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일기들.

Comment 2015. 8. 2. 10:05

1.



진지한 인문학 연구자들 중에서 인문학의 무용함을 체념어린 어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인문학적 수련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체득한 고결한 인간을 만든다고 외쳐대는 인문학 신비주의자들을 비웃으면서 스스로의 체념을 현실적인 태도로 간주하곤 한다. 인문학 신비주의자들의 반지성적 믿음을 조롱하기는 쉽기 때문에 사회는 인문학 회의주의자들이 정직한 이들이라고 소리높여 칭송하는데, 물론 정말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들은 이 신비주의와 회의주의 간의 거짓된 이분법을 문제삼을 것이다. 신비주의자가 자신이 간직한 인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둔하다면,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도구가 맞닥트려야 할 현실을 사고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순진하다; 전자는 인문학에게 초월적인 위치를 부여하기에, 후자는 인문학과 현실과의 관계를 단 한번도 깊이 사고해보지 않았으면서도 판결문을 낭독하기에 주저함이 없기에 양자는 마찬가지로 월권을 행사한다. 어느 윤리학 전공자가 솔직히 인문학이 현실에 보탬이 되는 게 별로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 걸 기억하는데, 그의 현실이란 게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기에 자신이 훈련받은 사고를 적용할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한번도 병뚜껑을 보지 못한 이가 병따개의 효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인문학(들)의 분화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다층적인 면모를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결과이며, 역으로 다면체로서의 현실은 그 복잡성을 이해할 사유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다. 인문학적 사유는 복잡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오로지 심벌즈를 치는 동작밖에 할 수 없는 원숭이 인형처럼 단순하고 과격한 말덩어리로 전락한다. 사고가 사고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문은 현실에 침잠해야 한다. 추상적이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삶의 다면성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그러한 노력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어떠한 죄책감 없이 가하기 마련인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힘이다. 사유는 우리의 무지로부터 배태된 상처에서 솟아난 고통을 통해 태어나며, 그와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힘이다. 과거-현재에 태어난 사유는 현재-미래에 벌어질 폭력을 막는 의무를 갖는다. 세계의 복잡함은 학문적 인식을 통해 우리가 서툴고 폭력적인 결단에 너무 성급히 이끌리지 않도록, 그래서 미래의 죄를 짓지 않도록 조용히 우리의 소매를 붙들고 더 나은 길을 속삭인다.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분과에서 연구자들은 우리의 의사소통과 그에 내재된 사고과정을 다루었다. 의사소통과 사고라는 메커니즘은 여전히 인간학적 사실로 남아있으며, 그 과정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문제들이 소진된 적은 아직 없다. 그리고 인문학은, 그 자체가 계속해서 갱신 중인 사고들의 집합으로서, 자신이 다루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한 유의미한 도구모음이기를 그친 적이 없다. 폭력과 고통이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그것들이 투사되고 배태되는 의사소통장(場)이 사라지기 전에 학문의 시의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문학과 현실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학문의 무용함을 외치는 게 아니라 학문이 어떻게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학문 앞에서 현실이 어떤 면모를 보여주는가를 묻는 일이다. 창고에 얌전히 걸어두는 대신 삽질을 할 때 삽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듯이, 학문의 의미는 현실의 거대한 축적체를 향할 때에만 비로소 그 보유자에게 드러난다. 학문의 죽음은 어떤 풋내기의 자의적인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어떤 가치있는 분석도 제공하지 못하게 될 때 갑작스럽게 찾아오며, 그때 우리는 그 곁에서 세계가 그때까지 밝혀졌던 것보다도 더 다면적임을 보여주는 새로운 학문을 마주할 것이다.



2.


[미국 동성혼 케이스를 포함해 소수자와 사회주류의 '같음'을 강조하여 전자의 권익을 확장을 꾀하는 운동전략의 보수적 기원 및 한계를 지적하는 글에 대한 댓글]


저는 "같음" 전략의 득세를 단순히 우파적/전술적인 기원 못지 않게 사상사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60년대 후반부터 8-90년대까지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 신좌파적 담론들의 기저에 (자유주의적 보편성을 비판하면서) 개별자의 특수성/단독성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는 태도가 있었다면, 80년대 후반부터 (심지어 '프랑스 이론'계를 포함해) 보편성을 다시 전유하려는 사상들이 계속해서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바디우는 <윤리학> <철학을 위한 선언>을 썼고, 지젝은 첫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냈으며,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를 연재했고, 90년대 초에는 버틀러가 <쩬더 트러블>을 썼죠; 이 텍스트들은 포스트담론을 깊게 이해하고 전유한 이들이 보편성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하기 시작헀다는 점에서 미약하게라도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리고 90년대부터 (한 발작 늦게 수입하기 시작한 한국은 이떄부터 2000년대 중반 까지가 포스트담론의 전성기였고, 여전히 지젝이 포스트모던 담론의 계승자 정도로나 이해되고 있지만) 보편성의 문제를 좌파정치철학담론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영미의 공동체주의 철학이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신 니체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나 전통과 같은 '공통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죠. 미국 동성혼 운동이 이러한 시도들을 직접적으로 전유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하겠지만(그리고 어쨌든 그 보편성의 담지자가 국가-정부라는 사실이 남지만), 이질성이 아닌 보편성으로부터 기초한 담론들이 점차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저는 이러한 흐름이 득세하는 상황을 좀 더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하지만 한국의 좌파 이론, 특히 주체성의 문제를 고찰하는 사람은 공동체와 보편성이라는 키워드를 (설령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고요.



