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8일 일기. 한 해의 마무리, 시민됨에 관하여.

Comment 2015. 12. 28. 03:48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5년을 마무리하는 짧은 소감.


1. 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같은 사회구성원을 자신과 같은 권리를 가진 동료시민이자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성별, 성적지향, 인종, 민족, 지역, 장애, 병력, 경제적 계급, 학력, 학벌, 연령, 사용언어, 정치적 입장...등등 (내가 표기하지 않은 요인들을 포함해 인간을 규정하는 다양한 기준들)에 무관하게.


2. 사회구성원을 시민으로 만드는 것, 곧 그를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는 것 못지 않게 다른 사회구성원을 동료 시민/인격으로 존중하고 대우할 줄 아는 인격체로 교육시키는 것은 상당히 많은 비/제도적 노력을 요구한다.


3. 현재 한국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유감스럽게도 원활환 시민교육을 위해 조성된 비/제도적 환경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현재의 한국인 다수는 정상적인 시민으로서 교육받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서로를 동료시민으로 대하는 사고/행동양식을 습득하지 못했다.


4.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소라넷에서 벌어진 경악스러운 범죄행위, 그것 혹은 그것이 즐겨 자행되는 공간을 공개된 게시판에 명시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 그러한 행위를 알면서 동조/묵인해온 사람들은 특히 여성을 동일한 시민/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시민됨의 기본요건을 결여하고 있다.


이성애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를 자의적으로 비난하고 모욕하며 그들의 인권과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극우 개신교 집단 역시 마찬가지로 시민됨의 기본요건을 결여한다.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피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극한지점까지 악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에 대한 전제적인 지배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법과 정치, 비제도적 수단을 악용하는 사용자들 역시 마찬가지다(모든 사용자가 악랄한 사용자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악랄한 사용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는 때때로 조직 내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도 관찰된다.


비합리적인 두려움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근거해 장애아동/청소년을 위한 교육시설의 도입을 맹목적으로 반대하며 조정을 위한 어떠한 의사소통과정도 거부하는 사람들 역시 장애인들을 동료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시민됨의 기본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적/행정적 권력집행에 의해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이들의 몫을 포함해) 권력의 작용에 정당한 이의를 제기할 때, 그러한 행위가 현재의 정부/국가를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비인격적인 모독을 가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로지 "규제 반대"만을 외치며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스스로가 얻는 이득을 탐할 뿐인 이데올로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새로이 태어나고 성장 중인 시민들의 피교육권을 침해하고 그 양과 질을 하락시키는 정치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의 힘이 사회구성원의 역량에 기초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들이 시민권만이 아니라 사회 자체의 공공선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지 물을 수 있다.


위의 모든 사례들을 포함해 시민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가 지켜지지 않는 것을 넘어 인지조차 되지 않는 경우를 올 한 해 셀 수 없이 목도했다. 2015년에 우리가 확인한 것은 한국이 타인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그들 자신의 권리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및 체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었다.


5. 앞서 말했듯 시민됨의 기본 요건은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비/제도적 노력을 요구한다. 단지 올바른 권리개념을 제공하는 교육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질적으로 활용하고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갖가지 장치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 시민의 권리가 위배되는 것을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문화의 정립과 같은 것들 말이다.


6. 나는 시민됨, 권리,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지 않는다(마술지팡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을 최대한 정립시키고 활용하려는 노력과 인내심이 더 나은 변화의 기본적인 초석이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언어 및 개념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민됨을, 권리를, 제도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7. 앞서 말했듯 2015년은 곳곳에서 결여를 확인한 해였다. "헬조선"은 삶의 질의 결여와 함께 결여를 바꿀 동력의 부재를, 그러한 동력의 창출이 과거로부터의 족쇄에 눌려있음을 외치는 고통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과거에서 되돌아온 유령들과 싸우고 있다.


8. 2016년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결여를 조금씩이라도 채워나가는 여정의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한국은 여전히 대통령, 여당, 정부, 재벌,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무게추가 쏠려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이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이 철저히 부정적인 상황이라면, 그만큼 철저하게 제로에서 시작한다고 마음먹는 편이 조금 더 기운나는 출발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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