보면 여기에는 오로지 "본격문학"(영화가 드디어 말석에 끼었다! 만세!)과 이론텍스트 인용만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장르의 필자들에게는 근대성을 논하는 이론 몇 개를 인용하는 걸로 현실의 설명이 끝난다. 가끔 성의가 있으면 사회 이슈도 한 두건 끌어오지만, 어차피 이것도 그럴싸한 이론을 덧붙여 마무리될 것이다. 요컨대 여전히 선별화된 문학텍스트 독해와 현실의 외피를 둘러썼지만 실제로는 매우 단순화된 이론의 조합물에 불과한 무언가, 이 두 가지 요소가 주체중독 문학평론을 구성한다.


나는 이론의 활용 자체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지만, 모두가 비슷비슷한 이론을 인용하느라 정작 현실을 설명하는 정보값에서는 그닥 유의미하지 않은 글들이 독자들의 지적인 욕구를 자극하리라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한국은 근대화 혹은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모델이 어떠한 변수 없이 그대로 실현되는 곳이 아니며(사실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한국문학이 특정한 이론적 의제만을 반영하는 모나드도 아닐 것이다. 현실인식의 단조로움은 문학읽기의 단조로움 또한 초래하는 법이고, 주체중독 장르는 그 좋은 사례다. 충분히 복잡하고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유독 특정한 장르에서는 단조로운 공간으로 비춰진다면, 그 장르의 글쓰기가 지나치게 단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는 있다--평론과 맞닿아 있는 친구들이 내게 단 한번도 "읽을만한, 통찰력 있는 평론"을 추천해주지 않는 걸 봐서는 문외한인 나의 의심이 아주 무근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이 장르는 이론적으로 좌파를 지향하지만 좌파정치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어떤 좌파도 찾아읽지 않는 글들이 되었다.


물론 이는 단순히 평론가 지망생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글들은 문장력의 매력이 부족했다"는 말로 당선작과 탈락작을 가려내는 심사위원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면, 등단을 꿈꾸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사고를 뻔한 기성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압력에 굴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초기 진입자들이 먼저 우월한 위치를 확보한 후 새로운 진입자들의 역량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은 문예평론장에도 딱히 예외는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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