3.


삼가 故 김수행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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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이상 2015.08.02 11:55 신고 Modify/Delete Reply

    혹시 Begray님은 아래 링크한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http://www.civiledu.org/826

    저 역시 자주 남발하곤 하는 '인문학적'이라는 말에 약간의 거북함을 느꼈거든요.

    • 개선비 2015.08.03 01:03 신고 Modify/Delete

      저는 단지 지나가는 과객(생각해보니 의미가 중복되네요?)이오나 제가 관심있는 분야라 글을 답니다.
      저는 링크의 글의 논증을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일단 세속적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문학은 애초에 저 글에서 옹호하는 인문학이랑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공학을 결합시켰다고 말하는 사람 붙잡고 어떤 식으로 결합했는지 물으면, 잘해봤자 스티브 잡스가 리버럴 아츠 컬리지에서 무슨 수업 들었다는 수준의 답만 나옵니다. 정확히 어떤 게 애플의 인문학인지 종용하면 인간에게 편하다는 둥 그런식으로 넘어가려하죠. 애초에 저쪽 세계에서 상정하는 인문학의 개념은 본래 표현하는 인문학과 다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속적 인문학은 인문학을 오해한다기보다는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게다가 링크의 글은 인간과학을 인문학의 '인'자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일종의 학문적 공통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인간과학으로 인한 철학의 붕괴와 그것의 극복이 꽤나 중요한 문제였으며, 지금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철학 스스로가 표방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애초에 인문학이 '인간을 위한 학문'따위의 세속적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인문학을 저런식으로 확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역사를 정확히 몰라서입니다.
      그래서 각 학문에 대한 개념서술도 (적어도 철학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철학을 흔히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체계적 담론으로 규정하는데, 만약 철학이 질문 그 자체면 학문이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공허할 뿐이고요. 마치 재즈는 자유 그 자체다!는 식의 주장처럼요. 저분은 칸트 철학이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방법론 때문에 위대하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가지거든요. 결국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천으로서 칸트저작을 다루는 거고, 결국 목적은 철학적 문제의 해결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완벽한 존재론-인식론-윤리학적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며, 참된 철학이 가능하다면, 그 해답이 제시된 날 철학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실질적이기도 합니다. 시장의 축소, 학과의 폐지, 지원율의 하락, 정당성의 실추 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인문학 일반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과학주의적 담론이 유행하며 인문학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 앞(거기에 취업이란 문제 때문에 '문레기' 담론은 강화되고 있습니다)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분명 실제적이며, 인문학자라면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봅니다.

    • 개선비 2015.08.03 01:04 신고 Modify/Delete

      수정했습니다.

    • 비이상 2015.08.03 01:30 신고 Modify/Delete

      양질의 댓글 감사합니다.

    • BeGray 2015.08.03 01:31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 어차피 링크된 글이 아주 진지하게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길게 코멘트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소위 상품화된 인문학, 마법의 단어로서 어떠한 구체적인 힘도 갖지 못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이야 공감할 수 있지만, 분과학문의 차원에서만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것들을 총괄하는 표현으로서 인문학이라는 개념어가 갖고 있는 효용을 지나치게 성급하게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전문화된 분과학문적 사고는 그 순간의 특수한 필요에 의해서 생성된 것들인데, 그것만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학문의 역사적 성격을 간과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 비이상 2015.08.03 01:34 신고 Modify/Delete

      마찬가지로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2. 개선비 2015.08.02 21:59 신고 Modify/Delete Reply

    김수행 교수님의 타계 소식을 듣고, 우리에게도(물론 저에게는 조금 앞시대이지만...)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BeGray 2015.08.03 01:32 신고 Modify/Delete

      시대가 저문 것은 놀랄 게 없지만,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인가, 열린다면 어떤 시대인가가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유산을 필요로 하고 있고요. 그런 점에서는 쉽게 결별할 수 없는 과거이기도 합니다.

    • 개선비 2015.08.03 02:13 신고 Modify/Delete

      제 블로그에도 올렸지만, (한국적 특수성으로 인해 비유가 부적절할 수 있으나) 마치 메이지 시대가 정말 메이지 덴노와 함께 끝난 것 같은 허무함과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을 당시 지식인들이 느낀 것처럼, 마치 이전 시대가 단절된 느낌으로 현 시대로 내팽개쳐진 느낌입니다. 의식적 단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단절감과 공포감이죠. 마치 '졸업'처럼.

    • BeGray 2015.08.03 02:42 신고 Modify/Delete

      음...사실 저는 그런 인상까지는 받지 못하고 있네요. 김수행 선생의 죽음 전에 이미 한국의 맑스주의는 각계각층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쪼그라들었고, 다른 형태의 운동들도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면서 좌파 학술장에서 맑스주의자들의 언어가 푸코주의자들 및 문화이론의 언어로 대체되었던 것에 비하면 그렇게 충격적인 전환도 아닐 뿐더러, 저는 애초에 맑스주의자로 출발할 수 있던 세대도 아닌지라. 오히려 현준 씨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현준 씨는 스스로가 김수행 선생으로 표상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가요?

