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테일러 세미나.

Comment 2015. 8. 24. 04:16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_Sources of the Self_ 세미나가 이제 거의 끝나간다. 두 주 연속 마라톤 세미나를 했는데, 이번엔 5시간 반 동안 100쪽을 강독하며 나갔다. 분량 자체가 적은 것도 아니거니와 정보의 밀도가 매우 높은 텍스트라서 요점만 정리하고 페이지를 쭉쭉 넘기는 게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 사상사에 익숙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많은 세미나라 배경지식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치고 배고파도 끝까지 버텨준 세미나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다음 주 마지막 모임에서는 남은 두 장(60여쪽)을 강독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의 총정리를 하기로 했다. 7월은 계속 일만 했고 8월도 막판에 몰아서 책을 읽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그래도 방학 내내 뭔가를 꾸준히 한 게 있다면 테일러 세미나다. 그럴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사실 서구 근대의 주요한 도덕적 입장들이 형성되는 과정을 정신사적으로 추적한다는 주제 자체가 압도적으로 클 뿐더러 저자의 시야가 철학, 문학/예술, 종교, 역사를 다 아우를 정도로 폭넓기에 주눅이 들기 쉽지만, <원천들>에서 다루는 개별적인 논의들은 해당 분야에 어느 정도 귀동냥을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테일러는 직접 1차 문헌을 대체로 직접 소화하되 고전적인 2차 문헌의 해석을 섭렵해 정리하면서 거대한 정신사적 궤적을 그리는 과제를 수행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다양한 분야에 걸친 2차 문헌들을 교통정리 해가며 유기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이러한 시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감각 자체가 헤겔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으리라). 이 정도 규모의 과제를 거칠게 대충 수행하더라도 역작이 나올 법한데, 저자가 자료를 다루고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는 방식은 매우 섬세하고 사려깊기까지 하기에 설령 인용되는 2차 문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테일러가 그것을 가공하여 제시하는 서사를 쉽게 물리치기 어려울 정도다. 한 마디로 서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명료화하여 수용하는 능력 및 이질적인 서사들을 종합하는 능력 모두에서 그는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헤겔>이 헤겔의 난해한 언어를 명확한 분석적 언어로 옮기면서도 그 사유의 힘을 보존했고, 동시에 헤겔을 부분적으로만 다루는 대신 전체적인 체계를 기술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경이로웠다면, <원천들>은 같은 성격의 작업을 서구 근대 주체의 도덕적 원천이라는 거의 문명 단위에 가까운 규모에서 실현시킨다. 서구 근대의 사유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프로젝트의 터무니없음에 놀랄 것이고, <원천들>을 읽는 독자라면 테일러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적어도 그에게 가능한 자료범위 내에서--명쾌하게 수행했는가를 보면서 경이감을 느낄 것이다.

테일러는 <원천들>에서 근대를 크게 자연주의적 계몽naturalist Enlightenment의 전개과정이자,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흐름들의 등장 및 양자의 경쟁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구도, 특히 계몽 대 표현주의expressivist라는 구도 자체는 <헤겔>에서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이 구도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더불어 우리는 2007년 더 큰 분량의 대저 <세속화 시대>_A Secular Age_에서 상세하게 논의될 세속화 테제가 벌써부터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테일러는 계몽 및 자연주의적 경향에 명백하게 비판적이며, 실제로 <원천들>에서 '계몽'을 설명하는 장들은 명료한 요점정리에 가깝다. 이에 대항하는 위치에 놓인 낭만주의의 시도들을 다룬 21장 표현주의적 전환(The Expressivist Turn)이나 그 이후의 미학을 다룬 23장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비전들(Visions of the Post-Romantic Age)은 확실히 저자가 가장 엄청난 지적 역량을 투여했음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테일러가 구상한 서구 근대의 거대한 전체서사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가장 힘있고 빛나는 부분이다. 아직 마지막 두 장을 읽지 않아 확언하긴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원천들>의 독서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대목이 바로 21장과 23장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책을 펼쳤다면 비록 기나긴 분량이--물론 <세속화 시대>보다는 짧다--지루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라고 해도 조금만 참고 거기까지 가보기를 권한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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