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일기들.

Comment 2015. 8. 2. 10:05

1.



진지한 인문학 연구자들 중에서 인문학의 무용함을 체념어린 어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인문학적 수련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체득한 고결한 인간을 만든다고 외쳐대는 인문학 신비주의자들을 비웃으면서 스스로의 체념을 현실적인 태도로 간주하곤 한다. 인문학 신비주의자들의 반지성적 믿음을 조롱하기는 쉽기 때문에 사회는 인문학 회의주의자들이 정직한 이들이라고 소리높여 칭송하는데, 물론 정말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들은 이 신비주의와 회의주의 간의 거짓된 이분법을 문제삼을 것이다. 신비주의자가 자신이 간직한 인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둔하다면,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도구가 맞닥트려야 할 현실을 사고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순진하다; 전자는 인문학에게 초월적인 위치를 부여하기에, 후자는 인문학과 현실과의 관계를 단 한번도 깊이 사고해보지 않았으면서도 판결문을 낭독하기에 주저함이 없기에 양자는 마찬가지로 월권을 행사한다. 어느 윤리학 전공자가 솔직히 인문학이 현실에 보탬이 되는 게 별로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 걸 기억하는데, 그의 현실이란 게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기에 자신이 훈련받은 사고를 적용할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한번도 병뚜껑을 보지 못한 이가 병따개의 효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인문학(들)의 분화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의 다층적인 면모를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결과이며, 역으로 다면체로서의 현실은 그 복잡성을 이해할 사유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다. 인문학적 사유는 복잡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오로지 심벌즈를 치는 동작밖에 할 수 없는 원숭이 인형처럼 단순하고 과격한 말덩어리로 전락한다. 사고가 사고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문은 현실에 침잠해야 한다. 추상적이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삶의 다면성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그러한 노력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어떠한 죄책감 없이 가하기 마련인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힘이다. 사유는 우리의 무지로부터 배태된 상처에서 솟아난 고통을 통해 태어나며, 그와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힘이다. 과거-현재에 태어난 사유는 현재-미래에 벌어질 폭력을 막는 의무를 갖는다. 세계의 복잡함은 학문적 인식을 통해 우리가 서툴고 폭력적인 결단에 너무 성급히 이끌리지 않도록, 그래서 미래의 죄를 짓지 않도록 조용히 우리의 소매를 붙들고 더 나은 길을 속삭인다.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분과에서 연구자들은 우리의 의사소통과 그에 내재된 사고과정을 다루었다. 의사소통과 사고라는 메커니즘은 여전히 인간학적 사실로 남아있으며, 그 과정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문제들이 소진된 적은 아직 없다. 그리고 인문학은, 그 자체가 계속해서 갱신 중인 사고들의 집합으로서, 자신이 다루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한 유의미한 도구모음이기를 그친 적이 없다. 폭력과 고통이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그것들이 투사되고 배태되는 의사소통장(場)이 사라지기 전에 학문의 시의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문학과 현실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학문의 무용함을 외치는 게 아니라 학문이 어떻게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학문 앞에서 현실이 어떤 면모를 보여주는가를 묻는 일이다. 창고에 얌전히 걸어두는 대신 삽질을 할 때 삽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듯이, 학문의 의미는 현실의 거대한 축적체를 향할 때에만 비로소 그 보유자에게 드러난다. 학문의 죽음은 어떤 풋내기의 자의적인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어떤 가치있는 분석도 제공하지 못하게 될 때 갑작스럽게 찾아오며, 그때 우리는 그 곁에서 세계가 그때까지 밝혀졌던 것보다도 더 다면적임을 보여주는 새로운 학문을 마주할 것이다.



2.


[미국 동성혼 케이스를 포함해 소수자와 사회주류의 '같음'을 강조하여 전자의 권익을 확장을 꾀하는 운동전략의 보수적 기원 및 한계를 지적하는 글에 대한 댓글]


저는 "같음" 전략의 득세를 단순히 우파적/전술적인 기원 못지 않게 사상사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60년대 후반부터 8-90년대까지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 신좌파적 담론들의 기저에 (자유주의적 보편성을 비판하면서) 개별자의 특수성/단독성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는 태도가 있었다면, 80년대 후반부터 (심지어 '프랑스 이론'계를 포함해) 보편성을 다시 전유하려는 사상들이 계속해서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바디우는 <윤리학> <철학을 위한 선언>을 썼고, 지젝은 첫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냈으며,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를 연재했고, 90년대 초에는 버틀러가 <쩬더 트러블>을 썼죠; 이 텍스트들은 포스트담론을 깊게 이해하고 전유한 이들이 보편성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하기 시작헀다는 점에서 미약하게라도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리고 90년대부터 (한 발작 늦게 수입하기 시작한 한국은 이떄부터 2000년대 중반 까지가 포스트담론의 전성기였고, 여전히 지젝이 포스트모던 담론의 계승자 정도로나 이해되고 있지만) 보편성의 문제를 좌파정치철학담론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영미의 공동체주의 철학이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신 니체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나 전통과 같은 '공통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죠. 미국 동성혼 운동이 이러한 시도들을 직접적으로 전유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하겠지만(그리고 어쨌든 그 보편성의 담지자가 국가-정부라는 사실이 남지만), 이질성이 아닌 보편성으로부터 기초한 담론들이 점차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저는 이러한 흐름이 득세하는 상황을 좀 더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하지만 한국의 좌파 이론, 특히 주체성의 문제를 고찰하는 사람은 공동체와 보편성이라는 키워드를 (설령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고요.



3.


삼가 故 김수행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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