  3. 개선비 2015.08.02 23:09 신고 Modify/Delete Reply

    그리고 제가 이전의 설전 이후 접한 열린연단의 김상환 교수의 강의가 '학문의 실천성'과 꽤나 연관성이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글을 보며 이해했던 것이 생각나 좀 적어봅니다.

    김상환 교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잡으면서, 현대 철학이 '윤리적 전회'를 갖게 된 것은, 이전 시대의 '언어적 전회'로 야기된 파편화로 이한 혼란 때문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이러한 '윤리적 전회'가 (김상환 교수는 두 글을 다른 맥락에 배치하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이유는 보편성과 다원성이라는 상충된 가치 체계에서 진정으로 통합된 윤리적 담론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윤리 이론의 담론이 과잉될 뿐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고 평합니다.(김상환 교수는 이를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인용합니다) 윤리적 전회가 맥락을 갖고 있는만큼이나 이에 대한 반대 세력(바디우의 표현에 따르면 소피스트와 반-철학)도 맥락을 갖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주지할만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다른 것은 몰라도 (김상환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바디우 해석에 따르면) 진정한 철학의 가장 큰 적은 소피스트적 회의주의나, 반-철학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철학의 세속화(바디우는 '상식의 철학'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인만큼, 철학의 대중화가 문제라면 문제지 회의주의는 진정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회의주의는 결국 철학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상호 교류하며 철학을 발전시킨 담론체계이지만, 철학의 세속화는 결국 철학의 탈이론화를 부추김으로써, 철학의 진정성을 무너뜨리는 법이니까요.(철학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쉬운 철학, 대중적 인문학이 전 더 큰 문제로서 공통의 적이되어야 하며, 회의주의적 담론은 적이겠지만, 오히려 철학적인 극복의 대상으로서 필수적이라 봅니다. 김경만 교수가 제시하는 하버마스-로티 논쟁이 그러한 맥락이겠죠. 학문의 실천성은 확실하다기보다는 탐구의 대상으로서 연구되어야만 합니다.

    • 개선비 2015.08.02 23:23 신고 Modify/Delete

      조금 흥미로웠던 것이(학문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점에서) 김상환 교수는 한나 아렌트나 발터 벤야민의 유행(?)이 윤리적 전회라는 맥락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해석합니다. 최근 아렌트 연구자가 낸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퍼블리카로'는 그런면에서 형님이 쓰신 니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윤리적 전회를 모두 보여주는 상징적인 제목인 것 같습니다.

    • 개선비 2015.08.02 23:29 신고 Modify/Delete

      그리고 그 글에서는 세계화와 다원하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윤리적 과잉으로 인해 담론 경쟁이 유발된다고 주장합니다. 세계화를 상징하는 칸트 윤리학과 차이를 상징하는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차이의 윤리학으로, 각론으로는 윤리적 개인주의vs공동체주의, 의무의 윤리학vs덕의 윤리학, 보편주의vs상대주의가 등장합니다.

      저는 현대 철학 쪽은 세부적인 부분만 배워서 맥락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김상환 교수의 강의만 보고 얘기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설등력 있는 주장을 하시더라고요. 물론 대책은 사실상 없는 것이라, 마지막 문단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새로운 역사적 정향을 찾기가 쉽지 않을듯 해서요.

    • 개선비 2015.08.02 23:59 신고 Modify/Delete

      사실 김상환 교수의 강연 주제에서 제시된 문제가 크게 나아가면 이론-실천 문제의 해결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러한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니까요. 이론-실천 문제에 대한 김경만의 주장과는 다른 맥락인데, 이 쪽이 제 전공이랑 밀접해서 더 공감이 갑니다. 예전에 비판했단 문제 중 이 문제에 대한 지적도 포함됐었는데, 그때는 좀 무디게 여러 부분을 건들었었네요.

    • BeGray 2015.08.03 01:36 신고 Modify/Delete

      "보편성과 다원성이라는 상충된 가치 체계에서 진정으로 통합된 윤리적 담론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당장 현준 씨가 제기한 문제들에 전부 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공동체주의든 자유주의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변을 펼친다고 덧붙일 수는 있겠습니다. 바로 이 주제에 대해서,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번역이 매우 아쉽지만)을 읽어보시면 좀 더 사상사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한 입장을 접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매킨타이어의 책은 왜 현대의 윤리적 입장들 사이의 (해소될 수 없는) 경쟁이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통합된 윤리적 담론체계 또는 공통의 세계관의 부재에서 찾고,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서 다시 복구하려는 기획이기 떄문입니다.

    • 개선비 2015.08.03 02:09 신고 Modify/Delete

      그런 시도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바우어 또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고 제가 인용한 글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시도들이 극복할 근원적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메킨티이어의 논의는 조금 부정적인 게 덕 담론이 특정 공동체를 남어선 보편적 세계질서 내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부터 저는 회의적입니다.

    • BeGray 2015.08.03 02:19 신고 Modify/Delete

      매킨타이어의 해결책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공동체주의를 받아와서 공동체'들' 각각의 윤리규범의 상호존중으로 나아가는 케이스도 염두에 둘 순 있겠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에 가해지는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인 "덕 담론이 특정 공동체를 남어선 보편적 세계질서 내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가 매킨타이어의 텍스트에 온전히 해당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덕의 상실>은 분명히 그것 이상의 문제의식 역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덕의 상실>의 핵심은 단순히 공동체적 관습/덕의 부재와 복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서구인들이 합의하던 공통의 세계 이해 자체가 무너진 것--이것이 설명하신 대로라면 "근원적 문제"일텐데--자체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 어떤 세계관을 재구축하는 데 있는 거죠. 읽어보셨다면 "덕"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매킨타이어가 누차 강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 BeGray 2015.08.03 02:25 신고 Modify/Delete

      덧붙이면 매킨타이어의 텍스트는 "윤리적 과잉으로 인한 담론 경쟁" 자체가 (중세 및 고대적 세계관과 결별한) 근대적 세계관의 필연적인 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체주의자들의 논의가 김상환 선생이 이야기한 vs 도식들에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도 불분명할 뿐더러(어쨌든 적어도 매킨타이어와 테일러는 근대적 조건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고 있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칸트vs레비나스 와 같은 대립구도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게 이들의 작업에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준 씨가 제시한 표준적인 비판이 그렇게 말끔하게 적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개선비 2015.08.03 08:44 신고 Modify/Delete

      일단 전 매킨타이어가 공동체주의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계적이라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언급한 김상환 선생의 글에서도 공동체주의 담론을 이끌고 있는 것은 헤겔 철학의 해석자들입니다. 덕 이론 자체가 보편주의적이기 힘들어 세계화-다원화란 모순적 사회 변화 속에서 양 쪽을 담지하는 보편적이면서 특수한 이론이 되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한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요.

      특정 맥락을 잘 짚었다고 그 책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한 문제는 단지 공통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세계관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란 문제들로 인한 위기입니다. 언어적 전회 시점에서 우리는 언어-사고-존재의 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는 인식론의 문제와 더불어 개인들의 합리적 소통 가능성에 대한 크나 큰 도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는 흔히 다른다고 여겨지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안에서도 독립적으로 각각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즉 이러한 철학전 난제를, 단순히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식으로나 그러한 사고는 근대의 특수적 사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무마해버리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주장을 하더라도 의미 회의주의 문제처럼, 담론체계 자체로서의 도전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면, 논증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수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애초에 언어-사고-존재의 도식이 깨진 상황에서 담론체계라는 언어적 영역이 사고나 더 나아가 세계와 어떻게 연관성을 갖길래 세계를 그려내냐는 설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제가 오찬호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이러한 괴리에 대한 극복을 수사적으로 호도하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해결책, 윤리를 가능케하는 힘을 가진 이론-실천의 가교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필수적인데, 김상환 교수의 글에서는 이때까지 그러한 시도들이 특정 특수성을 기반으로한 체계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디우처럼 유물적 합리성을 주장하는 사람조차도, 기존의 서양식 신비주의적 윤리학의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는 부분(김상환 교수는 이러한 신비적 부분을 칸트의 물자체, 라깡의 a, 지젝의 똥 등 서양철학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이 있으며, 이러한 빈 공간을 기독교적 '부름'이 파고들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진리에는 유보적이며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 김상환 교수가 동양철학 등을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열쇠가 지리적/역사적으로 다른 담론들과의 상호적인 이해 속에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현재의 답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칸트철학과 같은 일종의 전회가 있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무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공화국적 체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이론-실천의 괴리와도 상관이 있지 않은가하는 게 제 추측입니다. 크립키의 의미회의주의가 제시하는 논증은 아직 제대로 반박된 적이 없으나, 언어학자들은 아무런 위협을 못느끼듯이 말입니다. 아마 이 이러한 실천성이 가능하다는 문제에서 형님과 저의 의견대립이 유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실청성이 가능한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나, 그것이 이론과 같은 세계관적 해석과 정확히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대한 도전들(그러한 세계관이 가능한가에서부터 비롯하여)이 역사적 맥락을 가지는 것 이상의 함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담론과 해방을 더디게 읽고 있는지라 정확히 말을 못하겠는데, 김경민도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것처럼 한국은 실천적 영역을 과신하는 부분이 있으며(김경만이 제시하듯 이러한 믿음은 해외의 이론적 석학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는 형태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를 (공고히 혹은 해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근본적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 BeGray 2015.08.03 10:25 신고 Modify/Delete

      1. 매킨타이어에 관해서는 지금 자칫하다간 헛바퀴를 돌 것 같아서 정리가 필요할 것 같군요. 1) 저는 <덕의 상실>이 해결책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한 텍스트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그렇게 하지도 않았고요). 단지 그 텍스트가 '근대적 난제'를 제시하는 방식이 명쾌하고 설득력 있기에 읽어볼 만하다는 거죠. 2) 덕 이론의 약점에 대한 현준 씨의 진술(저는 그걸 공동체주의 계열 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라고 지칭한 건데)은 애초에 매킨타이어 텍스트의 인식적 가치를 이야기한 제 말에 반론이 될 수 없습니다--지금 덕 이론-공동체주의의 특수성을 지적한 현준 씨의 반응은 제 말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기계적인 반응처럼 보입니다. 3) 그러니까 <덕의 상실>을 이미 읽고 이해했는데 그의 진단이 현준 씨의 문제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고(대신 매킨타이어의 설명--주장이 아니라!--이 왜 부적합한가를 논할 수 있겠죠), 아니면 읽을지 말지 본인이 결정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덕 이론의 문제를 되풀이하는 건 제 관심사도 아니고 생산적이지도 않아요.

      2. "공통된 세계관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란 문제들로 인한 위기"란 표현은, 제가 김상환 선생의 저술을 읽지 않아서겠지만, 제게는 다소 불투명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대목 이후부터 현준 씨의 진술은 제게 무척이나 교과서적인 철학문제에 대한 진술 혹은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 설명하지 않고 있는 진술처럼 보입니다. 언어-사고-존재의 도식이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그 문제틀이라면) 깨진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영국 17-18세기부터--혹은 그 이전에도--충분히 찾아볼 수 있고, 철학자/사상가들은 정답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그때 그때의 땜빵(...)을 하며 넘어갔죠. 만약 현준 씨가 제기하는 대로 '언어적 전회'가 근대적 조건을 넘어서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성격이고 또 어떤 지점에서 위기인지 지금보다는 구체적으로 진술해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상황에서 성급하게 현준 씨의 문제제기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건 마치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주제를 대략의 감으로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응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저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3. "사실 이러한 문제가 이론-실천의 괴리와도 상관이 있지 않은가하는 게 제 추측입니다. ... 아마 이 이러한 실천성이 가능하다는 문제에서 형님과 저의 의견대립이 유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 따라서 저는 우리의 의견대립(?)이 현준 씨가 생각하는 그 지점까지 가지도 않았다는 게 좀 더 정확한 인식일 거라 봅니다. 이론-실천 괴리 문제도 마찬가지로 지금보다는 더 명확하게 이야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4. _Sources of the Self_ Part I 이 언어-정체성-공동체라는 키워드로 현준 씨가 제기한 것과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은데, 영어 알레르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한번 읽어봐도 좋을 듯 합니다.

  4. 개선비 2015.08.03 13:57 신고 Modify/Delete Reply

    모바일 작성이라 간략히만 적겠습니다.
    제가 댓글을 단 이유 중 큰 부분은 형님이 김상환 교수의 강연록을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김상환 교수가 적은 것처럼 맥락을 잡는 책은 국내에 한 권정도만(길 출판사에서 나온 현대프랑스철학사) 있으니까요.
    형님은 저의 문제제기를 교과서적인 철학 문제이거나 불투명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러한 맥락잡기가 절대 철학에서 교과서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 봅니다) 교과서적이면 불투명하지 않을테니 결국 저의 해석이 너무 식상하지 않은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고 여기겠습니다.
    17-18세기 철학자들이 중세적 존재론에서 탈피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식은 명료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버클리나 칸트의 문제는 결국 인식론적 전회이지 언어적 전회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이미 언어-사고-존재 도식은 깨졌지만, 언어탐구가 철학의 중심 문제로 부각된 적이 없죠. 그 당시 철학자의 서술방식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칸트는 모든 것을 바꾸고 그의 작업을 비판적인 활동 말했지만, 언어 비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어-사고-존재 도식은 없어지지 않고 이후 시대로 유지되었급니다. 프레게의 언어철학이나 빈 학파, 초기 비트겐슈타인, 논리 실증주의, 포퍼, 심지어 현대의 몇몇 경험주의나 현대 언어학에서도 이 구도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격 언어적 전회는 오히려 그러한 도식 아래에서 분석철학적 전통으로서 다뤄졌고 이게 현대 언어철학의 뿌리가 됩니다. 대륙철학에서도 하이데거의 인식론적 전회에서 언어적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이러한 방식은 후설 전통이라 전 생각합니다 17-18세기의 그 철학자들이 아니라) 이후 언어 구조주의 전통에서도 드러나고 이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륙철학의 언어철학이 명료화됨 부분이 많습니다. 17-18세기 철학자들은 변화된 세계관으로 센시빌리티란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지만, 언어적 전회라기보다는 중세적 전통으로부터의 탈피에 가깝습니다. 충분하다 하시는데 언어 비판을 철학자체로 본 주류철학자가 있었나요? 제가 언어적 전회를 중요시한 것은 그러한 관점 아래의 인간관에서는 통합적-보편적 세계관을 구성하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파편화-다원화 구도로 갈 수밖에 없거든요. 이러한 문제를 단지 철학적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학문이라면 개념정의가 그 기초인데, 그것의 보편성(예전에는 실재성으로 인해 의문을 가질 필요 없었던)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를 도외시한채 작업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옳바른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고진(고진의 외부인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내재화함 결과입니다. 고진이 교통해야한다믄 대상은 제가 이전 댓글에서 언급한 물자체, a, 실존 등에 병치됩니다. 제가 고진에게 불만을 가진 점은 그가 이 문제를 손쉽게 해소하려해서였습니다.) 바디우, 지젝 등 어떤 합리성을 따지는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 것입니다. 교과서적인 문제라면 더더욱 다뤄져야할 문제 아닌지요? 합리성을 다룬 철학자라면 언어적 구속의 허구성을 폭로해 해소시키든 구속을 극복하든 해야하지 않나요? 김경만은 조금 다른 맥락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만, 하버마스가 그러한 한계 속에서 합리성을 복원하려했다고 해석합니다(하버마스는 모르니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정말 제 의문이 식상해 무시가능한지요? 언어적 전회 이후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었을까요?또한 일반적 언어관을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통사주의에서는 언어(통사 구조)가 의미도 지향성도 없이 언어적 활동을 구성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언어관에서 이론-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거 같은데요. 결국 언어적 문제를 극복해야만 뭐든 가믕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제가 그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 않냐고 추측한 이유는 표면적 합리성으로 이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서요. 사실 일반적으로 경험주의가 가능한 이유가 아까 그 도식으로 이론-존재의 간극을 없애기 때문이거든요. 사실상 대부분의 질서주의는 다 그럴겁니다.

    • 개선비 2015.08.03 13:57 신고 Modify/Delete

      형님이 추천하신 테일러의 저작은 꼭 참고하겠습니다ㅎㅎ

    • 개선비 2015.08.03 14:34 신고 Modify/Delete

      그리고 중간중간에 계속 다양한 분야의 얘기를 꺼낸 건 (제가 생각하기에) 현대의 담론 체계는 이러한 문제를 무시하거나(세속적 과학주의가 대표적)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양분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에 무시하는 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시하는 쪽은 대부분은 이미 폐기된 도식을 따르거나 토대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러한 사고가 일상적이지는 않아도 합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것도요. 사실상 (제가 인용한 김상환 교수의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잔여와 소명(저는 전자를 인식론적 한계 후자를 윤리적 규범성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으로 구성된 체계 안에서 합리성이 무엇인지는 어려운 문제며, 그러한 구성이 비록 서양적 전통이기는 하나, 현대에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체계(과학적 담론체계 등)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으며, 극복을 위해서의 대안이 그 대상만큼 탄탄해야한다(예컨대 기존의 유학담론을 그대로 재사용하는 식은 탄탄하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기존 서양담론을 깨트릴만한 게 필요하단 의미)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과학 쪽은 이러한 문제를 겪진 않죠. 학문적 토대의 위치가 다르니까요. 허나 그렇다하여도 이론-실천의 당위성을 호도하는 식으로 수사한다면(제한적으로는 발화하는 것은 문제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다면 합리성의 의문이 천박한 회의주의와는 맥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것은 근거없는 낙관론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형님이 말하고 있는 합리성이 궁금합니다.

    • BeGray 2015.08.03 16:04 신고 Modify/Delete

      아무래도 모바일 작성이라 그런지 몇 번을 다시 읽으면서 현준 씨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글쓰기로군요(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꺼낼 때 그걸 묶어주는 설명이 먼저 뼈대처럼 제시된다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요).


      1. 김상환 교수의 강연록은 시간될 때 체크해보겠습니다(일단 언어적 전회가 지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아닙니다...그것이 분명 토대를 건드리는 질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토대를 괄호쳐둔 뒤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작업이 전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2. 17-18세기 철학자들이 20세기 후반의 언어적 전회를 자신들의 중심의식으로 삼았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로크나 홉스를 읽어보면 이미 언어와 대상의 분리, 언어의 자의적 표기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나타납니다(이것이 스콜라 철학에 대한 그들의 주 비난지점이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말 벤담은 언어의 허구성에 대한 논의를 및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실의 측정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중심주제로 가져옵니다(경험주의적 전통이 일상의 상식을 은밀히 수용하곤 한다는 비판은 이들에게는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를 포함해 수학/기하학적 모델을 철학의 방법론으로 가져온 17세기의 저자들은 어떠한 언어/방법이 진리를 보장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었죠. 고전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고찰이나 고전논리학 및 수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고, 이들의 작업 또한 가장 멀리서 본다면 언어-사고-존재의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 따라서 언어적 전회가 그 "아래의 인간관에서는 통합적-보편적 세계관을 구성하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파편화-다원화 구도로 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김상환 선생의 강연을 읽어보면 되나요?). 제가 현준 씨의 설명이 교과서적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 말은 그것이 교과서에 실릴 법한 질문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 설명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서 충분히 유의미한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현준 씨의 글만 볼 때 언어적 전회는 언어에 기초한 개념 설정이 실재에 가 닿거나 보편성을 획득하는게 불가능하다는 정도의 주장처럼 읽힙니다--당연히 하버마스적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초한) '합의' 모델이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고, 다시 여기에 반론하는 입장들이 있겠죠; 소통이 어떻게든 가능하다면-이라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입장들(예컨대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출발하는)도 있을 거고요. 저는 현준 씨가 이러한 고전적인 구도를 다시 검토하고 싶다는 건지, 아니면 이러한 설명보다 좀 더 자세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부터 확인한 뒤에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의 댓글은 다소 나열되는 고유명들의 수에 비해 정보량이 충분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 제 의문이 식상해 무시가능한지요?" 같은 수사적 표현은 키배를 원하는 게 아닌 이상 불필요합니다. 제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건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오독을 별로 반기지 않는 사람이라...)

      4. "사실상 잔여와 소명으로 구성된 체계 안에서 합리성이 무엇인지는 어려운 문제며, 그러한 구성이 비록 서양적 전통이기는 하나, 현대에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체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으며, 극복을 위해서의 대안이 그 대상만큼 탄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 동의할 수 있는 문장인데, 저는 여기에서 현준 씨가 어떤 방향으로 논의를 진전시키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어적 전회 또는 파편화/다양화에 따른 불안에 대한 저의 의견이 궁금한 거라면, 저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아도르노를 따라) 물질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균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달하지 않는 이상 그와 같은 파편화는 순수하게 철학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답변은 아니지만--철학의 메타레벨에 있으니까요--나름의 일관된 사상적 입장이라고 할 수는 있겠죠.

      5. 저는 이 글에서 단 한 번도 "합리성"이란 단어를 쓴 적이 없기 때문에 제가 "말하고 있는 합리성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다른 측면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 개선비 2015.08.03 16:48 신고 Modify/Delete

      단순히 언어-사고-존재 도식의 탈피가 언어적 전회나 언어 중심의 사고, 사고의 언어 한계적 측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세기에도 의미 실재론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그때 사용된 비유가 장미의 이름입니다. 또한 데카르트가 사용한 단어를 생각해보면 이미 17세기만 되도 중세적 의미 문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데카르트가 언어적 분석은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단순 그 도식의 탈피가 의미 철학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철학자들의 의미철학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오래된 도식의 복귀/언어가 사고의 뼈대가 된다는 사고가 도입된 이후에서느 언어 비판이 철학적 작업이란 사고가 등장할 수 있었죠. 탈근대가 존재하는가 문제에 있어 만약 존재한다면 탈근대의 공통점은 언어적 한계성으로 인한 보편성의 붕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전혀 다른 포지션을 가지려는 철학자도 있겠지요)

      파편화 문제는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인식적으로 고입된 개별자가 의시소통이 가능한지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질에 기반을 둔 합리성이란 것은 그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잔여의 영역을 구심점으로 삼는 합리성이 고안된 것이고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잘 모릅니다. 그렇담 의미회의주의 아래에 발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다 생각하십니까? 이렇듯 의미의 한계성에 대한 다양한 맥락으로 비롯된 다양한 한계가 있을 때 어떻게 이론이 현실로 나아갈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론의 어원처럼 이론이 신성이란 실재의 보편자를 담보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론이 아떤 것이길래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것인지가 문제라는 갑니다. 이론은 외부적이라 불투명하거나 내부적이라 한계적일 것입니다. 물론 김상환 교수는 이런 식의 논의가 아닌 개별 언어의 특수성 문제 등 좀 더 고차원적 문제에 접근합니다. 제가 도식화한 부분은 가장 기초되는 문제고요. 다양한 층위로 정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구하는 것은 이론-실천의 연결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에 한계성을 가할 수 있는 인식론적/의미론적 문제에 대해 답해야한다는 것입니다.(실제로 답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것 없이 이론-실천의 연결성을 주장하는 것은 다리가 없다는 이들에게 다리없이 강을 건널 수 있다 말하며 아무런 수단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 고진이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도식으로 타자에 대한 무지에서 타자와 교류를 한다는 등의 사변적 논의를 했는지 생각해봐야합니다.

      합리성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론-실천이 가능한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의 보편성 혹은 실천의 합목적성 없이는 이론-실천은 불가능할테니까요. 이론이 비보편적이라면 공유되는 이론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실천이 불가능할테고(그것의 정당성은 물론 부정되고요), 실천이 이론에 부합할 수 없다면, 실천의 의미가 붕괴하고요. 결국 이론-실천이 가능하려면, 그것은 합리성을 토대로 연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unbegriff 2015.08.03 19:25 Modify/Delete

      논쟁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개선비님께서는 언어적 전회때문에 본격적으로 이론의 파편화와 다원화가 발생하신다는 전제를 논증의 저변에 깔고 계신 것 같은데, 사실 이론의 파편화와 다원화 문제와 그와 연관된 문제들은 언어적 전회 이전에도(저는 진리의 개념이 관념의 명확성으로 변화되는 헬레니즘시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숱하게 있어 왔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바로 19세기 낭만주의자들과 관념론자들이었습니다. 특히 헤겔이 자연법주의자들이나 칸트 피히테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들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실재의 전개 속에서 오직 하나의 파편화된 관점만 받아들인 채 논점 회피와 순환논증에만 빠져있다고 주장하는 지점은 19세기 관념주의가 파편화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그리고 Begray님이 쓰신 1번 글은 이 헤겔의 사유와 이로부터 파생된 비판이론의 기본 사유의 연장선이라 느꼈습니다.) 현대에 다시 헤겔이 요청되는 이유기도 한 것 같습니다. / 사실 언어적 전회가 언어-사고-존재 도식을 깨트렸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이미 언급하신 것처럼 러셀이나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관심은 언어 자체의 분석이라기보다는 언어의 논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실재의 구조와 분석이었으며, 최근의 가능세계 이론들 역시 여전히 이 도식의 주변을 맴돈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후 화용론적 논의가 활성화된 지금, 분석철학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다리를 다시 연결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용론에 의하면 언어는 단순히 자체적인 통사구조나 문법에 의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자들 사이의 실천적 맥락 속에서 언어가 어떤 행위지침을 가질 때(즉 의사소통이 성공하거나, 아니면 성공한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할 때) 발생합니다. 언어는 따라서 실천적 맥락들이 무수히 섞인채 의미를 형성해왔으며, 따라서 언어와 실천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더나아가 브랜덤, 맥도웰 등의 셀라스주의 좌파 영미철학자들은 이 실천경험 역시도 개념을 통해 짜여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통해 바로 독일의 객관적 관념론과 분석철학 전통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개선비님의 문제의식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의 서론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버마스가 이 저서에서 언어적 전회 속에서 단순한 보편주의를 넘어(보편적 세계관을 도입시키는 것을 넘어) 새롭게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의사소통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 개선비 2015.08.03 20:08 신고 Modify/Delete

      모바일이라 자꾸 오류가 뜨네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다만 현대의 파편화 문제는 극복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가 다릅니다. 제가 인용한 글의 내용도 진리 회의주의와 진리 신비주의로부터 참된 진리를 지켜내는 작업을 시도하는 내용이며, 저의 주장은 그러한 작업은 반드시 현대의 언어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를 아떤 방식으로든 극복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언어철학 내의 그러한 연구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봅니다.(특히 비트겐슈타인은요) 하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봅니다. 언어에 대한 많은 물음을 화용론적 해결방식을 통해 얼마나 설득력있게 제시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결정되겠지요. 또 이러한 방식은 언어학의 성과와 맞물릴 수 있으니 그러한 면에서 유리한 면도 있습니다.다만 언어학 내부에서도 화용론적 방법이 아닌 다른 시도가 있으며, 아직 패러다임이 완벽히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금 더 지켜봐야한다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가 어쩌다 회의주의의 환신처럼 그려지는데, 사실 중심주장은 그것의 극복은 중요한 문제며, 아직 명확한 해결책은 없으니 앞으로 더 파고들어야하지 않는가?입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김경만의 책에서도 하버마스가 로티의 비판에 대해 극복하려는 시도 끝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완성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가 어떤 방식으로 시도했는지 그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제가 영어 공포증이 있어서 번역본으로 볼 예정인데 번역이 좋길 바랍니다.

    • unbegriff 2015.08.03 20:18 Modify/Delete

      네 저도 아직 이 시도들이 성공했다고는 여기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존의 관념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어떻게 탈선험적이고 언어학적으로 이 통일을 이끌어낼 것인지 고민해야하는 것이 현 철학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남 출판사에서 출판된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국역본은 번역이 상당히 좋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비토리오 회슬레의 '21세기 객관적 관념론'이라는 책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이 책 역시 번역이 상당히 좋습니다.)

    • 개선비 2015.08.03 21:24 신고 Modify/Delete

      네 정말 그렇습니다. 알면 알수록 다양한 시도들이 보이며,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는지 알게 되는 거 같습니다.(그에 비하면 저는ㅠㅠ)

      회슬레의 책이 언급하신 독일관념론의 시도를 볼 수 있는 것인가요?
      기대되는군요.

      많은 조언 감사합니다^^

  5. 개선비 2015.08.03 20:17 신고 Modify/Delete Reply

    자꾸 뭔가 세부적 각론으로 펼쳐져 의도가 왜곡되는듯 합니다. 실제로 자꾸 이상한 부분만을 논하는 것 같군요(언어적 전회의 의미여부같은)

    언어적 전회 이런 문제와 상관없이, 원래 의도는 이론-실천이 결합된 구조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개인들간에 합리적 소통 기반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작업은 현재 부족한듯하니 더 파봐야하지 않겠는가였습니다.

    그 작업이 부적하다는 김상환 교수의 논의 방식말고도 다른 방식도 있으며, 실제로 이 부분은 극히 몇개의 분과만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대부분은 소거양식으로 무시하고 있다 보는 거고요.

    • BeGray 2015.08.04 00:59 신고 Modify/Delete

      음... 필드마다 다를 것 같아요. 언어적 전회로 인한 고립 문제를 좀 더 민감하게 인식해야 하는 필드가 있고,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써도 되는 필드가 있고. 식상한 비유를 끌어쓴다면 양자역학을 도입한다고 해서 고전물리학에 기초하는 모든 논의가 설명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가 사고-언어-존재의 투명성을 선험적으로 입증할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각각의 성공적인 소통이--혹은 성공적인 소통과 같은 결과를 공유하는 소통시도가--전부 무화되는 것도, "일반적인 소통은 대체로 성공한다"는 평범한 믿음에 기초한 이론-실천들의 효용성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닌 것처럼요.

  6. 2015.08.03 20:26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BeGray 2015.08.04 00:52 신고 Modify/Delete

      현준 씨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면 오해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본의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사용하는 lexicon이 달라서 서로의 논지에 대한 오독이 발생할 수 있는데, 어쨌든 조심 또 조심입니다 ㅋ

    • 2015.08.05 08:20 Modify/Delete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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